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볼리사의 유적 (1)
새벽녘 동이 트기 시작할 즈음.
나는 옆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말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벌써 정신을 차렸나?'
그렇지 않아도 잠이 영 오지를 않아서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는데, 아셸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뭔 바람인지는 몰라도 뜬금없이 어스힐 측의 왕녀가 직접 자리를 지켜주겠다 하길래 알아서 하라고 했었는데······.
- 그러니까, 연무장에서 쓰러진 경을 이렇게 번쩍 품에 안아드신 다음에······.
- 네, 네?
······뭔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왕녀가 저런 성격이었나 생각하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바로 옆에 위치한 아셸의 방 앞으로 다가가서 노크를 했다.
"아셸."
안쪽에서 잠시 소란이 일더니 곧바로 시녀가 방문을 열어주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아셸과 옆에 앉아있는 왕녀의 모습이 보였다. 둘 모두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 7군주님, 경께서 방금 막 정신을 차리셔서······."
나는 아셸을 쳐다보며 물었다.
"몸은 괜찮나?"
외상이야 포션으로 치료했고, 초감각으로 살피니 마력도 얼추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며 묻자 아셸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내 시선을 피하며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는 듯하더니, 결국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서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축 잠긴 목소리로 다짜고짜 사과부터 건네는 그녀였다.
솔직히 이번엔 그녀의 잘못이 명백히 있었기에 나도 별 대꾸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일을 벌인 심정이야 백분 이해했지만.
"저,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왕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태를 봐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군주님. 별말씀을요."
꾸벅 인사를 한 왕녀가 이내 시녀들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
잠시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단지 그녀의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었고, 괜찮다는 걸 확인했으니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할까. 일단은 레벨업했으니 성장을 축하한다고 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자니, 우물쭈물거리고 있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고 먼저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론 님."
아니나 다를까 또 사과였다.
나도 이번엔 작게 혀를 차며 대답했다.
"계속 사과만 할 참이냐?"
"······."
"이번 일에 네 잘못이 명백한 건 맞지만, 그에 대해서 딱히 꾸짖고 싶진 않으니 그만 말해라."
"하지만 너무 큰 폐를 끼쳤습니다. 론 님께선 저 때문에 맹세까지 어기시고······."
······맹세?
나는 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다가, 이내 뭔 말인지 깨달았다.
결투가 성사되기 전에 내가 그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창성과 약속했던 걸 말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죄스러워 보였기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하긴, 이 세계에서는 약속과 맹세라는 게 명예와 관련되어 조금은 신성시되는 관념이 있기는 했다.
특히나 칼데릭의 군주씩이나 되는 거물이라면야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녀는 아마 내가 맹세를 어겨서 굉장한 모욕을 감수했다고 생각하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딱히 아무렇지도 않은데.'
물론 난 모욕감이나 수치심 따윈 조금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자랑할 건 아니었지만.
애초부터 지킬 생각이 없던 약속을 어겼다고 거기에 쪽팔림을 느낄 리가 있나?
단지 문제라면 군주로서의 위신과 신뢰가 떨어질 염려인데······뭐, 이번 한 번 감수하면 될 일이었다.
세인테아 쪽이야 중요한 건 용사 하나뿐인데 황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이유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창성 그놈은 그런 식으로 대놓고 무시해서 엿 먹이고자 했던 마음도 있었다. 워낙에 개같은 놈이었으니.
나는 아셸을 빤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네 목숨은 내 명예보다 가볍지 않다."
그 말에 그녀가 움찔 놀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째 서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았기에 나는 속으로 당황하며 화제를 돌렸다.
"이번 결투에서 또다시 성장한 것 같더구나. 저번보다도 훨씬."
"······예, 그렇습니다."
아셸이 조금 목메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며 할 말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네 일족을 학살한 배후, 그 가장 뒤에는 황제가 있다."
아셸은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봤던 창성 외에 정확한 배후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대충 짐작은 했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황제와 관련이 없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에 대해 증오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었지.
내가 그 사실을 정확히 짚어주자 아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거기에 어떻게 그걸 알고 확신하냐는 등의 의구심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이제 그녀가 그만큼이나 날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황제는 오로지 인간 종족의 번영만을 생각하는 광인이다. 그가 너희 백월족을 학살한 이유는 오로지 그것과 관련이 있다."
"······."
"그러니 세인테아에 대한 네 복수심은 더없이 합당하고 정당하다. 그것만은 내가 확실히 보증해주마. 네 망설임의 이유에 그것 또한 껴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아닙니다, 저는."
아셸이 고통스러운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저 두려울 뿐입니다. 만일 살아남은 일족이 하나라도 있다면, 제가 반드시 찾아내야만 하니까······ 복수에 눈이 멀어 그를 남겨두고서 혼자 죽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역시 그런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내 일을 우선시할지, 아니면 아셸의 선택을 존중하여 우선시할지.
그것은 전부터 계속해서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신비들을 얻기 전까지야 그녀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솔직히 이제는 그런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녀와 나의 관계는 나의 기만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살아남은 일족이 없다는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빌미 삼아 그녀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으니.
그녀와의 관계가 지금보다도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에 대한 죄책감은 더욱 커질 것이었다.
지금껏 충분히 많은 신세를 졌다.
그녀가 없었다면 검 하나 휘두르지 못하는 연약한 몸으로 대륙을 돌아다니며 신비들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고민 끝에 확실히 결정했다.
"무엇이 됐든 네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셸이 얼떨떨한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아셸을 그 장소로 데려가야겠다.
***
일단 그 장소는 다른 유적, 던전들과 다르게 입장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 있었다.
바로 고대의 마전석.
마전석은 보통 마법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 쓰이는 마석과는 다른 것이었다.
마석의 한계는 아무리 순도가 높더라도 그 술식의 장기간 저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있다.
전에 대군주성에서 봤던 참모장의 텔레포트 장소도 그래서 항상 다른 마법사들이 그곳에 상주하고 있는 것이었고.
하지만 고대 마법의 황금기에 마법사들이 제작하고 사용한 마전석은 마법 술식의 초장기간 저장이 가능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유적이나 던전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더 이상 대륙에 남아있는 마전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면 기술의 실전도 있지만, 더 이상 마전석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자연적으로 거의 생성되지 않는다는 설정이었으니까.
또 마전석에는 한 번 술식을 새기면 다른 술식을 새기는 건 불가능했기에 유적에 남아있는 것을 채굴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남아있는 순수 마전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 기억으로는 대군주도 가지고 있는 마전석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나는 곧바로 그녀를 찾아가지 않고 우선 어스힐의 국왕부터 찾았다.
"마전석······ 아쉽게도 저희 왕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7군주."
"그런가."
어스힐의 국왕이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나는 순순히 납득했다.
애초에 마전석은 단순히 돈 따위로 그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굉장한 귀물이었으니.
미련을 버리고 다음으로 곧바로 대군주를 찾아갔다.
"주먹만 한 크기 정도의 마전석이 하나 필요하다고?"
대군주가 내 말에 흐응, 콧소리를 흘렸다.
"가지고 있는 게 있기는 한데, 설마 그걸 공짜로 달라고 하는 건 아닐 테고."
"원하는 게 뭐지?"
"글쎄······ 7군주가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할 횟수가 2번 남았지? 그걸 다시 하나 더 늘리겠다면 얼마든지 줄게."
그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순순히 받을 수는 없나.
하지만 그렇다고 대군주의 명령권을 한 번 더 늘리는 건 내키지 않았다.
"마전석을 가지고 있는 다른 군주는 누가 있나?"
대군주가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1군주, 2군주, 4군주, 그리고 8군주. 그 외에 다른 군주들은 나도 잘 몰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
"그보다 그렇게 매정하게 나오니 좀 슬픈데, 7군주? 내 부탁을 들어주기가 그렇게 싫어?"
나는 그녀의 능청스러운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일단 8군주는 제외하고.'
다행히 나머지 군주들은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었다.
1군주나 4군주는 내게 진 빚이 있었고, 2군주는 약점을 잡고 있는 게 있었으니까.
나는 누구를 찾아갈까 고민하다가 이내 정했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1군주나 4군주를 찾아가서 빚을 퉁치고 마전석을 받는 것보다는, 2군주를 찾아가는 게 당연히 훨씬 이득이었다.
왜냐면 그녀는 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서 깔끔히 빚을 청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정보에 상응할 만큼의 도움이라는 말로 애매모호한 약속을 했었으니 말이다.
아마 말만 잘하면 이번에도 공짜로 챙길 수 있으려나.
오전이 되고, 슬슬 왕성에서 떠날 준비를 했다.
마땅한 우리가 없어서 띠용이는 왕성 한편의 넓은 공간에 두고 있었는데, 날 보자 신나서 파닥거리며 엉겨왔다.
"저희 어스힐 왕국을 도와주신 것,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살펴가십시오."
어스힐 국왕과 테이르, 그리고 왕녀와 1왕자의 배웅을 받으며 띠용이의 위에 올라탔다.
나는 마지막으로 테이르와 한 번 눈을 마주쳤다.
전쟁은 막았으니 더 이상 어스힐에 큰 암운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보니 아직 왕가의 갈등까지 풀린 건 아닐 터였다.
테이르도 언젠간 혈육들과 진심을 터놓고 오해를 화해하기를 바라며, 도로 시선을 돌렸다.
"가자."
띠용이를 툭툭 두드리자 녀석이 우렁찬 포효와 함께 날아올랐다.
***
올 때는 대군주와 함께였지만 돌아갈 때는 따로였다.
대군주는 대군주령으로 향했고 나는 2군주령으로 향했다.
와이번의 속도가 워낙 어마무시했기에 띠용이를 얻고 난 뒤 확실히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기기는 했다.
예전이었으면 다음 군주 회의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이럴 여유도 없었겠지.
그렇게 어스힐에서부터 2군주령의 수도까지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곧바로 군주성에 방문하여 2군주 뇌후와 만난 나는 용건부터 꺼냈다.
"······마전석이 필요하다고요?"
"그래, 대략 주먹막 한 크기의."
"그걸 지금 나한테 달라고 한밤중에 난데없이 찾아온 거고요."
"그렇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뇌후에게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기가 막힌 기색으로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