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96화 (95/189)

헛수고 (1)

어두운 내리막 통로를 걸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무리 초감각이 있어도 빛 한 점 없는 완전한 어둠까지 꿰뚫어볼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챙겨온 발광석에 의지해서 시야를 밝혀야 했다.

아직까지 위험은 없었지만 던전이니만큼 갑자기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는 알 수 없다.

게임에서 내가 직접 찾아냈던 장소이기는 하지만, 워낙에 예전이니 확실히 기억나는 건 많이 없었으니까.

함정보다도 가디언들이 상당히 많은 던전이었다는 것 정도만 대충 떠올랐다.

'여기 던전의 가디언들이 몇 레벨쯤이었더라.'

한 30, 40레벨쯤 됐었나?

그중에 보스 격이었던 놈들은 아마 50레벨이 넘었던 것 같다.

뭐가 됐든 지금의 내게 위험이 될 만한 건 없을 테니 문제는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별 긴장감 없이 계속해서 성큼성큼 나아갔다.

앞선 불청객들의 흔적 또한 끊기지 않고 나아가고 있는 길로 계속 이어져있었다.

일자형 통로가 끝나고 나타난 건 중간이 끊긴 길이었다.

장애물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절벽처럼 완전히 단절되서 끊긴 길이.

"······."

나는 약간 황당함을 느끼며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동굴 지하에 있기에 썩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지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입구에 이런 길목도 있었던가?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어 절벽 아래로 던져보니 한참 지나서 작게 소리가 울렸다. 적어도 몇백 미터는 되는 듯했다.

나는 멀리 떨어진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공간 도약을 사용해서 건넜다.

근처에 땅바닥이 유독 거칠게 쓸린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착지한 흔적인가?

아무래도 불청객들은 그냥 도약해서 건넌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이동하자 이번에 나타난 건 여러 갈래의 갈림길이었다.

나는 6개로 나누어진 통로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갔던 통로는 아마 한가운데 통로였었지.

하지만 신비가 어느 통로로 이어진 곳에 있었는지는 기억이 흐릿했다.

통로가 안쪽에서 서로 이어져 같은 자리로 되돌아와 빙빙 돌며 헤맨 기억도 있었기에 헷갈렸기 때문이다.

'결국 맨 오른쪽으로 이어진 통로에서 찾았었나? 아니, 왼쪽이었나······.'

맨 왼쪽 아니면 오른쪽이라는 건 그나마 확신할 수 있었다.

불청객들의 흔적은 왼쪽에서 2번째 통로로 이어져있었다.

나는 이내 맨 왼쪽의 통로를 선택하고 걸음을 옮겼다.

잘못 선택하면 죽는 것도 아니고, 틀렸으면 뭐 도로 되돌아와서 다른 통로들도 확인하면 그만이었으니.

통로 안쪽으로 나아가자 슬슬 인공적인 느낌이 가미된 공간이 나타났다.

사방에 난잡하게 박히고 그려진 마석과 마법진들.

사방의 벽면에 또 다른 통로들이 수십 개가 숭숭 뚫려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또 갈림길인가?

콰아앙!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그때, 갑작스럽게 들어온 입구가 멋대로 닫혀버렸다.

이어서 마석과 마법진들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마력의 기운이 강해졌다.

사방에 나있던 통로에서 수많은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쿠웅. 쿠웅.

암석으로 몸체가 이루어진 네발짐승 형태의 가디언들.

어둠 속에서 떼지어 나타난 놈들의 두 눈과 마디 관절들이 푸른 빛으로 빛났다.

레벨은 모두 31레벨이었으며, 그 수가 대충 봐도 수십은 가볍게 넘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이런 공간도 있었던가?

가물가물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포위하듯 사방을 둘러싼 놈들이 일제히 돌진해왔다. 나는 위쪽 허공으로 순간이동했다.

갑작스레 사라진 목표물을 놓친 놈들이 한순간 저들끼리 엉켜서 부딪히다가, 곧 위쪽을 올려다봤다.

몇 놈은 도약해서 나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장막에 막혀서 도로 떨어질 뿐이었다.

'하여간 참.'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들어온 입구는 막아놓고, 도망갈 공간도 없이 가디언들을 무더기로 풀어놓고.

이 정도면 들어오는 놈은 그냥 죽으라고 만든 거나 다름없는 던전이었다.

이 던전을 제작한 마법사는 꽤나 성격이 더러운 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퍼어엉!

장막을 해제함과 동시에 아래로 떨어지며 혈술을 펼쳤다.

사방으로 터져나간 핏물이 닭 쫓던 개마냥 위를 올려다보고 있던 가디언들의 몸체를 적셨고, 놈들은 일시에 동작을 정지했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나는 우수수 쓰러진 가디언들을 둘러보다가 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놈들이 튀어나온 통로 중 가장 입구의 크기가 거대한 통로로.

마력의 기운이 유독 거대하게 느껴지는 그곳에서는 아직 아무런 가디언도 튀어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쿠우웅.

곧 육중한 땅울림과 함께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튀어나온 놈들과 다를 것 없이 네발짐승의 형태를 띄고 있는 가디언.

하지만 크기는 그 몇 배는 될 정도로 거대하다.

【Lv. 52】

······그래, 그러고 보니 이런 놈도 있었지.

놈이 이쪽을 향해서 돌진해왔다. 덩치에 전혀 맞지 않는 가공할 속도.

나는 곧바로 혈술을 펼쳐 놈에게 핏방울을 쏘아냈다.

하지만 날아간 핏방울은 놈의 몸체를 두르고 있는 마력 장막에 막혀서 닿지 않았다.

"어."

콰아아앙!

짧은 탄식과 함께 공간 도약을 사용해서 회피했다.

날 대신해서 암벽을 강타한 가디언은 벽면 한쪽을 완전히 무너트리고서 기계처럼 몸을 일으켰다.

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런 놈을 바라봤다.

아예 패시브로 방어막을 두르고 있을 건 또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잠깐의 여유를 부릴 틈도 없이 놈이 곧바로 다시 이쪽을 향해서 뛰어들었다.

나는 마치 투우사가 된 기분을 느끼며 부동 장막과 공간 도약을 번갈아 펼치며 공격을 막고 피했다.

'······어쩌지?'

버티며 상대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이래서야 쓰러뜨릴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힐끔 들어왔던 입구의 문을 바라봤다.

은은한 푸른빛이 뒤덮혀서 빛나고 있는 게 마찬가지로 마력 장막이 덮여있는 듯했다.

그럴듯한 방법이 떠오른 나는 통로 바로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개의치 않고 방향을 틀어서 돌진해오는 놈을 공간 도약으로 피했다.

콰아앙!

놈이 출구의 장막과 거하게 충돌했다.

충격을 버티지 못한 출구가 한 번에 문째로 산산히 박살났다.

내가 뚫린 입구로 빠져나가자 놈도 계속 끈질기게 뒤쫓아왔다.

나는 공간 도약과 장막을 연신 사용하며 그런 놈을 이끌고 아까 전 통로 초입의 절벽까지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절벽의 한가운데 허공으로 순간이동해서 장막을 펼쳤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향해서 도약했고, 장막에 부딪혔다가 그대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어휴······."

도로 땅에 착지한 나는 조금 지쳐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셸도 데리고 들어오는 건데.

이제라도 도로 나가서 데리고 올까 했지만 관두고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나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서 가디언들이 있던 장소의 출구를 지나쳤다.

다시 긴 통로가 이어졌고, 더 이상 튀어나오는 함정이나 가디언은 없었다.

이내 눈앞에 펼쳐진 또 다른 거대한 통로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여기다.'

위쪽 벽에는 눈동자처럼 생긴 어떤 문양이 있었는데, 분명 가속의 신비가 이렇게 생겨먹은 통로 너머에 있었다는 건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통로의 입구를 지나쳤다. 그리고······.

"······?"

이내 안쪽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인기척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저, 단장. 이제라도 그냥 돌아가면 안 되겠습니까?"

클락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연신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두운 통로를 걷고 있는 9명의 남녀.

이 모험단의 신입이자 짐꾼을 겸하고 있는 그에게 발언권이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에 튀어나온 가디언 무리만 해도 하마터면 누구 한 명이 죽어나갔을 정도로 위험천만했으니까.

안쪽으로 들어가서 더 위협적인 가디언이 튀어나온다면 모험단이 전멸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이씨, 너 내가 닥치라고 했지?"

시위에 활을 걸고서 후방을 경계하던 여인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렇게 겁나면 징징거리지 말고 혼자서 빠져나가라고, 응? 아니면 그냥 여기서 네 묫자리부터 깔아주고 가랴?"

"헤이른, 집중해라."

가장 선두에 서있던 남자가 엄한 목소리로 끼어들어서 말했다. 그녀가 혀를 찼다.

"그러려고 해도 저 병신이 자꾸 짜증나게 하잖아. 별 쓸모도 없는 새끼 하도 사정해서 받아줬더니, 어휴······."

클락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처먹은 짬만 많지, 솔직히 모험단에서 능력도 제일 달리는 년이 갈구는 건 단원들 중에 최고였기 때문이다.

"클락, 너도 그쯤 해라. 조금만 더 들어가보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갈 테니. 나에 대한 신뢰가 그 정도로 없는 거냐?"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단장."

그에 반해 단장인 레그닐의 타이름은 점잖기 그지없었다.

클락은 순순히 사과하고서 마음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잡았다.

'그래, 그래도 던전인데 단장도 이대로 포기하기는 아깝겠지······.'

그가 누구보다도 단원들의 목숨을 중시한다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단지, 이건 모든 모험가들이 바라 마지않는 일확천금의 기회가 아닌가?

저 안에 기다리고 있을 보상은 분명히 감수하는 위험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

철컥.

모두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어, 어?"

활을 든 여인이 당황해서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단원들의 표정이 일제히 딱딱하게 굳었다.

쿠구구구.

진동이 가까워지고, 곧 지나온 길에서 자그마한 벌레 형태의 가디언들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뛰어!"

저건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모두가 보자마자 깨달았다.

단장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단원들이 허겁지겁 전력질주했다.

클락도 하얗게 질려서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걸 참으며 죽어라 달렸다.

"······아악!"

그때 바로 옆에서 뛰던 여인이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다.

"도, 도와줘! 나만 두고 가지 마! 아악!"

클락은 뜀박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벌써 지척까지 다가온 벌레 가디언 몇 마리와 엉켜서 바닥을 뒹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앞장서서 뛰고 있는 단원들은 그녀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전방에 닫히고 있는 통로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욕을 뇌까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칼을 뽑아들고 그녀를 공격하는 벌레 가디언들을 쳐냈다.

"빨리! 문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퍼억!

순간 클락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낑낑거리며 일어난 여인이 팔을 부축하던 그의 몸을 발로 차버린 것이었다. 그리고는 혼자서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벌떡 몸을 일으킨 클락은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 미친년이 진짜······! 끅!"

그는 팔목을 물어뜯은 벌레 가디언을 쳐내고 서둘러서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이미 뒤쳐졌던 상황에 앞장선 단원들을 따라잡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철컥.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함정을 밟은 클락의 몸이 다시금 기울어졌다.

갑작스레 땅바닥이 푹 꺼지며 나타난 내리막에 그의 몸이 추락하는 것과 다름없이 데굴데굴 굴렀다.

막힌 벽에 부딪히고서 간신히 몸이 멈추긴 했지만 재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르르 몰려떨어지는 눈앞의 가디언들을 보며 그가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아아아!"

쿠우웅!

그 순간 앞쪽에 갑작스레 떨어진 석벽이 공간을 단절하고서 가디언들을 막아주었다.

클락은 창백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욱씬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씨발."

여기는 또 대체 어디야?

뭐가 뭔지는 몰라도 제대로 엿 됐다는 사실 하나만은 모를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석벽 때문에 간신히 살긴 했지만 나갈 길이 완전히 막혔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이내 옆쪽에 나있는 다른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달리 갈 길도 없었기에, 클락은 다시 한 번 욕을 내뱉고서 천천히 통로 안쪽으로 이동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서 걷자 곧 나타난 건 넓은 공동이었다.

"······."

공동의 곳곳에는 거대한 석상들이 서있었다.

클락은 얼떨떨한 눈으로 공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에 시선을 고정했다.

붉은색으로 은은한 빛나고 있는 바닥에 새겨진 문양에.

그리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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