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국 회담 (4)
카숄 국왕은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7군주, 저 작자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전쟁을 일으키면 어스힐의 편에서 홀로 참전하겠다고?'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다.
아니,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실소조차 나오지 않을 헛소리다.
하지만 그 발언을 한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칼데릭의 군주라면, 그건 더 이상 허언이나 헛소리 따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칼데릭과 세인테아, 두 거인 사이에 껴있는 중립국의 왕으로서 오랜 시간을 군림해온 그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중간한 강자 따위가 아닌 진짜, 한 명의 초월자가 가지는 힘이 얼마나 상식을 벗어나는 것인지를.
칼데릭의 군주, 그들 개인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말 그대로 능히 홀로 한 국가를 압도할 수 있었으니까.
"······."
7군주의 난데없는 발언에 롱포드와 테이르도 반쯤 넋을 놓고서 그를 바라봤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말이 조금 이상하지 않소?"
카숄 국왕은 궤변이라고 하려다가 간신히 수위를 낮춰서 말했다.
"군주도 엄연히 칼데릭의 전력일지인데, 개인만 나서서 참전하겠다는 건······."
7군주가 말을 끊었다.
"칼데릭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열 군주령의 연합이다. 대군주의 뜻이 나머지 군주들의 뜻을 전부 포함하는 건 아니다."
군주들은 대군주가 아래에 두고 거느리는 것이 아닌, 협력 관계에 있는 독립적인 세력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군주도 웃음을 흘리며 거들었다.
"칼데릭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발언에 오해의 여지가 있긴 했군요. 그건 내 뜻일 뿐이라고만 받아들이세요."
카숄 국왕은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꽉 깨물었다.
형식적인 체계로 따지면 그렇긴 하지만 7군주왇 대군주의 말은 여전히 궤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 회담의 모든 내용은 결국 칼데릭과 세인테야 양측의 의지 아래 이루어질 뿐이며, 중립국들은 두 세력의 암묵적인 허락 아래 눈치를 보며 제 이권을 챙기는 말들에 불과했다.
어느 한쪽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면 명분이 어떻고 이유가 어떻든 그 뜻에 반항할 수는 없었다.
카숄이 어스힐에 전쟁을 들먹였던 것처럼 중요한 건 명분 따위가 아닌, 그저 힘이었으니까.
'세인테아는······.'
그래서 카숄 국왕은 황제를 돌아봤다.
칼데릭이 직접 몸을 일으켰으니, 그들을 막아설 수 있는 건 세인테아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무심한 표정으로 7군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그의 입이 열렸다.
"어스힐 왕국을 지원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7군주?"
7군주가 대답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고작 영토 문제 따위로 전쟁과 같은 혼란을 일으켜서 될까."
"······."
"난 대륙의 안정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건 용사도 마찬가지겠지, 황제. 그렇게 방관이나 하려는 걸 보니 용사는 아직 회복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인데, 뒷감당을 할 수 있겠나?"
그 말에 황제의 눈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재밌다는 듯 그런 황제를 바라보며 실실 웃던 대군주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7군주는 정말 참전할 모양인데, 어때?"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세인테아의 뜻에 변함은 없소."
"······."
"풀리지 않을 갈등을 힘으로 억누르기만 하는 건 대륙의 평화를 위한 최선이 아니지. 본인은 단지 그렇게 생각하여 두 국가의 분쟁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오. 하나 7군주의 의지가 그렇다면 그 역시 존중하오. 그 의지대로 하면 될 일이오."
결국은 7군주가 관여하더라도 세인테아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카숄 국왕이 허망한 얼굴로 작게 실소를 흘렸다.
7군주가 그런 그에게 물었다.
"카숄 국왕, 어스힐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에 여전히 변함이 없나?"
"······."
"변함이 없다면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해도 좋다."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는 7군주의 오만한 모습에, 카숄 국왕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고블린들 사이의 전쟁에 갑자기 오우거가 끼어들겠다는 꼴이다.
그 하나만 나서도 왕국의 존립이 위태로울 텐데, 미쳤다고 전쟁을 벌일까.
"······결정이 섣불렀던 것 같소. 앞선 발언들을 모두 철회하겠소. 카숄은 어스힐과 전쟁을 할 의지가 없소."
결국은 두 손을 들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카숄 국왕의 신속한 번복에 다른 국왕들도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세인테아가 나서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더라도 답이 없는 일이었으니.
"이번 안건은 아직 서로 간의 대화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 좋소."
롱포드는 순순히 태도를 굽히는 카숄 국왕을 바라보고 있다가, 7군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작 몇 마디 말로 간단히 카숄을 물러나게 만들어버린 그는 이리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태연한 기색이었다.
새삼 칼데릭의 위상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체 왜······.'
7군주는 대체 왜 어스힐을 도와주는 거란 말인가?
여전히 그에 대해 의문과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안도감도 잠시였다.
그렇게 회담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롱포드는 7군주에게서 신경을 뗄 수가 없었다.
***
길었던 회담이 끝나고, 나는 지친 얼굴로 회담장을 서둘러 빠져나가는 카숄 국왕과 왕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쨌든 이걸로 전쟁은 막았고.'
내가 어스힐을 지지하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내세웠으니, 카숄이 앞으로 어스힐을 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돌아버려서 어스힐을 침공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그때는 나도 정말로 전쟁에 참전해서 어스힐을 도우면 될 뿐이었으니.
내 능력만큼 전쟁에서의 대량 학살에 특화된 능력도 없었으니까.
물론 나도 그런 짓거리는 전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몇 마디 말로 전쟁을 막은 건 굉장히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참······.'
게임에서 나왔던 대로 참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기는 했다.
사실 이번에 카숄이 어스힐에 대놓고 전쟁을 선언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용사의 부재.
아까 황제를 한번 찔러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카숄이 전쟁하겠다고 설치는 것도 그렇고, 이번 회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용사는 '성동'에 들어가있는 모양이었다.
카숄이 그걸 세인테아 측에게 흘려들어서 알고 있던 건지, 아니면 회담에서 반응을 보고 결정하려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아무래도 중요한 건 아니었고.
마족과의 전쟁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마왕과의 전투에서 용사가 입었던 후유증은 그녀를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좀먹고 있다.
그렇기에 그 속도를 늦추려 비정기적으로 회복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있었고, 그 기간 동안에 그녀는 세간의 일에 간섭할 여력이 없다.
만약 지금 용사가 건재히 세상에 나와있었다면, 황제가 오늘 회담에서 전쟁 문제에 나몰라라 방관만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용사를 이번 회담에서 만났으면 좋기는 했을 텐데.'
아직 계승자를 찾지는 못했지만, 순서야 어떻든 그녀와 만나서 대화를 먼저 하는 것도 아마 괜찮았을 것이다.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아직까지 자리에 남아있던 어스힐 국왕과 테이르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와 대군주를 한 차례 번갈아 본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어스힐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7군주."
감사 인사인가.
딱히 할 말은 없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서있던 테이르가 내게 물었다.
"······7군주님, 정말로 궁금한 걸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봐라."
"아무리 생각해도 7군주님께서 어스힐을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어스힐 국왕이 흠칫 놀라서 테이르를 돌아봤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는 테이르를 보며 뭐라 대답할까 고민했다.
생각해보면 그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일 것이었다.
칼데릭에 무슨 이득이 있다고 군주가 직접 나서면서까지 카숄의 전쟁 선포를 막아준 것인지.
사실 굳이 테이르를 5군주령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아마 어스힐을 돕기는 했을 것이다.
내가 이들을 도운 가장 큰 이유는 테이르에게 진 빚이 아니라 게임의 메인 스토리 때문이었으니까.
단지 의도치 않게 테이르와 사소한 인연도 닿아서 도울 이유가 더 명확해진 것뿐이지.
나는 이참에 지도에 대한 감사를 전할까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했다.
옆에서 대군주가 듣고 있는데 굳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내키지 않았다.
"칼데릭의 군주로서 명예를 걸고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니니, 그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소."
나는 어스힐 국왕에게 말했다.
아까 카숄에 대한 안건이 끝나고, 계속해서 내 쪽의 눈치를 보며 심란한 기색을 보였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숨겨진 꿍꿍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오해하고 있는 듯하니 조금이라도 안심은 시켜줘야겠지.
생각이 맞았던 듯 그가 속을 찔린 듯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테이르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어스힐을 도운 이유는 아까 말했던 대로다. 나는 대륙에 쓸데없는 혼란이 빚어지기를 원치 않아. 그게 전부다."
특히나 시기가 시기였으니 말이다.
아직까지 대륙을 조용히 뒤덮어가고 있는 그림자를 인지한 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나만큼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메인 스토리. 마족들의 본격적인 준동은 몇 년 뒤에나 일어날 일이지만, 지금도 대륙 곳곳에서 위험한 움직임들은 있었다.
내 위치가 위치였기에 구태여 알아보지 않더라도 종종 알아서 귀에 들어오는 큼직한 사건들이 있었다.
최근에는 세인테아 쪽에서 몰살당한 마을에 '원마' 중 하나로 추정되는 마족의 흔적이 나왔다는 것도 그렇고.
아직 시간이 남았더라도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내 존재가 어떤 식으로 메인 스토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처럼 제어할 수 있는 변수는 최대한 제어하고, 쉬지 않고 목표를 향해서 계속 나아가야만 했다.
"그렇······ 군요."
테이르나 어스힐 국왕은 내 말을 완전히 믿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칼데릭의 군주가 대륙의 평화를 원한다니.
만약 죽은 폭왕 놈이나 흑해 여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기는 했을 것이다.
나는 잠시 테이르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말했다.
"왕국으로 돌아온 건 잘한 일이다."
"······."
"피하기만 해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잊지 말고,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라."
테이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대군주가 흥미롭다는 눈길로 날 바라봤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어스힐 국왕에게 목례를 건네고 대군주와 함께 회담장 밖으로 나갔다.
거리가 멀어질 때까지 한참이나, 등 뒤로 우두커니 날 바라보는 테이르의 시선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