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 제작 (1)
회의장에서 나오며 앞으로 할 일들을 정리했다.
계승자 찾기, 그리고 마탑주 암살.
둘 중에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결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단 마탑주 처리부터.'
긴 시간이 주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여유를 부려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었다.
뭘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할지 계획한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혹여 제시간 내에 해결하지 못했다가는 내 능력을 의심받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건 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계승자 찾기는 다른 데에 신경 분산될 일 없이 잡일들을 전부 끝내놓고 시작하는 편이 나으리라.
'그래도 신비부터 가장 먼저 챙기는 게 낫겠지?'
세인테아에 숨겨져있는 2개의 신비.
그거야 뭐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으니 찾아두고 시작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마탑주를 처리하는 일에 혹시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거고 말이다.
그러면 우선 신비를 찾고, 다음으로 마탑주를 처리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계승자 찾기를 시작하면 되겠······.
"······?"
나는 저멀리 보이는 인물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띠용이가 기다리고 있는 자리에 신퇴가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르릉.
자신의 주위에 있는 신퇴를 경계하듯 연신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고 있는 띠용이.
그리고 신퇴는 거리를 둔 채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런 녀석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곧 내게로 시선을 돌린 그가 말을 걸어왔다.
"대군주와 이야기는 잘 마쳤는가?"
······날 기다리고 있었나?
딱히 그와 나눌 만한 말은 없었기에 뭔 용건인가 싶었다.
나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대군주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고 있나?"
"모르네. 별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저 인사차 물은 것이야."
고개를 저은 신퇴가 물었다.
"조금 묻고 싶은 게 있어 기다리고 있었네. 저번에 자네가 참여한 중립국 회담과 관련하여······."
"······."
"듣기로는 어스힐 왕국의 편을 들어 7군주 그대가 전쟁 발발을 막아주었다고 하더군."
갑자기 중립국 이야기가 왜 튀어나오나 싶었지만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그랬지."
"혹시 어스힐을 도운 이유가 개인적인 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인가?"
"······내가 그걸 대답해줘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메인 스토리, 테이르, 여러 이유들이 섞이긴 했지만 그걸 굳이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그보다 신퇴가 왜 갑자기 거기에 관심을 가지는 거지?
"캐묻고자 했던 건 아니네. 단지 자그마한 노파심이 들었을 뿐이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이내 말을 이었다.
"이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현 칼데릭의 체제에 균열이 발생하기를 원치 않는다네. 군주들 모두 각자의 생각과 뜻들을 품고 있지만, 그것이 갈등이 될지언정 반드시 충돌의 결과로 이어져야만 하는 건 아니야."
"······?"
"서로 한 걸음씩만 물러선다면 나아가는 방향이 다르더라도 얼마든 공존할 수가 있네. 지금껏 수많은 이들이 군좌를 거쳐가고 군주들 간에 그만큼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칼데릭은 여전히 건재하듯,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지."
말의 맥락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드워프가 뜬금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군."
그에 신퇴는 뭐라 더 말하려다가 관두는 기색이었다.
"아니네. 쓸데없는 말이 길었군. 혹여 앞으로 다른 군주와 또 갈등이 생긴다면, 저번에 6군주를 죽였던 것처럼 과격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기를 바라겠네. 이미 대군주와 한 약속이 있으니 7군주 그대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의 시선이 문득 내 뒤에 서있는 아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백월족의 핏줄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중립국 회담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전해들은 건지 아셸이 백월족이라는 사실도 아는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셸이 나를 슬쩍 쳐다보고서 대답했다.
"아셸입니다."
"성은?"
"······그론힐트입니다."
신퇴의 눈에 순간 이채가 서린 듯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꺼운 우연이구나. 가브롬 그론힐트라는 이름을 아느냐?"
······가브롬 그론힐트?
나는 어딘가 들어본 것 같은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게임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었던 아셸의 아득한 선조.
현재 그녀가 불완전하게 익히고 있을 백월족의 비전을 창시한 창시조였으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아셸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벌써 수백 년 전의 이야기군. 네 선조의 생전에 나는 그와 작은 연이 있었다. 한번 내기를 했다가 패배해서 검 한 자루를 제작해준 적이 있었지."
"······!"
이어진 신퇴의 말에 아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역시도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기에 조금 놀랐다.
'뭔 소리야, 이게?'
1군주 신퇴와, 백월족의 비전을 창시한 아셸의 선조가 연이 있었다고?
게임에서도 그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나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곧 짚이는 부분이 하나 퍼뜩 떠올랐기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라며 속으로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아셸의 검······.'
게임에서 흑린의 기사로 처음 등장했던 아셸은 지금과 달리 제대로 된 자신의 전용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검신 전체가 완전히 푸른색인 '창섬검'이라 불렸던 명검.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걸 어디서 얻은건지 지금까지 몰랐다. 왜냐면 설정집에서조차 정보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후에 유저 일행에 합류해 동료들이 물어봐도 그녀는 대답을 피하며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검을 제작해준 인물이 바로 신퇴였었던 모양이었다.
대군주성 소속 흑린의 기사에, 선조와의 인연까지 있다면 충분히 아셸에게 무기를 제작해줄 법도 했으니까.
그녀가 흑린의 기사로 있을 때는 이미 자신이 백월족이라는 사실도 당당히 드러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진짜 그런 거였나?'
퍼즐이 딱 맞아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아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말문이 막힌 기색이었다.
뜬금없이 자신의 선조와 연이 있다는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럴 법도 했다.
"네 일족이 당한 참변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하마."
신퇴가 말했다.
"어스힐에서 세인테아의 창성과 결투를 벌여 일방적으로 패배했다고 들었다."
"······예."
"한데 지금 보이는 건 전해들은 것과 다르구나. 충분히 그와 전력으로도 어느 정도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경지로 보이는데, 방심한 것인가, 아니면 그 짧은 사이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인가?"
그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에 아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방금의 말은 신퇴가 스스로 입으로 그녀의 경지가 세인테아의 오성에 거의 근접했다고 인정한 것이었으니까.
'이제 거의 근접하기는 했지.'
물론 레벨이 보이는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아셸의 레벨이 90이고 창성이 91레벨이니, 어느 정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거라 판단한 신퇴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유적의 시련을 통과하기 전에는 정말로 압도적인 차이였기에 그렇게 일방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나는 아셸을 슬쩍 쳐다봤다가 신퇴에게 말했다.
"1군주."
"······?"
"그녀에게 검을 제작해줄 수 있겠나?"
아셸이 깜짝 놀라서 날 돌아보고, 신퇴도 묘한 눈빛을 띠었다.
저번 긴급 소집에서 신퇴는 벨르바고라의 사체에 대한 대가로, 필요한 장비가 있으면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었다.
어차피 나야 장비가 필요할 일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아셸에게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신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네. 7군주 그대 덕분에 저번에 좋은 재료를 얻기도 했으니 갑옷까지 제작해주지. 한데······."
"······?"
"그러면 지금 바로 1군주령에 함께 갈 수 있겠나?"
"······지금 바로? 장비를 제작하는 데 그렇게 시간이 짧게 걸리나?"
"아니, 바로 완성한다는 말이 아니네. 어울리는 무구를 제대로 제작하려면 내 눈으로 직접 살펴봐야 할 것들이 있어서."
그가 그렇게 말하며 아셸을 쳐다봤다.
나도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서 대답했다.
"그럼 그러지."
뭘 본격적으로 만들어주려는 것 같으니 잠시 1군주령에 들르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저, 론 님······."
아셸이 당황하며 날 불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서 띠용이의 등에 올라탄 뒤 말했다.
"어서 타라, 아셸. 1군주령으로 간다."
***
뛰어난 손재주를 지닌 드워프 종족은 보통 대장장이의 종족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현 시대에서 그 정점에 선 인물이 바로 신퇴, 아고르였다.
칼데릭의 군주임과 동시에 누구도 이이를 제기하지 않는 대륙 제일의 명장.
그런 그에게 직접 장비를 제작받을 수 있는 기회는 그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했다.
'1군주령 군주성은 처음 보네.'
1군주와 동행하여 금세 1군주령까지 날아왔다.
나는 신퇴를 뒤따라 성의 입구를 통과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가 아닌 여기서 실제로 1군주성을 본 건 처음이었다.
신비를 찾으며 1군주령을 지나쳤을 때는 수도까지 들르지 않았었으니까.
특이하게도 본성 뒤쪽에 그만큼 거대한 건축물이 하나 더 있었는데, 탑이라기보다도 마치 거대한 굴뚝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저곳이 대장간이라는 사실은 게임에서도 봤기에 알고 있었다.
대장간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커지고 몸에 닿는 열기가 강해졌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이들은 모두 드워프였다.
신퇴의 등장에도 그들은 가볍게 목례만 할 뿐이지 이내 묵묵히 하고 있던 일에 도로 집중했다.
이전에 6군주령의 악티폴에서 봤던 폭왕과는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
신퇴도 그런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대장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어느 넓은 공간에 도착한 뒤, 신퇴가 아셸에게 말했다.
"한번 검술을 펼쳐보거라."
아셸이 허락을 구하듯이 이쪽을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섰다.
스르릉.
검을 뽑아든 그녀가 한 차례 호흡을 하고는, 곧바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빈 허공에 수많은 검격들이 몰아치며 흉흉한 파공음을 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검에 대해 무지한 내가 검술적인 진전에 대해서는 알 방도가 없다.
하지만 저번에 창성과의 결투에서 봤던 것보다 검격이 훨씬 빠르고, 훨씬 강해졌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종족 특질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한참을 아셸의 검무를 지켜보고 있던 신퇴가 입을 뗐다.
"잠시 기다려보거라."
그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이내 몇 자루의 검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크기나 형태가 제각각 조금씩 다른 검들이었다.
"이번엔 이 검들로 검술을 펼쳐봐라."
아셸은 의아한 기색이면서도 순순히 요구대로 그가 가져온 검들로 다시 검술을 펼쳤다.
내가 보기엔 좀 전과 별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신퇴의 눈에는 뭔가 다른 게 보이는지 진지한 기색으로 아셸의 검무를 모두 지켜봤다.
"됐다. 그만하거라."
그렇게 마지막 검까지 끝난 뒤, 신퇴는 나와 아셸을 데리고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대장간 밖으로 나와 본성에 있는 지하로.
지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자 거대한 창고가 하나 나왔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광석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푸른빛을 내는 보석부터 찾았다. 게임에서 봤던 아셸의 창섬검이 푸른빛이었으니.
하지만 앞장서서 걸어가던 신퇴는 자줏빛을 뿜어내고 있는 광석 앞에서 멈춰섰다.
"한번 이 돌에 마력을 주입해보거라."
그 말대로 아셸은 돌에 손을 올리고서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자줏빛의 광석이 환한 빛을 뿜어냈다.
그것을 신중한 눈길로 응시하던 신퇴가 이내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훨씬 적합하구나. 한번 다른 것들도 살펴봐야겠다."
무구 제작에 쓸 재료를 정하는 건가?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기에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무구에 어떤 재료를 사용해야 적합할지 살피고 있는 거네. 무조건 마력에 대한 전도가 높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마력 성질과 얼마나 호응하는지도 중요하니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퇴는 아셸을 데리고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광석들에 하나씩 마력을 주입했고, 나는 약간 지루한 감을 느끼며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
창고 안쪽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