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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87화 (86/189)

중립국 회담 (7)

창성 퀘이덴은 맞은편에 선 아셸을 바라보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순간의 방심으로 놓쳤던 백월족 하나.

그 자그마한 실책은 지금까지도 살에 박힌 잔가시처럼 그를 쭉 거슬리게 해왔던 기억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더없이 기꺼웠다. 정말로 우연하게 찾아온 기회.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죽여 없애 완전한 매듭을 지으리라.

창성은 손에 쥔 창을 가볍게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선공은 양보하겠다."

"······."

아셸의 전신이 다시금 새하얗게 물들었다.

뿜어내는 기세는 여전히 흉흉하기 그지없었지만, 아까 전과 다르게 그녀는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세인테아의 창성.

기억 속, 10년 전 산맥에서 일족을 학살했던 그의 무위는 그야말로 괴물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강했던 일족의 전사들조차 몇 합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하고 모조리 쓸려나갔었으니까.

그럼에도 아셸은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지난 10년의 시간 동안 몇 번이나 벽을 넘고 부수며 강해지지 않았는가.

놈과의 격차가 얼마나 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만큼은 그저 스스로를 믿고서 투지를 끌어올렸다.

스으으.

특질 능력으로 극한까지 정화된 마력이 더욱 가속하며 아셸의 전신을 순환했다.

간을 볼 이유 따위가 없는 상대였다. 아셸은 처음부터 전력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검이 순백의 광채로 물들고, 전신에도 새하얀 마력 고리가 흐릿하게 생겨났다.

창성은 태연하게 서서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무엇을 하든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다는 듯. 그의 창에도 푸른 기운이 빚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셸의 신형이 섬전처럼 창성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맞물린 검날과 창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가볍게 공격을 막아낸 창성이 창대를 빙글 돌려 위로 처올렸다. 아셸은 고개를 젖혔다.

곧바로 꺾여서 목을 노리고 휘둘러오는 공격마저 회피한 그녀는 다시 검을 내질렀다. 하단을 노린 일격. 창성은 또다시 창을 빙글 돌려 간단히 막아버렸다.

본격적인 접전이 이어졌다.

검과 창이 쉬지 않고 맞부딪히고, 때때로는 빈 허공을 갈랐다. 흰 선과 푸른 선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얽혀들었다.

한 번 한 번의 충돌에 강대한 충격파가 일고,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베여버릴 듯한 예기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몰아쳤다.

관전자들 중 경지가 높지 않은 이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조금도 눈으로 쫓지 못했다.

그저 사방으로 퍼져오는 마력 충돌과 충격파에 창백하게 질려 경계선에서 더욱 멀찍이 물러설 뿐.

공방의 흐름은 아셸이 공격하고 창성이 방어를 하는 쪽으로 흘렀다.

창성도 간간이 반격을 날리긴 했지만 대체로 아셸이 그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한 것보다는!'

아셸의 마음에 미약한 쾌락이 솟아올랐다.

창성은 분명히 강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은 압도적이지 않았다. 그의 방어에 서서히 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셸은 퍼붓는 공세에 더욱 한계까지 힘과 속도를 붙였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파고들면 된다. 그러면 정말로 놈의 목에 검격이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

시간이 흐를수록, 합이 늘어날수록 아셸의 안색이 천천히 굳었다.

서서히 이질감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간격이 어느 지점에서 전혀 좁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마치 애초부터 닿을 수 없었을 신기루처럼.

카앙!

검날과 창날이 맞물리고, 찰나간 공방이 멈추었다.

아셸은 창성과 눈을 마주쳤다. 놈의 눈빛은 결투를 시작할 때와 변함없이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이제야 알았나?'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셸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놈의 손아귀 위에서 놀며 농락당하고 있었다는 걸.

세인테아의 오성, 창성과의 격차는 생각보다도 훨씬 작았던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상상 이상으로 아득한 것이었음을.

슈와악!

뒤로 물러서려는 아셸에게 가공할 속도로 일격이 쏘아졌다. 이제까지와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아셸의 뺨에 핏물이 튀어올랐다. 간신히 고개를 틀어 피한 그녀는 쉴 틈 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휘두르고, 찌르고, 창격이 몰아친다. 접전이 격화되었다.

창성의 창에 담긴 기운은 아셸의 검기와 엇비슷했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일격에 그녀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깨달음이 녹아있었다.

그는 아셸에게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투를 완전히 끝낼 일격을 날리지도 않았다.

아셸이 어지럽게 쏟아지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맞받아치며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죽일 생각인가.'

한순간 이성이 날아가서 창성과의 결투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아셸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속셈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도발하며 상황을 여기까지 끌어온 이유가 뭐겠는가?

결투를 통해 정당히 자신의 목숨을 거두려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승리해버릴 수는 없으니 적당히 수준을 맞추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치열한 접전을 가장해야만 결투 중 어쩔 수 없이 상대를 죽였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만약 항복을 외친다면 창성도 결투를 끝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항복 선언은 명백히 결투의 승패가 가려진 것이고,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더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설령 이 자리에서 싸우다 죽는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전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개죽음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도망, 가슴에 날붙이처럼 깊게 틀어박힌 창성의 그 말이 그녀에게 물러섬이라는 선택지를 지워버렸다.

아셸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절대로 도망치지 않는다.

놈의 목에 검이 닿지 않는다면, 하다못해 한쪽 팔이라도.

아셸의 몸을 두르고 있던 순백의 고리가 더욱 강한 빛을 발했다.

마력을 3개의 코어로 나누어 서로 간의 공명을 통해 증폭시키는 마력 운용법. 일족의 비전.

백월족의 역사에서도 창시조 외에 완전히 익히는 것에 성공한 인물이 없던,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기술.

아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3개의 코어를 모두 최대로 활성화했다.

지금까지가 전력이었다면 이제는 그 한계조차 넘어섰다. 대가는 그녀 스스로도 얼마나 크게 찾아올지 모르는 반작용이었다.

콰아아앙!

갑작스레 증폭된 기운에 검격을 막은 창성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 역시 창에 더욱 기운을 불어넣고서 아셸의 공격을 쳐냈다.

그녀는 광인처럼 미쳐 날뛰면서도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창성이 그리는 창의 경로를 눈에 담았다.

한계를 넘어선 육체 능력이, 그리고 감각이.

놈의 창이 그리는 무질서한 선을, 바로 방금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것을 보다 선명히 머리에 각인시켰으니까.

불안정하게 날뛰는 마력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아셸의 몸에 부하가 찾아왔다.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목숨마저 내버린 전투 속에서, 아주 잠시일 뿐이라도 한계를 넘어서고 나서야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

그 잡힐 듯 말 듯 희미하기 그지없는 깨달음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조금만 더······.'

아셸의 각성에도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창성이었다. 애초에 그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적이 없었으니까.

창성의 창이 아셸의 옆구리를 얕게 베고 지나갔다. 다음은 다리와 어깨. 선혈이 튀어올랐다. 그녀의 검은 여전히 닿지 않았다.

날뛰는 마력에 육체의 균형은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그녀의 의식을 붙잡고 있는 건 그저 순간의 초인적인 집중력이었다.

변화무쌍한 창성의 창. 리곤을 가르치며 우연히 찾아왔던, 그러나 차마 전부 녹여내지 못했던 그 깨달음.

머리에서 따로따로 놀던 자그마한 조각들이 선처럼 이어진 건 찰나였다.

피잇.

창성의 얼굴에 핏물이 튀어올랐다.

검을 뻗은 아셸은 스스로가 무엇을 했는지 한 박자 뒤에야 깨달았다. 그의 뺨에 미세한 혈선이 그어져있었다.

'······아.'

결국, 끝내 닿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주 조금은 스쳤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최후의 일격을 날린 아셸은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몸을 휘청였다.

"······!"

창성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허물어지는 아셸을 향해 곧바로 창날이 내질러졌다. 그녀의 육체를 단숨에 한 줌의 핏물로 만들어버릴 듯 강대한 기운이 담긴 일격이었다. 그리고······.

콰아아앙!

허공에서 우뚝 멈춰선 창.

창날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정지한 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창성은 돌연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흠칫 놀라며 창을 거두고 물러섰다. 7군주였다.

쓰러지는 아셸을 받아든 그가 물끄러미 정신을 잃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창성에게 시선을 옮기고서 입을 열었다.

"결투는 끝이다. 네 승리로군."

창성은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격노에 눈꺼풀을 푸르르 떨었다.

승리, 그것은 애초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그 당연한 결과에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그는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7군주······ 분명 결투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7군주가 오만한 눈으로 말했다.

"뭐 어쩌라는 거지?"

"······."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면 네까짓 게 뭘 어쩔 거냐는 듯, 마치 그런 투였다.

순간 할 말을 잃은 창성은 7군주를 노려봤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

나는 이쪽을 노려보는 창성을 무시하고 아셸의 상태를 살폈다.

마력이 좀 불안정하긴 했지만 그냥 탈진해서 정신을 잃은 듯했다.

'그보다······.'

아셸의 레벨로 시선을 옮겼다.

【Lv. 85】

갑작스럽게 기운이 증폭된 후, 그녀의 레벨은 놀랍게도 전투 도중에 급상승했다.

그것도 무려 82레벨에서 3레벨이나 훌쩍 뛰어 85레벨로.

'전투 중에 벽을 넘었나?'

워낙에 치열한 전투였으니 이상할 건 없나 싶었다.

막강한 적과 싸우며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는 거야 대표적인 클리셰 중 하나가 아닌가. 물론 이건 현실이었지만······.

어쨌든 9레벨이나 높은 창성에게 공격이 조금이라도 스치는 데 성공한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나는 다시 창성을 바라봤다. 그리고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뺨을 스윽 그었다.

"아쉽군. 조금만 더 깊었으면 입이 찢겨나갔을 텐데 말이야."

놈이 이를 까득 갈며 씹어뱉듯 말했다.

"······방심했을 뿐이다. 애초에 전력을 다했으면."

"그래, 그렇게 변명할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것으로 아셸의 성장 속도는 게임에서의 메인 스토리보다도 훨씬 빨라졌다.

나는 놈과 황제를 번갈아 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장담하지. 대가를 치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도, 황제도."

창성이 억지로 비웃음을 흘렸다.

"천만에 한 번의 우연이었을 뿐이다. 그 백월족 계집의 검이 다시 내게 닿을 일은 결코 없다."

"그렇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다. 그때는 내 손에 직접 죽게 될 테니."

황제도, 그리고 창성도,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서는 언젠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대가를 치를 빌런들이었으니. 지금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내 말에 그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잘 간직하고 있도록."

결투는 끝났다.

사방에 모인 시선 아래, 나는 조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아셸을 부축한 채로.

***

"······."

두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다.

아셸은 욱씬거리는 몸을 일으키고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숙소였다.

"아, 일어나셨어요?"

침대 옆에는 한 여인이 앉아있었고, 뒤쪽에는 시녀 몇몇이 서있었다. 앉아있는 여인은 어스힐의 왕녀인 세리였다.

아셸 역시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당황했다.

세리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결투 중에 정신을 잃으셨어요. 날이 밝고 깨어나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동이 완전히 트지 않아 어스름했다.

아셸은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 일격에 실패한 후 날아들었던 창성의 공격, 그리고······ 7군주.

7군주가 창성의 공격을 막고 결투를 중단했다는 사실까지 떠올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

창성과의 결투에서 모든 걸 쏟아부은 탓일까.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열화처럼 활활 타올랐던 감정은 이제 사그라들어서 불씨만 남은 듯했다.

그보다는 멋대로 날뛰어 7군주에게 또다시 폐를 끼쳤다는 죄책감이 컸다. 대체 무슨 낯으로 뵌단 말인가?

아셸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창에 베였던 상처들은 전부 거의 아물어있었다. 포션으로 응급 처치를 한 모양.

그보다는 마지막에 비전을 한계까지 사용한 반작용으로 몸에 퍼진 부담이 더 컸다. 온몸이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결투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면목이 없는 표정으로 세리에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연회를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괜찮으니 그건 마음에 두지 마세요, 경. 그보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왕녀가 직접 여기서 자신을 살피고 있단 말인가?

그 의아한 기색을 읽은 듯 세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경이 깨어나실 때까지만 잠시 자리를 지키려고 했던 거예요."

"예, 아무튼 감사합니다.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이곳까지 옮기고 치료까지······."

궁전 바깥에 있던 연무장에서 여기까지 옮기려면 번거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 옮기는 건 저희가 한 게 아니예요. 7군주님께서 옮기셨죠."

"······?"

그녀가 어딘가 짖궂은 기색이 섞인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양팔을 뻗어 아래로 내렸다가 올렸다.

"그러니까, 연무장에서 쓰러진 경을 이렇게 번쩍 품에 안아드신 다음에."

그리고는 살포시 올렸던 팔을 내려놓는 시늉을 했다.

"여기 방까지 오셔서 침대에 뉘여놓고 가셨어요. 7군주께서 직접."

"······네, 네?"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아셸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