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볼리사의 유적 (4)
정신을 차리고 난 뒤 아셸은 분위기 자체가 조금 변한 느낌이었다. 평소보다도 더 정적으로.
그것이 90레벨에 도달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련 속에서 어떤 심경의 변화를 크게 겪은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쁜 방향으로 나아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조금은 안심했다.
- 둘 모두 환영 속에서 벗어났으니 시련은 끝이다.
안내자가 그렇게 말하며 한쪽으로 이동했다.
막혀서 아무것도 없는 벽이었는데, 녀석이 마력을 일으켜 무언가를 하는 듯하자 곧 변화가 나타났다.
쿠구구.
벽이 갈라지더니 서서히 양옆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와 아셸은 그 안쪽에 드러난 광경을 바라봤다.
짧게 이어진 통로 끝에 마법진이 있었고, 그 가운데 지팡이가 하나 박혀있었다.
언젠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한 번 봤었던 공간.
아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큰 분기점이 될 공간.
기억 속의 그 희미한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조금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 시련에 통과했으니, 말했던 대로 너희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 대가가 뭐인지야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아셸을 한 번 쳐다보고서 안내자의 뒤를 따라서 지팡이를 향해 이동했다.
아셸도 의문이 섞인 기색으로 내 뒤를 따랐다.
- 자, 그럼······.
우리 둘이 지팡이 앞에 서자 안내자가 다시금 마력을 일으켰다. 방금 전보다 훨씬 거대하게.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는 마력이 고요하게 휘몰아치고 마법진이 번쩍였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허공을 쳐다봤다. 안내자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아아아.
거대하게 격동하던 마력이 지팡이로 모두 흡수된 건 한순간이었다.
잠잠해진 주변, 곧 지팡이에서 희미한 형체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안내자와 같은, 하지만 외모는 달리 젊은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반투명한 영체가.
대현자 카볼리사.
고대 마법 황금기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위대한 마법사.
그녀가 몽롱한 눈빛으로 나와 아셸을 한 차례 번갈아 훑어봤다.
- 하아······ 이제서야 통과자가 나온 건가? 세월이 대체 얼마나 흘렀길래 마법이······.
한탄하는 듯한 목소리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울리고, 말이 이어졌다.
- 반갑다, 모험자들아. 난 이 유적을 제작한 마법사인 카볼리사 오빌트라고 한다.
"······."
"왜 아무 대답이 없는 것이냐?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너희도 너희의 소개를 해보거라.
그에 눈만 깜빡이고 있던 나는 짧게 입을 뗐다.
"론이다."
신기하다는 듯 대현자를 바라보고 있던 아셸도 이어서 대답했다.
"아셸입니다."
조금 못마땅한 기색의 대현자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 뭐, 좋다. 나도 바깥에 대해 궁금한 게 많지만 시간이 얼마 없구나. 이곳까지 와서 나를 깨웠다는 건 내가 마련해둔 시련에 무사히 통과했다는 의미겠지.
"그래."
- 그에 대한 대가는 나의 지식이다. 지금 내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마법이 다할 때까지, 약 10분의 시간 동안 어떤 질문에라도 답해주마. 원래는 이보다 훨씬 길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서 마법 술식에 자그마한 오류가 생겼구나. 설마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날 동안 시련에 통과하는 놈이 아무도 없었을 줄이야.
다시 한 번 한탄하듯 말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고대의 마법사들 중에서도 특히나 오래 전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이 유적 역시 그러할 것이다.
- 나는 한때 이 세상의 진리에 가장 통달했던 인간이었다. 만약 마법적인 깨달음을 원한다면 그를 도와줄 것이고, 다른 지식을 갈망한다면 그 또한 내가 아는 선에서 대답해줄 것이다. 무엇이든 물어보도록.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었다.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애초부터 이것을 묻기 위함이었으니.
"백월족에 대해 알고 있나?"
내 물음에 아셸이 흠칫 놀랐다.
대현자가 대답했다.
- 백월족이라, 물론 알고 있지. 마력을 정화시켜 순도를 높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족이 아니더냐. 내 개인적으로도 연을 맺었던 친우도 몇 있었지.
"이 여자가 그 백월족이다."
나는 아셸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현 시대에 백월족은 어떠한 이유로 거의 절멸당하다시피했다."
- ······흐음?
"알고 싶은 건, 현재 대륙에 살아있는 백월족이 이 여자 외에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지의 여부다. 알 수 있겠나?"
대현자가 묘한 눈길로 아셸을 바라봤다.
아셸은 꽤나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대현자라고 해도 신도 아니고, 그런 걸 무슨 수로 알겠나 싶을 테니까.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걸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 꽤 참신한 요구를 하는구나.
"불가능한가?"
- 아니, 불가능하지는 않다. 필요한 조건이 모두 갖춰져있기는 하니.
크게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대현자의 말에 아셸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고 있었다.
대현자가 아셸에게 말했다.
- 네 피가 필요하니 바닥에 몇 방울만 떨어뜨려보거라.
"······예, 예."
아셸이 다급히 칼로 팔에 상처를 내서 피를 흘러내리게 했다.
나는 옆에서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핏물이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 간단히 설명해주마. 지금부터 펼칠 마법은 네 피와 같은 뿌리를 지닌 존재를 탐색하는 마법이다. 한마디로 네 동족을 찾을 수 있는 마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대현자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설명했다.
넋을 놓고 있던 아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로······ 제 동족이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든 찾아내는 게 가능하다는 겁니까?"
- 본래라면 불가능하지. 아무리 방대한 마력을 품고 있다 한들 대륙 전체 범위에 걸친 탐색 같은 게 가능할 리 있나.
"그러면 어떻게······?"
-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신비들 중 하나를 마법과 결합하면 아주 잠깐 동안은 가능하다. 그 부분은 설명해봐야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테니 그냥 그렇게만 알도록.
아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말마따나 그녀에게 중요한 건 마법의 원리 따위가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동족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였으니.
우우웅.
황금빛과 흑색의 기운이 뒤섞여서 아셸이 흘린 핏물에 깃들었다.
하나는 대현자의 마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아마 대현자가 말한 신비이리라.
곧 핏물 바로 위의 허공에 반투명한 구체가 나타났고, 구체 안에서 꿈틀거리던 마력이 화살표를 그렸다.
아셸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고, 나 역시 다른 의미로 조금은 긴장하며 가라앉은 눈으로 결과를 지켜봤다.
솔직히 나도 아주 조금은 혹시나 싶은 마음이 있었다.
게임에서야 아셸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무도 없었다지만, 만에 하나 여기서는 다를 수 있는 거였으니까.
당연히 나 역시도 그 아주 작은 가능성이 존재하기를 마음 깊이 바랐다. 하지만······.
스르륵.
고장난 나침반처럼 사방으로 어지럽게 회전하던 화살표가 도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기대는 배반당했고, 당연한 결과가 나왔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아셸은 대현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흐음······.
작게 고개를 끄덕인 대현자가 말했다.
- 존재하지 않는다.
"······예?"
"이 대륙에 존재하는 백월족은 널 제외하고서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결과가 그렇게 나왔군.
그 말을 들은 아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허공에 떠있는 구체를 멍하니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동족을 찾는 것.
그건 아셸이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었을 것이고,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전부 끝났다.
여기까지 다다르고 나서야 나는 조금 뒤늦은 후회를 했다. 너무 서두른 건 아니었을지.
너무 메인 스토리에 휘둘려 그녀의 현재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아직 감당하기 버거운 고통을 던져준 건 아닐지.
"······."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셸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슬픔도, 부정도, 분노도,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서, 더없이 씁쓸한 눈빛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한편으로는 후련한 감정마저 느껴지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대현자에게 물었다.
"······결과가 틀릴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도 없나?"
"없다. 마법은 완벽하게 펼쳐졌다. 원한다면 다시 펼쳐줄 수야 있지만, 결과가 변할 일은 없을 거다."
대현자가 아셸을 돌아보며 말했다.
- 유감이다, 백월족의 아이야. 네 일족이 어째서 절멸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법을 펼쳐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셸은 대현자가 말해준 진실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차분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기에 나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녀 역시 살아남은 일족의 존재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 해도, 이제는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지고 완전히 확정된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 백월족은 자신 혼자 남았다는 사실이.
어쩌면 시련 과정에서 마음을 확실히 다잡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잘된 건가.'
뭐, 이 정도면 잘 풀린 거겠지.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은 거냐."
아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
"정말로 괜찮습니다, 론 님. 그저 조금 마음이 허할 뿐입니다. 이 대륙의 마지막 백월족이 저라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일족이 맥이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그때 대현자가 끼어들었다.
- 일족의 맥이 이어지지 않는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예? 그야 이제 대륙에 남은 백월족은 저뿐이니까······."
의아한 듯 아셸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 아······ 혹시 몰랐던 건가? 백월족은 인간과 이종 간 생식이 가능한 종족이다.
"······예?"
- 백월족이 인간과 생식하여 자손을 낳으면 절반의 확률로 백월족이 태어난다. 이 세상에 남은 백월족이 너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후손을 남기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거다.
아셸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 그렇게 네가 인간 남성과 생식하여 백월족을 낳고, 네 자식들이 또 다른 인간과 생식하여 백월족을 낳고,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백월족의 핏줄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면······ 뭐, 다시 번성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지라도, 적어도 네 일족의 맥이 끊기는 일은 없겠지. 이해했느냐?
"······."
- 그러니까 인간 남성을 찾아서 혼인한 다음 최대한 많은 자손을 남기거라. 네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그것뿐이다.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아셸이 작게 중얼거렸다.
"······인간 남성."
그리고는 나를 슬쩍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게······ 죄송합니다."
뭔 소리야.
나는 왜 저러나 싶다가 이내 신경을 끄고 대현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나도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대현자."
- 음?
"혹시 다른 차원의 세상에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