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86화 (85/189)

중립국 회담 (6)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 느낌.

다시금 점화된 분노가, 그리고 당혹스러움이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몰려들어 아셸의 마음을 터질 듯 조여 맸다.

'어떻게······.'

어떻게 눈치챘는가?

10년 전의 어두운 밤, 그리고 서로가 마주쳤던 건 그저 짧은 순간일 뿐이다.

아셸은 그가 설마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그딴 것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셸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창성을 노려봤다.

그의 시선은 무심하고 차가웠다.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는, 절벽에서 자신들을 바라봤던 그 눈빛처럼.

바람이 불고, 두 사람밖에 없는 테라스에는 잠시 적막이 맴돌았다.

"결국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었을 줄은 몰랐군."

마치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조금은 불쾌함이 스며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아셸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나를······ 기억하나?"

"방금 그렇다고 말했을 터인데."

"······."

"제법 사나워서 잡는 데 애를 먹었던 성가신 백월족이 하나 있었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창성이 안쪽의 연회장을 슬쩍 흘겨보고는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7군주의 호위 기사로 있는 모양인데, 칼데릭에 투신한 것인가? 복수를 위해서?"

아셸은 다시 입을 열려다가 간신히 다물었다.

한 손이 저도 모르게 어느새 검자루에 올려져있음을 깨달았다.

치밀어오르는 격노를 삼키는 그녀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여기서 더 놈과 말을 섞으면 그때는 정말 더 이상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셸은 거친 숨을 몇 번이나 들이쉬고 내뱉고는, 창성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마저 걸음을 옮겼다.

창성이 그런 그녀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재차 입을 뗐다.

"일족의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인가?"

아셸은 무시하고서 계속 움직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또다시 반사적으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결국은 목숨이 아까운 모양이군. 한심하지만 현명한 선택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내 눈에 띄지 말고 도망치거라."

아셸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창성을 홱 돌아봤다.

목숨이 아까워? 도망쳐?

뚫린 입이라고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에 입을 열었다.

"닥쳐. 넌, 언젠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창성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렇게 변명하며 도망치라는 거다."

"나는 도망치는 게······!"

"그때 절벽에서 너와 함께 있었던 백월족이 네 친동생이었던가?"

이성의 끈이 툭하고 끊겼다.

"그때도 동생을 버리고 도망치고, 오늘도 또다시 이렇게 도망치는군. 저승에 있는 동생이 널 원망하겠구나. 겁쟁이라 부르짖으며 말이다."

"······!"

아셸의 전신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검집에서 뽑아진 그녀의 검에서 거대한 검기가 몰아쳤다.

콰아아앙!

***

아셸이 테라스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장 한쪽에 있던 창성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라스로 나갔다.

어스힐의 국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뭐지?'

나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불안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테라스로 걸어가며 초감각을 끌어올리니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 그래, 결국은 목숨이 아까운 모양이군.

- 그때 절벽에서 너와 함께 있었던 백월족이 네 친동생이었던가?

- 그때도 동생을 버리고 도망치고, 오늘도 또다시 이렇게 도망치는군. 저승에 있는 동생이 널 원망하겠구나. 겁쟁이라 부르짖으면서······.

나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콰아아앙!

거대한 마력의 기운, 그리고 폭발.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화들짝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연기가 걷히고, 반파된 테라스에 서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이런······.'

아셸은 전신을 새하얗게 물들인 채로 종족 특질까지 발동하고 있었다.

검을 뽑아들고서 핏발이 가득 선 눈으로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며.

그리고 그 바로 앞에서 한 손을 뻗은 채 태연하게 서있는 창성.

아셸이 공격을 날리고 창성이 그것을 막은 광경이었다.

소란 속에 금세 주위로 경계를 서던 기사들이 모여들고, 다른 이들은 테라스가 있는 쪽에서 멀찍이 물러섰다.

나는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셸."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날 슬쩍 돌아봤지만, 곧 다시 창성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를 노려봤다.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대군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야, 7군주의 호위 기사잖아? 즐거운 연회에 이게 다 무슨 소란일까?"

나와 대군주를 바라본 창성이 뻗고 있던 손을 거두고서 말했다.

"나는 그저 공격에 방어했을 뿐이오. 아무래도 이쪽의 경에게 무언가 오해를 산 것 같소."

나는 실소를 흘렸다.

초감각으로 두 사람이 했던 대화를 전부 들었기에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대놓고 그런 망발을 지껄여놓고 저건 뭔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아셸에게로 시선을 옮긴 대군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흐음······ 그보다 7군주는 알고 있었던 건가? 저 모습을 보니, 인간이 아니라 백월족이었구나?"

대군주 역시 아셸이 종족 특질을 사용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이번에 처음으로 안 사실이었다.

굳이 그걸 알려줄 필요도 없어니 나도 그녀에게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의 발언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백월족? 백월족이라면 분명······."

"그래, 세인테아 황실에서······."

10년 전의 일이었지만, 당시에 한창 제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그 사건을 모르는 이는 자리에 없었다.

아무리 서열이 낮은 황자라고 해도 무려 황족이 직접 황실의 이름으로 처형을 당했던 대사건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지금 나를 공격한 여인은 대군주가 말했다시피 백월족의 생존자요."

그때 창성의 목소리가 소란을 일시에 잠재우고 연회장 전체에 나지막이 울렸다.

"그리고 그녀가 날 공격한 이유는 세인테아 황실에 품고 있는 원한 때문이오. 그러니 나는 그것을 이해하오."

그리고는 다시 아셸을 바라보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세인테아의 오성으로서 지난날의 황실의 과오에 진심으로 유감을 표한다."

"······."

"하지만 그것은 황실의 뜻이 아닌 5황자와 그 일당들이 치밀한 계획 아래 벌인 참변이었으며, 그들은 이미 황실의 준엄한 정의 아래 처형됨으로써 심판받았다. 황실을 향한 너의 증오심은 이해하나, 나는 네 일족을 멸한 원수가 아니다."

아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 역시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말에 어이가 완전히 없어졌다.

창성, 놈은 황제의 명에 따라서 아셸의 일족을 직접적으로 몰살한 주범이다.

그런 놈이 자신은 연관이 없다며 지금과 같은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황실이 벌인 끔찍한 학살의 죄악은 진짜 배후가 아닌, 5황자와 그 측근들이 전부 완벽하게 뒤집어쓴 채 처형당했으니까.

진실을 아는 이는 황제와 창성,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인 아셸밖에 없었다. 게임을 플레이한 나를 제외하고는.

어느새 근처로 다가와 서있는 황제는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미약하게 놀란 기색이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창성이 황제와 이야기를 하고 벌이는 짓은 아닌 듯했다.

슬쩍 황제가 있는 쪽을 바라본 창성이 그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백월족의 생존자여, 그럼에도 그토록 덧없는 증오를 불태우고 싶다면 기꺼이 받아주겠다."

"······."

"내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해도 좋다는 뜻이다. 네 검이 내게 닿는다면, 그때는 얼마든지 내 목을 내어주마."

그 말에, 나는 그제야 창성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결투.

애초부터 놈은 이럴 생각으로 아셸을 도발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목적이 무엇인가? 실수를 가장해서 아셸의 목숨을 앗아가고 싶은 건가?

뭐가 됐든 호응해줄 필요가 없는 뻔한 도발일 뿐이었고, 그건 아셸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기색이었다.

"아셸, 관둬라."

아셸이 나를 돌아봤다.

뻔한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고, 복수는 얼마든지 나중을 기약해도 된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죄송합니다, 론 님."

"······."

"이번은······ 이번 한 번만큼은, 부탁드립니다 저를 말리지 말아주십시오."

온갖 감정들로 점칠되어 위태롭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다시금 살의를 뿜어내며 창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결투를 신청하겠다, 창성. 네놈이 지껄인 대로 목을 베어주마."

그에 한 차례 주위가 술렁였고, 창성이 나를 바라봤다.

"허락하겠소, 7군주? 서로의 목숨을 건 생사결이오. 명확한 승패가 갈리기 전까지 결투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주시오."

"······."

군중의 시선이 나에게로 몰렸다.

옆에 있는 대군주가 언제나 그랬듯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아셸과 나를 번갈아 봤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82레벨인 아셸과 91레벨인 창성의 결투.

애초에 결과가 정해진 승부다.

80, 90레벨대에서 9레벨 차이란 무슨 수를 써서도 넘을 수 없는 아득한 격차였으니까.

어떤 경우에도 아셸이 오성 중 일인인 창성에게 승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말하는 꼴로 봐서, 짐작했던 대로 놈이 원하는 건 역시 아셸의 목숨인 듯했다.

하지만 아셸은 이미 말린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이 정도로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는 걸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불안정하게 들끓고 있었고, 검을 쥔 손은 지금이라도 창성의 목을 향해 휘둘러질 듯 움찔거렸다.

······이걸 말려야 되나?

정 말리려고 하면 억지로 뜯어말릴 수야 있을 것이다.

어차피 승패가 뻔히 정해진 결투를 허락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

나는 다시 한 번 아셸의 표정을 보고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결과가 어떻든, 이번 결투를 말리면 왜인지 그녀가 크게 엇나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렇게 두 사람의 결투가 성사되었다.

***

결투는 곧바로 연회장 바깥에 위치한 연무장에서 이루어졌다.

관전자로서는 나와 대군주와 황제, 그리고 다른 중립국의 국왕들만 자리했다.

연무장 한가운데에 아셸과 창성이 서로 마주 본 채 섰다.

창성은 한 손에 자신의 키보다도 훨씬 길다란 창을 무기로 든 채였다.

곧 창성이 아셸에게 말했다.

"선공은 양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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