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볼리사의 유적 (5)
그저 하나의 게임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 라키로니아 대륙.
본래의 현실 세계였던 지구.
내가 지금의 몸,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버린 빙의 현상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현재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큰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선 당연히 지금껏 누구에게도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아무 의미도, 이득도 없는 짓이었으니.
하지만 과연 대현자라면 어떨까?
나는 아주 자그마한 기대를 품고서 처음으로 그에 대해 질문했다.
- 다른 차원의 세상?
"그래,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법칙과, 다른 문명이 존재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너는 그런 이세계의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 있나?"
내 물음에 대현자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 글쎄······ 잘 모르겠군. 다른 차원의 세상이라, 적어도 유의미한 근거가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그에 대해 가진 지식은 없다.
"조금도 아는 게 없다는 건가?"
- 그렇다. 몇몇 머저리들이 내세운 비슷한 가설을 몇 번 들어본 기억은 있지만, 그거야 전부 근거 하나 없는 허무맹랑한 공상의 영역일 뿐이지.
······허무맹랑이라.
역시 아무리 대현자라도 답을 얻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나는 질문을 조금 바꿨다.
"그러면, 혹시 내 존재에 대해 어떤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나?"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건너온 존재이니 그에 대해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지 않을까.
이 역시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물은 것이었지만, 대현자가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대답했다.
- 그러고 보니······.
"······?"
- 음, 그저 기분 탓이라 여겼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알겠군. 네 영혼에서는 무언가 미묘한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 영혼은 내가 생전에 가장 깊게 파고 들었던 학문 중 하나이기에 알 수 있다.
"괴리감?"
- 그래, 혼이 육체와 묘하게 맞물리지 않는 듯한 그런 괴리감 말이다.
맥을 정확히 찌르는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영혼과 육체가 맞물리지 않는다.
그건 생각할 것도 없이 내게 일어난 빙의 현상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 그래서라니? 그저 그런 감각이 느껴진다는 게 전부다. 원인을 묻고 싶은 거라면 그 또한 나는 알 방도가 없다.
순간 조금 흥분했다가 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래, 다른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이거라고 관련된 정보를 더 캐낼 수가 있겠나.
그래도 그나마 얻은 수확이 있다면, 내게 일어난 빙의 현상이 파고들 방법이 아예 없는 미지의 영역은 아니리란 희망이었다.
'육체와 영혼의 괴리감이라······.'
그때 묘한 눈길로 날 쳐다보던 대현자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다.
- 설마 싶지만, 너는······.
파아앗!
그러나 그 순간, 바닥의 마법진이 밝게 빛나며 대현자의 형체가 어그러졌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그녀가 자그마한 탄식을 흘렸다.
- 벌써 시간이 다 된 모양이군. 아쉽지만 대화는 여기까지다, 모험자들이여.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이제 완전히 소멸하는 건가?"
- 그렇다. 애초에 죽은 육신에서 마법으로 영혼만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것이니.
시간이 많다면 좀 더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서서히 사라지는 그녀를 응시했다.
- 이 지팡이를 포함해서 유적에 남은 물건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챙겨가도 상관없다. 그럼······.
이내 그녀의 영혼은 완전히 사라져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나는 빈 허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지팡이에 손을 가져갔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당연히 챙겨갈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바닥에 끝부분이 박힌 걸 뽑아내고 살펴봤다.
'대현자의 지팡이.'
자세한 설명도 해주지 않았지만 게임을 플레이했던 나는 이 마법 아이템에 담긴 능력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마법사이기는 커녕 마력 한 톨도 없는 내게는 쓸모도 없는 물건이긴 했지만.
어쨌든 대현자가 생전에 사용했던 만큼 굉장히 훌륭한 아이템이니, 나중에 누구에게라도 주면 될 것이었다.
리곤이 마법에도 재능이 뛰어나다니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하면 녀석이 쓰게 하든가.
"······."
지팡이를 챙기고 아셸을 돌아봤다.
그녀는 아까부터 조금은 넋을 놓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역시 충격이 큰 것일까, 아니면 대현자가 했던 이야기 때문일까. 어느 쪽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긴······ 당혹스럽기야 하겠지.'
아까 대현자가 했던 이야기는 꽤나 터무니없으면서도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어쨌든 이제 이 세상에 남은 백월족은 아셸 한 명뿐이었고, 그녀의 어깨에 일족의 명운이 걸린 것과 마찬가지가 됐으니까.
내가 그녀 입장이었어도 참 황당하면서 마음의 짐이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었다.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겠지만 그녀 성격에 일족의 맥을 이대로 영영 끊기게 둘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대현자의 조언대로 사랑하는 인간을 찾아 백월족의 피를 이은 자손을 남기면 되는 일이었으니.
"아셸."
이름을 부르자 아셸이 다시금 움찔 놀라며 날 돌아봤다.
"예, 론 님."
······어째 아까부터 반응하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이냐."
이제 그녀가 더 이상 내 곁에 남아있을 이유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살아남은 일족이 없다는 건 확실히 깨닫게 되었으니까.
물론 이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이렇게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안도감이 더 컸다.
이제부터의 선택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고, 이대로 내 곁을 떠나겠다고 해도 말릴 생각 따윈 없었다.
"처음에 네가 내 호위가 되었던 건, 대륙에 네 명성을 알리게 해주겠다는 설득 때문이었지."
조금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구나. 너는 이로써 살아남은 동족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고작 1년 남짓한 시간에 굉장한 성장 또한 이루었다."
"······."
"전에 말했던 대로, 무엇이 됐든 네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대로 내 곁을 떠나도 좋다. 그것이 복수를 위해서든, 혹은 대현자의 말대로 일족의 맥을 잇기 위해서든······."
아셸은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고서 침묵했다.
나는 묵묵히 대답을 기다렸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당연히 나도 마음속으로는 아셸이 떠나가는 걸 바라지 않았다.
90레벨씩이나 되는 무력을 갖췄으면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재가 그녀 말고 이제 또 어디에 있겠는가.
심지어 여기서 더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도 게임을 플레이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만큼 그녀를 존중하기에, 선택을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에 맡기게 하고 싶을 뿐이었지.
한참의 침묵 끝에 아셸이 입을 열었다.
"혹여, 저를 더 곁에 두고 싶지 않으신 거라면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그렇다면 기꺼이 떠나겠습니다."
"······."
"하나 그런 게 아니라면, 정말로 저를 배려해주시는 것뿐이라면······ 송구스럽지만 부족한 능력으로라도 계속 곁에 남아있고 싶습니다."
목소리 끝이 미미하게 떨려나왔다.
긴장을 해야 할 건 나인데, 오히려 그녀가 어떤 말이 돌아올지 몰라 긴장한 기색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유적으로 끌려와 시련에 도전했고, 또 일족의 진실 또한 알게 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듯 내 이상한 행동에 많은 의문이 들 법도 했지만, 그녀는 내게 무엇도 묻지 않고 그렇게 답했다.
'······제법 긴 시간이기는 했지.'
나는 속으로 환희와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생각했다.
혹시 계속해서 남아있겠다고 하는 이유가 내게 느끼는 은혜나 부채감 때문이 아닐지.
실제로 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상황들은 제법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까지 구태여 묻지 않은 건 마지막 남은 작은 이기심이었다.
"내가 너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내 대답에 아셸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염려했지만 그녀는 결국 내 곁을 떠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로써 마음에 걸렸던 일들은 한 번에 모두 해결되었다.
"······단지,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때 아셸이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론 님께서는 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행동하시고 있는 건지, 저의가 궁금합니다."
지금껏 그녀가 내게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던 부분이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참으로 애매한 질문.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대륙의 평화다."
"······."
"왜, 믿기지 않나? 아니면 너무 단순한가?"
물론 스스로도 알았다.
뭔 용사도 아니고, 이게 칼데릭의 군주가 입에 담기에 전혀 어울리는 말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거짓이 섞인 말은 아니었다.
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단 결국 이 세상부터 구하고 봐야 됐으니까.
눈을 깜빡이던 아셸이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뜻이 그러시다면 저도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그래, 나야 고맙지.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일족의 피를 잇는 문제는 어쩔 셈이냐?"
"······예?"
"다행히 인간과도 자손을 남길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봤는지 묻는 것이다."
아셸은 이제 세상에 남은 유일한 백월족이니, 까딱 그녀가 잘못되면 백월족의 맥은 영영 끊기는 것이었다.
그녀가 계속 내 곁에 남아있겠다고 결정한 게 기쁘기는 했지만, 한 종족의 명운이 걸린 문제였기에 솔직히 나도 한편으로는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 음······."
어째서인지 아셸의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슬쩍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고서 대답했다.
"······백월족의 피는 당연히 무슨 일이 있어도 끊기게 두지 않을 것이지만, 아직 좀 더 신중히 사려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피를 잇는다고는 해도 마땅한 상대도 없는 마당에 그녀도 여러모로 심란하기는 할 것이다.
앞으로 함께할 반려를 찾는 일이 서두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혹여 마음에 차는 상대가 생긴다면 얼마든지 말해라. 성심껏 도와줄 터이니."
"······예에."
"그럼 이만 나가지."
이 유적에 볼일은 이제 끝이었다.
나는 그대로 들어왔던 입구로 빠져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혹시나 챙긴 지팡이 말고 또 다른 아이템이 있진 않으려나 생각이 들었기에, 유적을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딱히 별 거 없네.'
하지만 30분 정도 살펴본 끝에 딱히 챙겨갈 물건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뭐 아이템이 아니더라도 마법서라도 있으면 일단 챙겨가긴 했을 텐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유적에 남은 물건들은 얼마든지 챙겨가도 좋다고 선심 쓰는 것처럼 말하더니, 뭐가 있지도 않네. 뭐 유산도 안 남겨뒀나?
어쨌든 그렇게 간단한 탐색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해가 중천에 떠있었는데, 벌써 저문 해가 도로 떠올라서 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잠시 노을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한쪽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다가 날 발견하고서 부스스 일어나는 띠용이의 모습이 보였다.
"가자."
뒤뚱거리며 다가온 녀석의 등에 올라타서 곧장 출발했다.
칼데릭으로 돌아갈 즈음이면 군주 회의가 바로 코앞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