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95화 (94/189)

무구 제작 (2)

미세하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마치 질척이는 어둠과 같은 음산하고 흉험한 기운.

나는 초감각을 끌어올려 어둠 너머로 보이는 창고 안쪽을 반쯤 노려보듯 응시했다.

시야에 들어온 건 묵색의 상자였다.

사슬 같은 것으로 둘둘 둘려있는 게 한눈에 봐도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사슬에서는 마력이 느껴졌다.

그것은 다른 광석들과 떨어져 홀로 구석에 박혀있었는데, 느껴지는 기운의 근원은 바로 저 상자 안에 있는 듯했다.

"느껴지는가? 과연 뛰어난 감각이군."

그때 신퇴가 그렇게 말하며 따라서 창고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셸은 느껴지지 않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안에 뭐가 있지?"

광석들을 보관하는 창고인 줄 알았는데, 무슨 마법 아이템이라도 들어있나?

아주 희미하게만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로 기분이 불쾌해질 정도였다.

신퇴에게 묻자 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순순히 대답했다.

"광석이네. 주위에 보이는 것들과 다를 것 없는."

"······광석이라고?"

"물론 평범한 광석은 아니지. 한번 직접 살펴보겠나?"

신퇴가 걸음을 옮겨서 상자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잠금 장치 같은 것을 간단히 풀어버리고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던 건 그의 말대로 광석이었다.

검은빛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광석.

단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을 한가득 띠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지.

뭔 재질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자 자체가 그 기운을 차단하고 있던 건지, 뚜껑이 열리자마자 기운이 확 강해졌다.

"이건 예전에 마경 옥테아에서 우연히 구했던 것으로, 아직 붙인 이름이 없지만 내가 평생에 본 것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훌륭한 광석이네. 하지만 장비 제작에 사용하기엔 힘든 재료지."

······옥테아에서 구한 거라고?

내가 이전에 가본 적이 있는 할루멘타와는 또 다른 마경이었다.

재료로 사용하기 힘들다는 건 또 뭔 소리인가 하니, 신퇴의 설명이 이어졌다.

"자연에서 생성되는 광물 원석은 온갖 무궁무진한 종류가 존재하지. 그중에는 아주 드물게 단순히 마력 전도가 강한 것뿐 아니라 고유의 특성을 지닌 것들도 있는데, 이건 어떤 원리로 생성된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온갖 영혼 파편들이 뭉쳐져 혼탁한 사념이 깃든 광석이네. 본래 마경이야 온갖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니 놀라울 것도 없지만."

"······?"

"직접 손을 대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걸세."

나는 검은 광석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그 말대로 손을 대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광석 안에 존재하는, 내 의식에 침투해오려 드는 강대하고 사이한 존재감을.

- 끼아아아······!

머릿속에 웃음과 괴성과 섞인 듯한 기괴한 울림이 메아리처럼 맴돈다.

수백, 수천, 수만······ 그 안에서 신퇴의 설명대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념들의 존재가 느껴졌다.

제왕의 혼 덕분에 정신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바로 정신줄을 놔도 이상하지 않을 기운.

마치 이전에 혈술을 얻을 때 경험했던 가스칼리드의 혈정을 떠올리게 했다.

"정신 사납군."

내가 별 기색 없이 도로 손을 떼자 신퇴는 사뭇 놀란 기색이었다.

"이 사념 때문에 재료로 쓰는 게 어렵다는 건가?"

"그렇네. 단순히 정신력이 강하다고 해서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니까."

신퇴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궁금하다는 듯 광석을 쳐다보고 있는 아셸에게 말했다.

"궁금하다면 손을 대보거라. 네가 이 광석에 깃든 사념을 견딜 수 있다면, 기꺼이 이걸 재료로 사용해 최고의 검과 갑옷을 제작해줄 터이니."

그에 아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과연 그녀가 버틸 수 있을지는 나도 궁금했다.

결과는 곧바로 나왔다.

"······!"

광석에 손을 올리자마자 한 차례 헛숨을 들이키더니, 몇 초 지나지도 않아 기겁하듯 손을 떼버렸다.

그 잠깐 사이에 아셸은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하게 질린 안색이 되었다.

90레벨까지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인가?

이 광석에 깃든 사념은 생각보다도 훨씬 위협적인 모양이었다.

"사념만 없앨 방법은 없나?"

신퇴가 고개를 저었다.

"진작 대군주에게도 부탁해봤지만, 광석을 파괴하지 않고 사념만 없애는 건 힘들겠다고 하더군. 단순한 제련이나 마법적인 처리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물끄러미 광석을 쳐다봤다.

문득 생각이 따올랐다.

'······이것도 되지 않으려나?'

추측하기로, 내 즉살 능력은 대상의 영혼 자체를 소멸시키는 능력이다.

그렇기에 이전에 혈정 때도 가스칼리드의 잔여 사념을 없애는 게 가능했었다.

그러니 아마 이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 광석에 깃든 사념 역시 즉살로 없앨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게 아닌가?

신퇴가 제 입으로 평생에 본 것들 중 손꼽을 정도로 훌륭한 광석이라 했으니, 만약 이걸 재료로 사용한다면 굉장한 무구가 탄생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셸이 좋은 무구를 사용할수록 내 전력이 크게 상승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그건 아주 좋은 일이었다.

이전에 긴급 소집 때 봤던, 신퇴가 오리하르콘을 사용해 제작한 최고의 신갑인 '가엘디드' 못지 않을 정도로······ 아니, 그 정도까지는 너무 설레발인가. 아무튼.

"사념에 대한 문제만 해결되면, 이 광석을 재료로 아셸의 무구를 제작해줄 수 있나?"

"그래. 하지만 말했다시피 아직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한 번 광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즉살을 사용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던 괴성이 한순간에 뚝 끊겨 사라졌다. 광석에서 풍기던 사이한 기운 또한.

생각한 대로 사념이 성공적으로 소멸한 것이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신퇴가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지금 무엇을······."

나는 광석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광석에 깃든 사념을 없애버렸다."

"······?"

신퇴가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은 기색으로 광석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리저리 광석을 훑어보다가, 곧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놀랍군. 정말로 사념이 완전히 소멸했어. 방금 무엇을 한 건가?"

여태 차분하기만 했던 목소리에서 약간은 들뜬 기색마저 느껴지는 게, 정말로 놀란 듯했다.

그의 눈에는 그저 광석에 손을 댔다가 떼기만 한 것으로 보일 테니 놀라울 건 당연했다.

"이제 문제가 없는 거겠지?"

신퇴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한 대로 이걸 재료로 써서 무구를 만들어주겠네. 허 참, 몇십 년은 창고에 박아뒀던 애물단지였는데······."

광석의 크기는 상당해서, 아셸 몫의 검과 갑옷 한 벌을 만들고도 절반은 훨씬 넘게 남겠다 싶을 정도로 컸다.

나는 문득 신퇴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사용하는 사람과의 성질 호응도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이 검은 광물은 아셸의 마력하고 잘 맞기는 한 건가?

겉으로만 보면 색이 정반대이니 뭔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가 않은데.

신퇴가 고개를 저었다.

"효율이 어느 정도 비슷한 광석들끼리 그렇다는 거지, 이건 방금 살펴봤던 것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니 상관없네. 마력 전도든 내구성이든 무엇이든."

······뭐, 어련히 알아서 잘 만들어주겠지.

나는 광석에 정신이 팔린 그에게 이것저것 더 묻지 않았다.

창고를 나온 뒤, 우리는 곧바로 떠나기 위해 군주성에서 나섰다.

볼일이 다 끝났으니 더 머무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무구는 제작이 모두 끝나면 7군주령으로 전령을 보내겠다고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1군주님."

아셸이 신퇴에게 조금 뒤늦은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녀야 의지와 상관없이 반쯤 끌려서 따라온 감이 있었지만, 어쨌든 무려 대륙 제일의 대장장이가 직접 제작한 장비를 받게 된 것이었으니까.

신퇴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배웅했다.

"그럼 살펴 가게, 7군주."

바로 띠용이의 등에 오르려는데, 그가 갑자기 다시 아셸을 불렀다.

"한데, 너는 그론힐트의 비전을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한 것 같더구나."

"예."

"내가 기억하기로 마력의 코어를 3개로 나누는 운용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맞느냐?"

"······예, 그렇습니다."

일족의 비전을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아셸은 조금 떨떠름한 기색이 되었다.

"오해하지 말거라. 모두 네 선조에게 직접 들은 내용일 뿐이니까. 그저 대략적인 원리만 알고 있을 뿐이다."

신퇴가 말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네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서다. 이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가 기억을 더듬는 듯 말했다.

"분리된 코어를 각자 별개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로 여기고 제어해라."

"······."

"네 선조가 비전과 관련하여 마지막 벽을 넘기 위한 핵심이라고 했던 말이다."

아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반응에 신퇴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니 알고 있었던 내용은 아닌 것 같구나."

"예······."

"당시의 네 선조는 군주와 비교해도 무색하지 않을 경지를 이룩한 이였다. 너 또한 그의 유산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신퇴는 덤덤한 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아셸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나도 조금은 궁금해졌다. 그 아셸의 선조라는 인물과 신퇴가 어떤 사이였던 것인지.

수백 년 전의 아득한 인연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이런 조언을 해주는 것만 봐도,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였던 것 같은데······ 음.

"가자."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입을 열었다.

띠용이가 육중한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쨌든 무구 제작도 맡겼으니, 이제 본래 계획대로 다음 목적지로 향할 때였다.

세인테아에 숨겨져있는 신비들이 있는 장소로.

***

세인테아의 북쪽에 위치한 메마른 광야.

얼굴을 쉴 틈 없이 때리는 건조한 바람에 나는 연신 눈을 비비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식물 하나 없이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칙칙한 바위들뿐인 이곳에 찾아야 할 신비가 있다.

'가속의 신비.'

이름 그대로 속도를 높이는 신비였다.

몸을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는 신비.

몸을 쓸 일이 거의 없는 데다가 이미 공간 도약도 얻은 내게는 거의 쓸모가 없는 능력이었지만, 어쨌든 가진 능력이야 많고 다양할수록 좋은 거니까 이렇게 찾기 위해 왔다.

가속의 신비는 게임에서 내가 직접 발견했던 신비였고, 숨겨진 장소의 지형도 눈에 띄었기에 찾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띠용이를 타고 날아다니며 금세 평원 한가운데 위치한 자그마한 웅덩이와, 그 근처의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언제나처럼 아셸은 바깥에 남겨두고 홀로 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예전에 찾았던 부동 장막의 신비처럼 던전이 위치한 장소였다.

굴 안쪽으로 끝까지 들어가서 주위를 탐색하자 곧 던전의 입구인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

나는 미간을 좁혔다.

누가 먼저 던전 안으로 들어간 듯 문이 활짝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초감각을 끌어올려 지나왔던 길을 자세히 훑어보자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흔적들이 있었다.

땅바닥의 쓸림, 희미한 발자국, 누군가 먼저 이 던전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간 흔적들을.

나는 조금 황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게임상에서, 그러니까 미래 시점에서 나보다 이 던전을 먼저 발견했던 사람은 없었으니까.

무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대체 왜? 착각이었나? 아니면 내 존재로 인한 나비효과로 생긴 변수인가?

"······."

다시 나온 흔적은 없는 걸 보니 아직 불청객들은 안에 있는 듯했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열린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는데 신비가 무사히 남아있는지는 확인해야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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