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업
7군주성으로 돌아온 뒤, 군주 회의까지 아주 짧은 시간적 여유가 남았다.
그동안은 얌전히 쉬기로 했다. 다음 계획들을 시작하는 건 일단 회의에 참여한 다음이었으니.
'얘는 그새 또 레벨업했네.'
연무장에서 서로 대련을 벌이고 있는 리프 남매.
나는 리곤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Lv. 29】
저번에 어스힐로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23레벨이었던가?
그사이에 또 6레벨이 올라 30레벨이 되기 직전이었다.
카카카캉!
어지럽게 몰아치는 공격을 막아내던 리프가 그만 결투를 끝내려는 듯 순간 가속했다.
리프의 검이 날카롭게 리곤의 검을 위쪽으로 쳐냈지만, 순간 리곤의 검도 꺾이더니 그녀의 검을 흘려버렸다.
자신의 검을 흘려버리고서 역으로 내리쳐오는 검격에 리프가 깜짝 놀라서 발로 리곤을 차버렸다.
그에 공중에 붕 떠서 튕겨나간 리곤이 바닥을 몇 바퀴는 구르다가 멈췄다.
"아야야······."
기습적인 반격에 순간 힘조절이 되지 않은 모양.
10레벨도 넘게 차이나는 상대를 한순간이나마 전력을 끌어냈다는 것부터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괜찮아?"
리프가 쓰러진 리곤에게 당황하며 다가가는 것으로 대련은 끝났다.
레벨이 오를수록 서서히 성장세가 더뎌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대로면 리곤이 리프의 레벨을 넘는 것도 반 년 내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리프 남매의 얼굴을 보러 마침 성에 찾아온 굴피로에게도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저택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정말로 대단한 여인이더군."
또 저번에 제안했던 대로 알키마스의 공방주도 한번 찾아가서 만나봤다고 했는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제자로 삼을 셈인가?"
"아니오, 제자는 무슨. 그저 간간이 공방에 들려서 이런저런 조언만 해주고 있을 뿐이오."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부터 이미 반쯤 사제지간이나 다름없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성내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했다.
'대군주가 무슨 일을 시키려나······.'
회의에 불참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별 의미는 없는 짓이었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군주에게는 나중에 따로 회의 내용에 대한 전령이 전달된다고 하니 사실 불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단지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다는 패널티가 있을 뿐이지. 그러니 오히려 참석하지 않아봐야 손해였다.
짐작하건대, 이번 회의에서 대군주가 내게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을 확률은 낮았다.
명령권이 있으니 입을 털거나 해서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고.
여러모로 참 꺼림칙했지만, 그에 불만을 가지는 것도 이기적이기는 했기에 그러고 싶진 않았다.
군주 자리가 공짜도 아니고 지금껏 누린 권익들이 있는데, 그만큼 능력을 제공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원해서 앉은 자리도 아니긴 했지만.
처음 빙의한 때로부터 벌써 1년인가?
나도 지금의 처지에 이제 완전히 적응이 된 듯했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조금은 해이하게 풀어진 감도 있었다.
많은 능력들을 얻었고, 더 이상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위협에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보내야 하는 처지도 아니었고.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며, 본래 현실이었던 세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이대로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데······ 라는 마음이 문득문득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심하게 말이야.'
그런 안일함으로 안주하면 끝이다.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미래에 파멸밖에 없다는 거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갈 길이 한참 멀었고, 아직 시작은 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이 흐르고 슬슬 이동할 때가 되었다.
아셸을 대동한 채 띠용이를 타고 빠르게 대군주성으로 향했다.
***
대군주성에는 회의가 시작하기 거의 직전에 딱 맞춰서 도착했다.
회의장에 입장할 수 없는 아셸은 홀에 남겨두고 나는 홀로 회의장으로 향했다.
"······."
복도를 걷는데 우연히 3군주 천궁과 마주쳤다.
그는 어째서인지 복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진열되어있는 석상 중 하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말없이 이쪽을 돌아본 그가 곧 시선을 도로 거두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회의장이 있는 쪽이었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나도 계속 걸어갔다.
방금 뭘 하고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기에 이해하기는 관둔 채로.
그렇게 도착한 회의장 안에는 아직 1군주 신퇴만이 도착해서 앉아있었다.
"어서 오게, 3군주. 그리고 7군주."
나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서 내 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4군주 망자왕이 도착했고, 그 다음으로 육중한 울림과 함께 9군주 거왕이 도착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도착해서 거의 모든 군주들이 모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군주와 참모장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도 회의장에 입장하지 않은 건 2군주와 8군주뿐이었다.
나는 뇌후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부러 참석 안 했나?'
힘을 크게 잃은 마당이니 대군주와 마주하는 건 피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알 바는 아니었기에 이내 신경을 껐다.
"2군주하고 8군주는 불참이고,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대군주가 손뼉을 치고서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의 양상은 이전에 한 번 경험했던 것과 별다를 게 없었다.
차례차례 안건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지고, 대군주는 몇몇 군주들에게 명분에 따라 합당한 일을 맡겼다.
그리고 해당 군주들은 그에 대해 대체로 별 이견 없이 받아들이고 넘어갔다.
대군주가 준비한 안건들이 끝난 뒤에는 몇몇 군주들 또한 개인적인 안건을 꺼내서 추가적인 논의들이 이루어졌다.
나는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대군주가 나한테 뭔 일을 시키려나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있었지만······.
"자, 이번 회의는 이걸로 끝!"
회의는 거기서 끝이었다.
대군주는 끝까지 내게 어떤 일도 맡기지 않은 채로 해산을 알렸다.
'······뭐지?'
나는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번 회의에서는 뭐라도 내게 일을 시킬 줄 알았는데?
뭔지는 몰라도 1년은 더 꽁으로 벌 수 있는 건가 기대가 차오르던 때였다.
순간 대군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향해 눈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아, 7군주는 자리에 남아주겠어? 잠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럼 그렇지.
그에 다른 군주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대군주와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회의에서도 꺼내지 않고 굳이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할 테니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군주들이 모두 떠나고, 회의장에 남은 건 나와 대군주와 참모장뿐이었다.
곧 그녀가 깍지를 낀 손을 무릎에 올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7군주에게도 개인적으로 하나 맡기고 싶은 일이 있어서 말이야. 칼데릭과 관련된 일은 아니고, 세인테아 쪽에."
"······."
"플라베로스 마탑의 마탑주, 안크 가인데라. 7군주도 그를 모르지는 않겠지?"
상당히 뜬금없는 인물이 튀어나왔기에 나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플라베로스 마탑의 마탑주?'
세인테아 최고의 마법사 세력, 마탑.
여기서 마탑은 하나의 탑이 아닌 3개의 탑을 두루 일컫는 명칭이다.
그중에 지금 대군주가 언급한 플라베로스 마탑은 본탑이 아닌 2개의 분탑 쪽에 해당하는 마탑이었다.
3명의 마탑주는 세인테아를 대표하는, 대륙적으로 명망이 자자한 대마법사들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플라베로스의 마탑주라면 특히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쪽에 심어둔 정보원들에게서 근래에 꽤 터무니없는 소식이 들어왔거든. 뭘 것 같아?"
그 말에 설마 싶었다.
대군주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플라베로스의 마탑주, 놈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정보라고 할 만한 거리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플라베로스의 마탑주가 마족에 대한 연구를 비밀리에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마족을 직접 생포해서 말이야."
······역시 그거였나?
그때 참모장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몇 장의 서류. 방금 대군주가 말한 플라베로스 마탑주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마족 연구에 대한 대략적인 정황, 그에 사용된 물적 자원과 희생된 생명의 짐작 규모, 그 밖에 기타 등등, 제법 세세하게.
나는 적힌 내용을 대충 훑어보다가 대군주를 빤히 바라봤다.
지금 중요한 건 그녀가 어째서 이 이야기를 내게 꺼내냐는 것이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내 예상을 꽤나 벗어난 것이었다.
"7군주가 그를 죽여줬으면 해. 물론 큰 소란은 벌이지 말고 조용히."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암살.
그녀의 말은 한마디로 플라베로스의 마탑주를 암살해달라는 것이었으니까.
"어째서?"
나는 의문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정말로 알 수가 없었으니까. 뜬금없이 이런 일을 요구하는 이유를.
말하는 걸 보면 마족에 대한 연구가 트리거라는 건 알겠는데, 그녀가 그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대군주가 대답했다.
"그야 마족이니까. 욕망에 눈이 먼 머저리들이 어중간하게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처리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칼데릭과는 별 관련도 없는 일에 어째서 신경을 쓰는 것인지 묻는 거다."
마족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존재라는 건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피해를 입어도 세인테아가 입을 일에 어째서 그녀가 신경을 기울이느냐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싱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직 횟수가 2번 남았지? 7군주의 능력이라면 별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게임에서도 대군주는 늘 이런 식이었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진의나 속마음이 정확히 나온 적이 없었고, 항상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설마 함정인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뜬금없이 대군주가 왜 날 처리하려고 함정 같은 걸 판단 말인가.
설령 저번 긴급 소집 때문에 이미 날 처리하기로 결심했던 거라고 해도······ 아니,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의 영역인 칼데릭도 아니고 굳이 세인테아까지 보내서, 그곳에 날 죽일 만큼 치명적인 함정을 마련해두었다? 말도 안 되고 가능할 리가 없었으니까.
'암살이라······.'
어쨌든 목적은 알 수 없었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플라베로스의 마탑주는 언젠가 처리해야 하기는 해야 할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대군주의 말대로 놈이 벌이고 있는 만행 때문에 언젠가 큰 참사가 벌어질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나중에 해야 할 일인데, 이왕 시기도 더 앞당기고 대군주에게 남은 명령권도 지우면서 하면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문제는 내 능력으로 플라베로스의 마탑주를, 90레벨에 육박하는 대마법사를 은밀히 처리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였다.
그냥 죽여버리는 거야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쳐도 암살은 또 다른 영역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거절의 선택지는 없었다.
빠르게 머릿속으로 놈에 대한 정보들을 상기한 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대군주에게 다시 물었다.
"기한은 언제까지지?"
"딱히 서두를 필요는 없어. 다음 군주 회의 때까지만 결과를 알려주면 돼."
1년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정도나 여유가 있으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