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97화 (96/189)

헛수고 (2)

붉은 문양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마법진과는 사뭇 다른 신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클락은 설마라고 생각하면서도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발견하는 자는 상식을 벗어나는 초능을 얻을 수 있다는, 모험가들 사이에서 소문으로 무성히 들었던 보물. 신비의 문양.

'정말······ 로 신비인가?'

클락은 조심스레 문양을 향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홀린 듯 손을 뻗었다.

한순간 환한 빛을 뿜어낸 문양이 팔을 타고 올라와 몸으로 흡수되었다.

이내 문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클락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이한 감각에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쿠구궁.

"······?!"

갑작스러운 굉음에 정신을 차리고 퍼뜩 고개를 돌렸다.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어느새 무기를 치켜들고 있는 석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콰아앙!

클락은 기겁하며 옆으로 몸을 던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석창을 날아들어서 바닥에 박혔다.

그는 공격을 피하고서 스스로 놀랐다. 평소보다 훨씬 더 신속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몸.

그가 흡수한 신비의 능력은 다름이 아닌 육체의 속도를 상승시켜주는 능력이었다.

신비를 흡수한 순간부터 머릿속에 함께 흘러들어온 지식이 그 가속의 능력을 곧바로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끔 했다.

"으아아아······!"

속도를 최대로 끌어올린 클락은 비명을 지르며 몰아치는 석상들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했다. 본능에 가까운 회피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증폭된 육체 능력에 한순간에 적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가지 못해서 발을 헛디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다급히 일어나려는 클락의 다리에 석상의 공격이 스쳤다. 단지 스친 것만으로도 허벅지가 너덜너덜 찢겨나갔다.

"끄억!"

다시금 한 차례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는 클락이었다.

다리에 치미는 아찔한 격통에 몸을 가눌 수도 없었다.

주위를 에워싼 채 다가오는 석상들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콰과광!

석상들이 돌연 일제히 쓰러졌다.

클락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슬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바닥에 허물어진 석상들은 동작이 완전히 정지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공동으로 걸어들어오고 있는 한 인형이 보였다.

혹시 단원들인가 싶었지만 낯선 젊은 남성이었다.

"······."

방금 뭘 한 거지?

저 사람이 가디언들을 쓰러뜨린 건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클락은 이쪽에 닿은 남자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본 남자가 공동의 중앙으로 저벅저벅 다가와서, 바로 곁에 멈춰섰다.

"넌 뭐냐."

남자의 물음에 클락이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

"모, 모험가입니다. 당신은 누구신지······."

"여기에 어떤 문양이 하나 있었을 텐데."

"······."

"혹시 못 봤나?"

남자가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클락의 사고가 한순간 정지했다.

그는 등골에 으스스 올라오는 소름을 느끼며 뱀 앞의 개구리처럼 바짝 얼어붙은 채 꿀꺽 침을 삼켰다.

바로 방금 자신이 흡수한 신비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이 남자가 누구인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어도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엿 됐다는 걸.

"모, 못 봤는데요."

***

'······늦었네.'

나는 두려움에 질린 채 주저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 공간은 분명히 내가 가속의 신비를 발견했던 공간이 맞다.

하지만 문양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니 경우는 둘이었다.

아직 신비가 생성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가 먼저 흡수해버렸거나.

반응을 보니 후자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있던 가속의 신비는 이미 이 남자에게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정말로 전 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정말입니다."

남자는 그 말만을 반복하며 믿어달라는 듯 간절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자신이 신비를 흡수한 걸 알면 내가 죽이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이미 흡수한 걸 도로 내뱉게 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별 수 있나.

어차피 크게 쓸모가 있을 신비는 아니었고, 이번엔 그냥 좀 재수가 없었다고 여기는 수밖에.

'그런데 들어온 흔적은 여럿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고 이렇게 혼자서만 달랑 있나 싶었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신경을 껐다.

그리고 굳어있는 남자를 두고 몸을 돌리려던 때.

쿠구구구.

갑작스레 진동이 일더니 공동의 중앙 바닥이 천천히 열렸다.

바로 근처에 앉아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레 나타난 구덩이에 한가득 묻혀있던 건 반짝이는 금은보화였다.

······그러고 보니 이 유적에 이런 보상도 있었던가?

재화야 뭐 챙길 이유도 없었기에 관심을 끄고 다시 바깥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

공동 입구에서 또 다른 기척들이 느껴지더니, 이내 여러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장!"

남자가 소리치는 걸 듣고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들이 바로 던전에 들어온 흔적의 주인들이었다는 걸. 모험단인 건가?

한 명만 이곳에 따로 떨어져 있던 이유는 함정 때문에 갈라지기라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흔한 경우였으니까.

그들도 남자를 발견하고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클락, 살아있었나?"

"간신히 살았죠! 못 봤습니까?! 헤이른이 절 미끼로 삼고 혼자서 튀려고 했다고요! 기껏 도와줬더니!"

활을 메고 있던 여인이 움찔 놀라며 버럭 소리쳤다.

"우, 웃기지 마! 네가 멋대로 쓰러진 걸 왜 내 탓을 하고 있는데!"

"지랄하고 있네, 빌어먹을 년이!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욕설이 난무하는 험악한 대화가 이어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들어보니 함정에 빠졌다가 저기 보이는 활을 멘 여인에게 뒤통수를 맞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남자가 씩씩거리며 여인을 죽어라 노려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다들 어떻게 여기로 온 겁니까? 전 함정에 떨어졌는데······."

"우리도 모른다. 지나온 길이 막혀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니 여기에 도달했다. 그런데······."

단장이라 불린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한쪽에 있는 금은보화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

모험가들이 탐욕에 깃든 시선이 일제히 금은보화에 고정되었다.

한순간 공동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째 상황이 귀찮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스치는 중, 단장인 남자가 몇 명과 슬쩍 시선을 교환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누구냐, 클락."

"예? 그, 그건 저도 잘······."

남자가 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내가 입을 열려는데 활을 멘 여인이 끼어들었다.

"다, 다들 보여? 저기 구덩이에 쌓인 게 다 금은보화야! 우리 이제 부자라고! 응?! 단······."

푸욱!

그 순간 여인의 가슴팍을 꿰뚫고 검날이 튀어나왔다.

환희에 차서 소리치던 그녀의 눈이 찢어져라 크게 뜨였다.

"꺽······."

검을 찌른 이는 바로 단장인 남자였다.

근처에 서있던 다른 단원들이 기겁하며 돌아봤다.

"지금 뭔······?!"

그 순간 몇몇 단원들이 이어 나서서 나머지 단원들을 기습했다.

창을 든 단원이 바로 옆에 있던 단원의 목을 찔렀고, 로브를 입고 있는 여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두 단원에게 불덩이를 날렸다.

공격을 피한 한 명이 다급히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어느새 퇴로를 점한 다른 단원에게 목을 베였다.

그렇게 기습적인 합공을 받은 이들은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모두 순식간에 절명했다.

단장인 남자를 포함해서 남은 인원은 총 4명.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동료들을 모두 죽여버린 그들이 무기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이쪽을 바라봤다.

"어, 어······?"

남자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봤고, 나도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무슨 개판이야?

***

"······이게 지금 무슨."

클락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단원들의 시체.

단장인 레그닐과 토마스, 앤, 바록, 네 사람이 나머지 단원들을 모두 기습해서 죽여버린 것이었다.

'대체 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면 그들 넷은 모험단에서 가장 오래된 결성 멤버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던전의 보물.

이들은 자기들끼리 보물을 차지하려고 나머지 동료들을 전부 죽여버린 것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 미친 새끼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냐?"

남자의 중얼거림에 마법사인 바록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하여튼 눈치 하나는 빨라? 물론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얘기해뒀지. 진짜 보물이라도 있으면 우리끼리 꿀꺽하자고."

클락은 믿을 수가 없어 레그닐을 쳐다봤다.

처음 이 모험단에 입단을 결정했던 이유도 단장인 그의 인품을 좋게 봤었기 때문이었는데, 설마 이런 본성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한순간에 믿음에 배신을 당했다.

레그닐은 그런 클락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서 검을 뻗었다.

그의 검날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향해있었다.

"너도 모험가인가? 던전에는 언제 들어온 거지?"

"······."

"뭐,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놈인지는 몰라도 재수가 없었구나."

레그닐의 말에 남자는 잠시 말없이 서있다가,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소득도 없는데 별 귀찮은 일이 다 꼬이네, 진짜."

남자가 옆의 구덩이에 쌓인 보물을 힐끗 쳐다보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뭘 간을 보고 있나. 싹 다 죽이고 보물을 독식하려는 게 아니냐?"

레그닐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죽······."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꺼지듯 사라진 남자의 모습이 돌연 레그닐과 단원들의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

네 사람이 경악한 얼굴로 차마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다음 순간 그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는 상황이 혼란에 빠져있던 클락은 완전히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좀 전에 가디언들을 처리했던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을 죽여버린 것이었다.

클락이 일순간 흐릿하게나마 본 거라고는 남자에게서 핏물처럼 시뻘건 무언가가 쏘아졌다는 것뿐이었다.

"아······."

그 광경을 바라보며 클락은 저도 모르게 맥빠진 신음을 흘렸다.

혼란스러움과 배신감, 그럭저럭 긴 시간을 함께했던 모험단이 전멸해버린 허망함, 그리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남자가 이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왔다.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찢겨나간 마당에 몸을 일으키는 것도 힘들었다.

이제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한 클락은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곧 남자가 품에서 꺼내든 물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붉은빛의 액체가 안에서 찰랑거리는 작은 유리병. 바로 포션이었다.

"이왕 얻은 신비니 잘 써봐라."

근처 바닥에 포션을 내려놓은 남자는 그저 그 말만을 남기고는 도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남겨진 주인 없는 보물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출구로 걸어가버렸다.

클락은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반쯤 탈진해서 주저앉은 채로 몸을 휘청였다.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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