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국 회담 (5)
회담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다.
곧 저녁에는 만찬과 함께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그것까지 마치면 중립국에서의 일정은 끝이었다.
전쟁 발발도 막았고 이룰 목적이야 다 이뤘으니 당장 떠나도 상관은 없었지만,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기에 여유롭게 숙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쇼파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최우선 순위는 세인테아에서 성검의 계승자를 찾는 것.
이건 정말로 신중해야 할 사항이었기에 암영에게도 정보 수집을 맡기지 않았다. 무슨 딴생각을 할지 모르니까.
'신비 찾을 때처럼 내가 직접 발로 뛰어서 찾아야 되는데······.'
문제가 있다면 현재 시점에서의 계승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할 수가 없다는 것.
게임에서 나왔던 정보들을 종합해서 그녀가 있을 거라고 추정 중인 장소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었기에 결국엔 찾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할 것이었다.
'그것도 그렇고.'
또 세인테아의 영역에도 숨겨진 장소를 알고 있는 신비가 2개 있기는 했다.
하지만 둘 모두 지금의 내게 절실히 필요한 능력들은 아니었다.
이미 칼데릭에서 여러 신비들을 얻어서 스펙이 크게 업된 상황이고, 더 이상 툭하면 죽을 개복치 목숨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당연히 얻어서 나쁠 건 없지만.'
신비를 많이 흡수한다고 해서 뭔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얻을 수 있는 신비는 얻는 게 무조건 다다익선이지 않겠는가?
본격적인 계승자 찾기는 두 신비부터 깔끔하게 챙기고 시작하면 될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반드시 얻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나는 숨겨진 장소가 상당히 난감하기도 했고.
'그리고 군주 회의······.'
그나저나 시간이 거의 겹쳐 바로 얼마 뒤에 있을 군주 회의가 변수라면 변수였다.
말만 부탁인 명령권이 아직 2개가 남았기에 나는 대군주의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는 처지였으니까.
이번 회담만 해도 결국 왜 동행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녀가 또 무슨 이상한 걸 시키려 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할 일도 많은데 성가신 말은 안 꺼냈으면 좋겠는데······.
"······."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슬쩍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문 바깥에서 미동도 없이 서있는 아셸의 기척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 들어올 때도 봤지만, 어제부터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아셸이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창성의 존재 때문이리라.
창성 퀘이덴은 아셸의 일족을 직접 손에 피를 묻혀 학살한 당사자고, 그 배후에는 황제와 황실이 존재한다.
일족의 원수들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정이 어떨까. 그 심정이 어떨지는 함부로 짐작할 수 없었다.
사실 세인테아 황실의 백월족 학살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묻힌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에 이미 제국 내에서도 한 차례 공분을 샀었던 참사.
그리고 그 주도자와 책임자로 지목되어 처형을 당했던 인물은 5황자와 그 측근들이었다.
학살의 진짜 배후는 황제였지만, 황제는 애초부터 그럴 생각으로 5황자를 말로 세운 뒤 꼬리를 잘라버린 것이었다.
형제들 사이에서 뒤쳐진 그는 아비인 황제에게 능력을 인정받고자 그의 말대로 따랐다가, 그대로 팽을 당한 것이었고.
아셸은 몰살당한 백월족의 유일한 생존자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그런 식으로 마무리가 지어졌던 그 사건은, 이제 와서 생존자인 아셸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나선다고 한들 진짜 배후인 황제를 위협할 수도, 더 물고 늘어질 수 있는 건덕지도 없다는 것이었다.
잘해봐야 마음에도 없는 황실의 사과쯤이나 받을 수 있겠지.
그렇기에 아셸이 진정 복수를 원한다면, 그것이 실현 가능한 방법은 제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방법밖에 없었다.
제 손으로 직접 황제와 창성을 죽이는 게 아니고서야 그녀가 일족의 원수를 갚을 마땅한 방법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아직 확실히 마음을 정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었다.
세인테아라는 거대 세력의 수장인 황제, 그리고 91레벨의 창성을 아직 82레벨에 불과한 그녀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
황제와 창성을 죽이는 것.
분명 아셸은 내게 있어 소중한 인물이다.
단순히 능력적으로 뛰어난 인재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벌써 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거의 항상 곁에 두고 붙어다녔는데, 사람인 이상 정이 안 들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아셸을 위해서 그런 부담을 질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 애초에 그것을 그녀가 원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 성격에 일과 무관한 내 손을 빌려 원수를 갚고 싶어할 리는 없었으니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성장을 돕는 것뿐이었다.
언제든 그녀가 마음을 확실하게 정했을 때, 그 선택이 무엇이든 의지대로 행할 무력을 갖추고 있을 수 있도록.
"······."
그러려면 빨리 아셸을 '그 장소'로 데려가야 되는데 말이다.
그곳은 아셸이 잠재력을 폭발시켜 극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장소임과 동시에,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일족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수 있는 존재가 잠들어있는 곳이었다.
물론 아셸 외에 살아남은 백월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진실을 그녀에게 알려주기로 한 건 이미 마음을 정한 부분이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일단 신비와 계승자를 먼저 찾는 것을 우선해야 할지, 아니면 그 전에 아셸을 먼저 그곳으로 데려가야 할지.
······아,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쇼파에 몸을 풀썩 뉘였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
"안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기대했었는데 아쉬워. 용사한테 7군주를 한번 소개시켜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대군주가 찻잔을 휘적거리며 한탄하듯이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황제가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대군주의 뜻이오?"
"음? 뭐가?"
"어스힐을 돕는 것, 7군주의 단독적인 행동이리라 생각되지 않는데."
"아······ 그거? 맞는데? 나도 갑자기 7군주가 그렇게 나설 줄은 몰랐지 뭐야."
대군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어스힐의 2왕자와 7군주가 어떤 연결 고리가 있었다는 것은 그녀도 몰랐던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당연히 7군주가 두 국가의 분쟁에 그리 적극적으로 끼어들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단지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그에 간섭하지 않은 것이었지.
그러나 황제는 믿지 않는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가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혹여 칼데릭의 위신이 떨어지진 않을까 염려스럽소. 규율을 깨고 군주를 살해한 자를 대군주가 비호하는 것처럼 보이니······."
"아아, 걱정해줘서 고맙네."
그 말에 대군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말이야, 황제. 다른 누구도 아니라 네가 그런 같잖은 소리를 지껄이면, 입을 좀 찢어버리고 싶어지는걸?"
대군주의 갑작스러운 폭언에 황제의 뒤에 서있던 2황녀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제 역시 미약하게 굳은 얼굴로 대군주를 바라봤다.
"나와 맞먹으려고 들지 마. 주제를 파악하렴, 하찮은 쥐새끼야. 내가 세인테아에 대해 존중하는 건 어디까지나 용사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지."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발끈해서 끼어들려던 황녀는 대군주의 시선이 닿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한순간 전신을 휘감은 가공할 위압감에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기세를 거둔 대군주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위협이나 하자고 온 게 아닌데 말이야. 나도 좀 묻고 싶은 게 있거든."
이어진 그녀의 말에 황제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죄수 호송선, 권성."
"······."
"대체 '그건' 잡아다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야, 황제? 호송선에 숨겨 태워 수용소로 이송하면서까지?"
황제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찻물을 쭉 들이킨 대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고하는 거야, 황제. 뭔진 몰라도 자꾸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권성처럼 아까운 전력들만 계속 죽어나가게 두기 싫으면."
저벅저벅 방 바깥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황제가 물었다.
"대체 대군주는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
"마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건 모를 리가 없겠지. 세인테아가 무너지면 바로 다음은 칼데릭 차례지. 한데도 자꾸 세인테아와 각을 세우고, 그리 애매모호한 태도만 보이는 저의가 무엇이냔 말이오."
황제를 돌아본 대군주가 싱긋 웃었다. 그뿐이었다.
***
저녁이 되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회담에 직접 참여한 인사들 말고도 그들과 동행한 이들은 많았기에 연회장은 많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왕족은 왕족들끼리, 그보다 신분이 낮은 이들도 저들끼리 구석 자리에 모여 회담의 결과에 대해 떠들었다.
대군주와 7군주를 따라서 연회장으로 이동한 아셸은 굳은 안색으로 연회장 한쪽에 시선을 끌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곳에는 황제를 비롯해서 그와 동행했던 창성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7군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셸은 정신이 혼잡한 걸 들켰나 싶어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아셸,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라."
7군주의 말에 그녀는 역시 들켰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명색이 호위 기사인데 혼자 먼저 돌아가서 쉬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이번에는 7군주도 상당히 강경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러면 테라스로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도록."
아셸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바깥에 나서서 서늘한 바람을 맞자 머리의 열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
아셸은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깊게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세인테아, 창성, 일족을 몰살한 원수.
지금 바로 안쪽의 연회장에서 태연자악하게 앉아있는 황제와 창성의 모습에 아셸은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한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복수도, 일족 찾기도, 벌써 그 끔찍한 날로부터 1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마음속 깊은 진심으로는 이미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일족 따윈 어디에도 없다는 걸.
그저 그럴 리가 없다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래서 복수조차 제대로 마음 먹지 못하고 이리 한심하게 시간만 축내고 있는 것인가.
원수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검조차 뽑지 못하는데······ 이래서야 죽은 일족들을 볼 낯이 있기는 한 걸까.
아셸은 두 눈을 감고서 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익숙한 일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심마가 찾아오는 거야 일상이고 다반사였었으니까.
그렇게 몇 분 동안 호흡을 하며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아셸은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
테라스로 한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창성 퀘이덴.
아셸을 슬쩍 바라보고서 반대편 난간에 선 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여기서 소란을 피워봐야, 놈에게 살의를 뿜어내봐야 전부 아무 의미도 없으며, 론 님에게 피해만 끼치는 짓일 뿐이라고······.
그렇게 들끓는 분노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억누르며 마저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어제부터 계속 걸렸었는데, 이제서야 기억이 났다."
갑작스레 열린 그의 입이 아셸을 도로 붙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10년 전, 알텐 대산맥. 유일하게 놓쳤던 그 백월족이 너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