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89화 (88/189)

카볼리사의 유적 (2)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날이 잔뜩 선 뇌후의 목소리.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마전석씩이나 되는 귀물을 내놓으라니, 내가 생각해도 뻔뻔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어쨌든 반응을 보니 가지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전에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계속 이딴 식으로 날 이용하려 들면······."

"다음 부탁을 확실히 마지막으로 하지."

실랑이를 해봤자 힘들 것 같았기에 나는 깔끔하게 잘라서 말했다.

뇌후가 움찔 놀랐다.

"······다음 부탁을 마지막으로 하겠다고요?"

"그래. 이번에 마전석을 주면 확실히 다음 부탁을 끝으로 약속했던 정령의 위치를 알려주겠다."

나는 슬쩍 그녀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을 바라봤다.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90이었다.

내가 소멸시켰던 천둥의 대정령 라크시아와 맞먹을 정도의 강력한 정령이 있는 장소.

그게 미끼로 걸려있는 이상에야 어차피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던 뇌후가 말했다.

"마전석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알고나 있는 건가요? 솔직히······."

"간을 볼 생각이면 그냥 다른 군주를 찾아가지."

나는 밑밥을 까려는 걸 바로 차단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부탁으로 그냥 퉁쳐버리는 건 안 되지.

내 말에 그녀가 다시금 인상을 팍 찌푸리며 관두었다.

"마전석은 어디에 쓰려고 구하는 거죠?"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진 않죠. 약속이나 제대로 지키세요, 7군주. 당신은 다음 부탁을 마지막으로 반드시 정보를 내게 줘야만 해요."

"물론이다."

간절한 뇌후와 달리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굉장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기다리세요."

아무래도 직접 가져오려는 모양인지 그녀는 방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여유롭게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만약 정령을 얻게 되면 또 나랑 완전히 척을 지려고 하려나.'

그녀가 어떤 태도를 보이든 웬만해서 약속을 안 지킬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한 번 그렇게 당했었으니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또 나한테 함부로 덤비지는 않을 테니까.

곧 다시 방으로 돌아온 뇌후의 손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마전석, 그것은 희미한 푸른빛을 띄는 보통의 마석과 다르게 완전히 투명한 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건네주는 것을 받아들고 살펴봤다.

"고맙다. 그럼 이만 가보지."

그렇게 마전석을 얻은 나는 곧바로 2군주성을 나왔다.

밤이 깊었지만 뇌후의 성에서 머무르는 건 나도 안 내키고 그녀도 그럴 것이기에, 그냥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

게임에서는 수많은 유적과 던전들이 존재했다.

그중에는 메인 스토리와 관련이 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물론 있는 것들도 존재했다.

카볼리사의 유적.

고대의 한 시기에 대현자라 칭송받았던 어느 위대한 마법사가 남긴 유적.

지금 아셸과 함께 찾아가고 있는 장소 역시 게임에선 메인 스토리와 관련이 있던 유적이었다.

아셸이 살아남은 일족이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되고, 스스로의 마음을 확실히 정하는 에피소드였으니까.

크오오오!

아까부터 계속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꺾기만 하자 답답한지 띠용이가 포효를 내질렀다.

나는 녀석의 목을 두드려 진정시키며 열심히 아래를 살폈다.

현재 위치한 곳은 세인테아의 서쪽으로 있는 광활한 고원.

카볼리사의 유적은 메인 스토리의 일부로 거쳤던 장소인 만큼 장소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푹 파인 구덩이 같은 지형이었는데······.'

작지 않고 상당히 큰 지형이었으니 발견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곧 발견할 수 있었다.

벌판 한가운데, 마치 완만한 화산의 분화구처럼 불쑥 튀어나왔다가 들어가있는 지형을.

"내려가자."

띠용이를 그 구덩이의 한가운데에 착지시키고 등에서 내렸다.

위에서 보니 좀 작게 보였던 거지, 아래로 내려오니 시야가 완전히 막힐 정도로 돌출된 면이 높았다.

'어디 보자······.'

초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린 채 주위를 둘러보며 유적의 입구를 찾았다.

오래 살필 것도 없었다. 이내 저멀리 거대한 마력의 기운과 함께 찾던 것이 시야에 들어왔으니까.

조금은 어색한 느낌으로 경사면에 박혀있는 바위가.

'저거다.'

나와 아셸은 그 바위로 가까이 다가갔다.

길고 넓적해서 마치 석문을 연상케 하는 바위였는데, 그 중앙에는 3개의 주먹만 한 마석이 삼각형 형태로 박혀있었다.

2개는 은은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지만 하나는 반쪽이 깨져서 투명한 빛만을 띄고 있다.

나는 그 반쯤 깨진 마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슬쩍 힘을 줘봤다.

'음.'

꼼짝도 안 하네.

반은 깨져서 없는데도 마석은 석문에 단단히 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떼고 아셸에게 말했다.

"이걸 흠에서 빼봐라."

"······아, 예."

그녀도 바위와 그 안쪽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마력을 느꼈는지 거기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내 말에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깨진 마석을 손쉽게 흠에서 쑥 빼냈다.

의아한 기색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를 다시 뒤로 물리고, 나는 챙겨왔던 마전석을 흠에 박아넣었다.

크기가 맞지 않았지만 마전석은 흠에 닿자마자 자석처럼 착 붙었는데, 곧 바위에서 느껴지던 마력이 화악 끓어오르듯 격동하더니 마전석마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진동하는 바위에서 물러난 다음 아셸에게 말했다.

"바위에 마력을 주입해봐라."

아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위에 손을 대고서 마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의 푸른 마력과 황금빛의 마력이 뒤섞이더니, 바위가 쩍 갈라져서 양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게임의 스토리에서도 이곳은 망가져버린 하나의 마전석 때문에 처음 발견했을 때는 입장에 실패했던 유적이었다.

어지간한 유적이라면 그냥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그런 어지간한 유적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이윽고 안쪽의 통로가 드러났다. 천장에 발광석이 촘촘히 박혀있어서 어둡지는 않았다.

"가자."

내 말에 얼떨떨한 얼굴로 통로 안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셸이 조금 놀란 듯 돌아봤다.

지금껏 신비를 찾을 때 이런 장소를 발견하면 항상 바깥에 두고 혼자서만 들어갔어서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이곳은 오로지 아셸을 위해서 찾아온 유적이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긴 했지만.

내가 먼저 걸음을 옮기고, 아셸은 언제나처럼 무엇도 묻지 않고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다.

'넓네.'

피부에 닿는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넓은 통로를 걸었다.

그리고 금세 다다른 건 바닥에 마법진이 새겨진 훨씬 더 넓은 공간이었다.

대군주성에서 봤던 지하의 풍경처럼 사방에 마석들과, 마력으로 이어진 선, 그 중앙의 마법진.

나와 아셸은 마법진 위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허공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정령, 그러니까 영체와 같은.

저것의 정체가 뭔지 알고 있는 나는 얌전히 기다렸다.

유적의 가디언이라기보다는 안내자라고 해야 할까.

녀석은 이 유적의 주인이 제작한, 유적에 마련된 시련의 안내를 맡고 있는 존재였다.

이내 녀석이 제대로 형상을 갖추더니 늙은 노인의 외모로 변했다.

- ······이게 얼마만이야! 드디어 사람이 찾아왔구만!

굉장히 들뜬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녀석이 씨익 웃으며 나와 놀란 기색의 아셸을 번갈아 보고는 말을 이었다.

- 환영한다, 모험자들아! 이곳은 위대하신 대현자 카볼리사 님께서 후인들을 위해 안배하신 장소다. 그리고 이 장소를 찾아낸 너희들은 시련에 도전할 자격이 있다. 마련된 시련은 총 2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시련을 통과한다면 그 끝에는 합당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녀석의 말대로 공간 한쪽에 위치해있는 2개의 입구를 바라봤다.

아셸이 한 박자 늦게 날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 왼쪽 입구는 무력을, 오른쪽 입구는 정신력을 시험하는 시련이다. 만약 시련에 실패하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니 신중이 선택하도록. 시련에 도전하지 않겠다면 지금 당장 유적에서 나가면 된다.

나는 오른쪽 입구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신력의 시련.

이건 도전자가 가지고 있는 고통스런 기억들을 끄집어내 정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그 번뇌와 괴로움을 극복해야만 하는 시련이었다.

예전에 마경에서 아셸이 몬스터에게 당했던 환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보다도 정도가 훨씬 더할 것이라는 것.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련이었기에, 아셸 스스로가 의지를 확고히 한다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 게임에서도 그랬으니.

'실패하면 목숨을 잃는다.'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크긴 했지만, 그에 대해선 믿는 것이 있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제왕의 혼이 있는 내게는 시련이고 뭐고 정신 공격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여차하는 상황에는 아셸을 챙겨서 그냥 탈출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 유적에 또 어떤 위험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을지는 모른다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겠지.

"오른쪽 입구로 들어간다, 아셸."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오른쪽 입구로 걸어갔다.

아셸은 뜬금없이 뭔 시련인가 당황한 기색으로 뒤를 따라왔고, 안내자도 둥둥 떠서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입구 안쪽에는 또 다른 마법진이 방 전체를 뒤덮고 새겨져있었는데 느껴지는 마력이 훨씬 거대했다.

- 너희는 정신력의 시련을 선택했다. 그럼 바로 시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그때 안내자가 마력을 일으키더니, 그에 반응한 마법진이 환한 빛을 뿜어냈다.

"······!"

그와 동시에 몸을 비틀거리던 아셸이 곧바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발동된 마법에 의식이 날아간 것이었다.

반대로 나는 여전히 멀쩡히 서있었다.

다만, 머릿속에서 해일처럼 몰아닥치고 있는 과거의 기억들을 느끼며.

'오······.'

대충 이런 식이구나.

지금껏 살아오며 겪은 모든 괴로운 기억들이 선명하게 스쳐간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을 극한까지 증폭시킨다.

하지만 썩 평탄하게 살아왔던 내 겜창 삶에 별다른 난항이 없었던 건 둘째치고, 역시 제왕의 혼 때문에 정신에 영향은 없었다.

그저 신기함만을 느끼며 스쳐가는 기억들이 끝나가는 걸 느끼고 있는데, 다음으로 이어진 건 알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

······뭐지, 이건?

내가 어둡기 그지없는 피를 흘리며 죽어라 도망치고 있었다. 어떤 추적자들에게 쫓겨서.

불타는 마을, 절규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멍하니 서있는 나······.

알 수 없는 기억들에 혼란을 느끼던 나는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내가 빙의하기 전이 아니라, 진짜 이 몸의 본 주인의 기억이다.

불규칙적이고 엉망으로 얽힌 기억의 파편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도로 가라앉는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지나간 기억들을 되새겼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지나가버린 기억들은 금세 꿈처럼 흐릿해져서 떠오르지 않았다.

- 호, 제법 버티는데?

안내자가 우두커니 서있는 날 보며 끌끌 웃었다.

- 하지만 계속 그렇게 억지로 버티고 있다간 미쳐버릴 것이다. 어서 네 동료처럼 정신을 잃어라. 이건 본래 맨정신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극복하도록 마련된 시련······.

"이봐."

나는 녀석의 말을 끊고 말했다.

"지금 걸고 있는 환각 마법, 훨씬 더 강도를 높여서 걸어줄 수는 없나?"

- ······응?

"기억이 다 지나가서 안 떠오르잖아.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녀석이 당황한 기색으로 미친놈 보듯 날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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