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90화 (89/189)

카볼리사의 유적 (3)

알 수 없는 기억들.

혹시나 마법의 강도가 더 세지면 다시금 떠오를까 안내자를 서둘러 재촉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 이, 이미 새겨진 술식을 발동시킨 것뿐이라 강도는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그보다 왜 이리 멀쩡하지······?

아, 젠장.

나는 혀를 차며 머리를 긁었다.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린 기억들은 아주 찰나의 순간들만 드문드문 남아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대체 뭐였지?'

저번에 악티폴에서 경험했던 그 기시감 같은 기억과는 달랐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방금 그건 분명 몸의 본 주인과 관련된 기억들이 맞았을 텐데······.

기억이 여기서 끝나버린 것에 제법 아쉬움이 남았다.

이 몸의 과거를 꼭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빙의한 몸이니 궁금증이 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그나마 남은 흐릿한 기억의 편린들만을 되새기며 생각에 잠겨있다가, 위를 올려다봤다.

- 마법에 오류가 있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순수한 정신력으로 저항했다는 건 더 말이 안 되는······.

"어이."

내 머리 위에서 빙빙 돌며 정신 사납게 굴고 있는 안내자에게 물었다.

"어쨌든 이걸로 시련은 끝인가?"

- ······.

녀석은 못마땅한 듯 정신파로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

- 그래······ 너는 시련에 통과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는 또 처음 보는군.

그렇게 굉장히 간단히 끝나버렸다.

제왕의 혼이 있으니 처음부터 예상한 일이었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시선을 돌려 쓰러진 아셸을 바라봤다.

나는 통과했지만 그녀도 시련을 극복하고서 깨어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었다. 게임에서는 그랬었으니.

'꼬박 한나절은 걸렸었지.'

게임 속에서 그녀가 시련에 도전했을 때는 지금보다도 낮은 레벨이었었다.

레벨이 높다고 시련에 더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는 건 아마 아닐 거라 생각되지만, 어쨌든 조건이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제 남은 건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뿐이다.

나는 아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그녀를 뒤집어 똑바로 뉘인 다음, 도로 구석 벽면으로 이동해서 털썩 등을 기대고서 앉았다.

그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안내자가 내게 물어왔다.

- 정말 특이한 인간이 들어왔군. 시련에 대해서 더 물어볼 건 없는 건가? 네 동료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내 태도가 태연한 게 희한하게 비추는 모양이었다.

녀석으로서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우연히 유적에 들어온 모험자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나는 시련에 통과했으니 네가 말했던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나?"

- 으음, 그래. 하지만 네 동료까지 결과가 나온 다음이다 너 혼자서 이곳을 벗어나면 시련은 무효다.

당연히 내가 아셸만 두고 나 혼자 나갈 리가 없었다.

그보다는 만약 그녀가 시련에 통과하지 못할 경우도 대비해야 되는데······.

"이 공간을 벗어나면 환각 마법의 효과도 풀리는 건가?"

- 그렇지.

"그럼 내가 아직 통과 못한 동료를 억지로 데리고 나가면 규칙 위반인가?

- 물론 위반이다! 일단 시련에 도전하면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그럴 경우에는 내가 직접 제재할 것이야.

안내자가 단호히 소리쳤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녀석의 레벨을 바라봤다.

【Lv. 83】

상당히 높은 레벨.

녀석은 영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단순한 영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러면 눈에 보일 리가 없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 마력이 섞여있었는데······ 아무래도 대현자의 마법이겠지.

힘의 원천이 자연의 기운이 아니라 마력일 뿐이지, 정령 비스무리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아마 싸우면 마법으로 싸우겠지?'

아셸이 시련에 실패하고, 바깥으로 탈출하는 일에 방해받으면 그때는 싸워야 할 것이다.

방어막 같은 걸 펼치면 곤란하니 전투가 벌어지면 기습 공격으로 소멸시키는 게 최선일까.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내자는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심심한데 이야기나 하지."

- 이야기? 흠, 좋다. 말상대 정도야 해주지.

말을 그렇게 하지만 자기가 더 들뜬 기색이었다.

아까 처음에 반응도 그렇고, 여기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박혀있었을 테니 뭐.

어쨌든 이렇게 조금이라도 친해져서 방심을 쌓아두면 나중에 필요할 때 기습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었다.

물론 대화할 상대가 녀석밖에 없으니 정말로 심심해서 말을 거는 것도 있었지만.

- 마지막 도전자는 체감 상으로 100년도 넘게 전에 찾아왔었지. 총 5명이었는데 그들은 무력의 시련에 도전해서 전멸했다.

- 지금 시대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위대하신 카볼리사 님께서는 당대에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셨던 마법사······.

······하지만 녀석의 어마무시한 수다량에 금세 질려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고대 시대에 대한 정보나 좀 캐볼까 해도 그닥 쓸모있는 정보도 없었고.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챙겨왔던 식량을 조금씩 먹으며 아셸의 상태를 살폈다.

지금쯤 그녀가 환상 속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을지는 잘 알았다.

괴롭고 고통스럽겠지만 결국 성장을 위해서는 전부 마주하고 극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

폭풍우와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밤.

억센 빗줄기를 뚫고 산길을 달리는 한 여인이 있었다.

아셸은 손에 잡고 있는 동생의 손을 꽉 붙잡고서 검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덤벼오는 괴한들을 베어넘겼다.

그 처절한 도주 속에 다다르는 종착지는 언제나 똑같았다.

벼랑 끝에 다다라서야 발을 멈춘 아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폭우에 잔뜩 불어난 강물을 내려다보다가, 뒤를 돌아봤다.

창을 든 괴인 하나가 이쪽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으아아아!"

이게 대체 몇 번째인가.

아셸은 괴성을 내지르며 놈을 향해서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일 뿐이었다.

투욱.

언제나처럼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자신을 절벽 아래로 밀어낸 동생의 씁쓸한 미소만이 또다시 마지막으로 비출 뿐이었다.

첨벙!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아셸은 더 이상 허우적거릴 힘조차 없었다.

몇 번, 몇십 번, 몇백 번이고 반복되는 이 상황에 그녀는 의문을 느끼지 못했다. 덧없는 꿈처럼, 끔찍한 악몽처럼.

그저 끔찍한 괴로움에 서서히 무너져가는 마음만을 느끼며 다시금 학살의 현장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도망쳐라, 아셸! 뒤돌아보지 말고!"

아버지가 죽은 어머니를 품에 안은 채 울부짖었다.

아셸은 또다시 동생을 데리고 도망쳤다.

또다시 괴한들의 손에 학살당하는 일족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쳐, 또다시 벼랑 끝에 내몰렸다.

또다시 절벽 아래로 홀로 떨어진다. 또다시 서늘한 창날이 동생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또다시, 또다시, 또다시.

"······."

아셸은 어느 순간에서야 이것이 전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7군주와 함께 어떤 유적을 찾았고······ 영문도 모른 채 시련이라는 것에 도전했다는 것을, 현실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게 바로 그 시련일까?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시련이란 말인가.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어차피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심지어 이 환상 속에서조차 자신은 무엇 하나 못 바꾸고 있었다.

"으······."

그 사실이 너무 비참해서, 아셸은 눈물을 쏟아냈다.

무정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걸어오는 창성이 보였다.

손을 붙잡고 있는 동생이 당황하며 오열하는 그녀를 돌아봤다.

"언니, 왜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그래,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

현실로 돌아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복수밖에 없겠지. 죽은 가족도, 죽은 일족도 살아돌아오지 않겠지.

세상에 남은 건 정말로 나 혼자뿐일 수도 있겠지.

'무엇이 됐든 네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끝내 마음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몰리고 나서야, 아셸은 비로소 모든 걸 인정할 수 있었다. 모든 걸 확실히 할 수 있었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지만 더 이상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터억.

아셸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동생의 손을 붙잡았다.

그 팔을 잡아당겨 품에 꼭 안았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가."

당황하며 품을 벗어나려고 하던 동생의 발버둥이 뚝 멈추었다.

아셸은 한참이나 더 그녀를 안고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뗐다.

동생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전보다는 조금 덜 슬프게, 그리고 조금은 덜 씁쓸하게.

스르륵.

동생의 몸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아셸은 얼굴에 뒤섞인 눈물과 빗물을 닦아내고서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 우두커니 창성이 서있었다.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절벽에서, 아무것도 없는 끝없는 어둠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아셸은 그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5번의 합이 오가고, 바로 그 다음 순간 아셸의 목이 창날에 날아갔다.

어둠이 몰아치고 시간이 역행한다.

순식간에 죽어버린 아셸은 다시금 멀쩡한 상태로 창성과 마주 보고 섰다.

그녀는 또다시 덤벼들었고, 이번에는 세 합조차 버티지 못하고 심장이 꿰뚫렸다.

"커흑······!"

강하다.

이전에 어스힐의 연회에서 싸웠던 것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무위.

그녀 역시 그날의 결투를 기점으로 한 차례 크게 성장했지만, 여전히 격차는 아득했다.

이것이 바로 창성의 전력이고, 놈과 자신 사이의 진실된 간격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환상, 자신의 기억 속일 뿐일진데, 놈의 존재는 대체 무엇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거란 말인가? 무의식? 상상?

자그마한 의문이 일었지만 무엇이 됐든 아무래도 좋았다.

아셸은 무감정한 눈으로 눈앞의 창성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또다시 덤벼들었다.

수십 번의 결투, 그리고 족히 수백 번의 합이 오갔다.

아셸 역시 그만큼이나 죽고 부활하기를 반복했다.

어차피 죽어도 끝이 아닌 이 환상 속에서 목숨을 거리낄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점점 적응했다. 투지와 감정을 최소한으로 가라앉히고 차분히 관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싸우면서도, 마치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둘 사이의 전투를 살폈다.

움직임 하나하나를 뜯어살피고, 머릿속에 각인했다. 필요하다면 다시 덤벼들어 동작을 재현했다.

그 끝없는 반복 속에서 마침내 하나씩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벽을 허물었다.

파악!

3056번째 죽음.

아셸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가 다시금 재생했다.

놀랍게도 창성의 팔에도 희미한 핏자국이 있었다. 그녀의 검이 스친 상처였다.

'부족해, 아직······.'

얼마나 놈과 가까워져야, 어느 경지까지 도달해야 이 시련이 끝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셸은 아직 끝이 가까워지지 않았기를 바랐다.

비록 이 환상 속에서라도 놈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검을 휘두를 수 있기를.

***

반나절 정도가 흐르고 처음으로 아셸에게서 변화가 나타났다.

그녀는 여전히 죽은 듯 누워있었지만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이 말이다.

【Lv. 86】

1레벨이 올랐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레벨이 올랐다는 건 그녀가 환영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무사히 시련을 헤쳐나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그녀의 레벨은 1레벨이 더 올라 87레벨이 되었다.

비정상적인 속도였으나, 거기서 멈춘 다음 또 한참 동안이나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나절 정도가 더 흘렀을까.

"······?"

멍하니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미동도 없던 아셸의 몸이 미약하게 움찔거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Lv. 90】

······87에서 한 번에 도약해, 마침내 80의 벽을 깨고 90에 다다라있는 레벨이 보였다.

게임에서도 그녀가 시련을 극복하고 도달했던 것과 동일한 레벨이.

- 오호······.

안내자의 나지막한 감탄사가 울렸다.

이내 천천히 아셸의 두 눈이 뜨였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차분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할 말을 정해둔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물었다.

"전부 극복했느냐?"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슬픔과 기쁨, 공허함과 성취감, 그리고 미련과 후련함.

온갖 상반된 감정들이 뒤섞인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것 같습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