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83화 (83/189)

중립국 회담 (3)

7군주는 어떤 인물인가.

테이르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한 번의 짧은 마주침이었을 뿐이다. 고작 그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역시 악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그야 첫 만남부터가 하마터면 외팔이 될 뻔했던 걸 구해주지 않았던가?

의아하기는 해도 테이르는 7군주에게 그저 고마움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지, 부정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악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숨겨진 속셈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낀 바로는 그렇습니다."

상당히 확신에 찬 테이르의 목소리에 롱포드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영문을 알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카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2년 만에 돌아온 아들은 또 다른 큰 고민을 안겨주었다.

롱포드는 칼데릭의 군주쯤 되는 인물이 순수한 선의로 테이르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악인인지 아닌지는 그와 관련해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상대의 의도를 모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상대가 이쪽이 감당할 수 없는 강자라면 더욱이 말할 것도 없이 그러했고.

무엇 하나 제대로 알려진 정보가 없는 칼데릭의 새로운 7군주.

그는 얼마 전에 6군주를 죽였고, 대군주는 그런 7군주를 대동하고서 회담에 참여했다.

그리고 7군주는 어째서인지 테이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롱포드는 온갖 의문들로 어지럽혀진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 당장은 회담부터였다. 고민해봐야 어차피 알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은 알겠다. 더 할 얘기가 있느냐?"

테이르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

"더 물으실 게 없으시면 그만 다시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꾸벅 인사하고서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내일 회담에 절 대신해서 테이르가 참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버지."

1왕자 루커스의 말에 테이르가 흠칫 놀라서 그를 돌아봤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말한 대로다."

루커스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7군주가 구태여 네게 말을 건넸다. 의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행동인데, 그럼에도 회담에 네가 참여하지 않고 내가 참여하면 혹시나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일이지 않느냐."

회담에는 각 국당 대표 인사 한 명과 발언권이 없는 관전인 한 명이 참여할 수 있다.

본래라면 관전인 자격으로는 1왕자인 루커스가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그것을 테이르로 바꾸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떠십니까, 아버지."

루커스의 말에 롱포드도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테이르, 회담에 함께 참여해줄 수 있겠느냐?"

"아니······."

테이르는 당황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가출해있다가 이제야 돌아온 마당에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예, 뭐······ 그럼 알겠습니다. 제가 회담에 참여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테이르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무튼, 더 물으실 게 없으시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테이르가 방 밖으로 나가고, 슬쩍 롱포드의 눈치를 본 세리도 그를 따라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롱포드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씁쓸한 표정으로 서있던 루커스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 7군주의 의중은 알 수 없더라도, 정말 그가 이번 회담에서 어스힐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비춘다면······."

"그런 기대는 하지 말거라."

롱포드는 단호하게 끊어서 말했다.

여지껏 중립국의 정세에 조금이라도 관여한 적이 없던 대군주였다. 그 견고했던 입장이 갑자기 이번 회담에서 깨질까.

결국 뭐가 됐든 칼데릭의 도움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후우······.'

롱포드는 심신이 한층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내일 열릴 회담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

하루가 지나고 회담 당일이 되었다.

어스힐, 카숄, 마토르, 플라가스, 그리고 라쟌.

다섯 중립국의 국왕들은 일찍이 회담장에 입장하여 원탁의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서 앉았다.

칼데릭의 대군주나 세인테아의 황제보다 늦게 자리하는 참사가 일어나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뒷편에는 회담의 관전인 자격으로 입장한 왕자와 왕녀들이 각각 한 명씩 서있었다.

중립국 회담.

그 이름대로 회담에서 나올 안건들은 중립국들 사이의 문제에 관련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번 회담의 최고 안건은 모두가 이미 알다시피 어스힐과 카숄의 대립이었다.

아직 황제와 대군주가 도착하기 전, 누구 하나 입을 열고 있지 않은 고요한 분위기 속.

카숄 측의 1왕자 초르단은 어스힐 측의 자리를 연신 곁눈질했다.

'······1왕자가 아니라 2왕자가 참석했군.'

어스힐 국왕의 뒤에 관전자로서 서있는 인물은 1왕자 루커스가 아닌, 2왕자 테이르였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로 카숄 측 역시 하루 동안 생각이 복잡해진 채였다.

도대체 새로운 7군주와 2왕자 테이르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칼데릭의 대군주가 지금까지 중립국들 사이의 문제에 관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과연 7군주의 정확한 의중이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수가 생긴 것이었다.

"세인테아 제국의 황제께서 입장하십니다."

나지막이 울린 목소리에 다섯 국왕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회담장에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2왕녀 아렌을 대동하고.

그들이 원탁의 한쪽에 자리하고 회담장에 흐르는 공기엔 더욱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상태로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르고······.

"칼데릭 군주회의 대군주님과 7군주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국왕들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막 속에 발자국 소리가 울리고, 회담장 안으로 한 쌍의 남녀가 걸어들어왔다.

칼데릭의 대군주와 7군주.

그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두 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황제의 바로 맞은편 자리였다.

본래라면 대표 인사 한 명과 관전자 한 명이 회담에 참여하는 것으로, 관전자 자격으로서 참여한 이는 원탁에 앉는 게 아닌 뒤쪽에 서야 했지만, 7군주는 대군주의 옆에 나란히 자리하고 앉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칼데릭 군주회는 열 국가의 연합이라 할 수 있었고, 7군주는 그중 한 국가의 수장이었으니까.

그저 대군주가 지금껏 다른 군주를 대동하고서 회담에 참여한 적이 없었기에 처음으로 발생한 상황일 뿐이었다.

그에 대해 굳이, 그리고 감히 이이를 제기할 사람은 자리에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회담장에 자리하고, 원탁을 한 차례 둘러본 롱포드가 입을 열었다.

"그럼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

첫 번째 안건은 라쟌 왕국과 플라가스 왕국 사이 자그마한 무역 분쟁이었다.

"아시다시피 북동부의 무역로는 지형이 몹시 험악하오. 관세 재정은 그것을 고려하여 신중히 해야 할 문제요, 솔릭 국왕."

"물론 그 부분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오. 근 몇 년간 라쟌에서 들여온 소금의 수입량이······."

회담은 갈등이 있는 국가들끼리 서로 논의하고, 그와 무관한 국가들이 가끔 의견을 내며 거드는 식이었다.

'처음 군주 회의에 참가했을 때 생각나네.'

나는 잘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시피 했다.

그들 사이의 사소한 문제들은 나와 전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대군주와 황제는 서로 단 한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았다.

'대군주는 애초에 그냥 관심이 없고······.'

나는 슬쩍 옆을 돌아봤다.

그녀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회담에서 오고가는 내용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황제 쪽은 대군주가 가만히 있으니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기에 나서지 않는 것이겠지.

회담은 그런 식으로 내 생각보다도 훨씬 순조롭게 흘러갔다.

안건이 차례차례 지나가고, 곧 어스힐과 카숄의 차례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어스힐과의 국경에 위치한 로왈프 평원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오, 롱포드 국왕."

카숄의 국왕의 직설적인 발언에 어스힐 국왕과 그 뒤에 선 테이르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붙이고 있던 등을 슬며시 뗐다.

'역시 이렇게 되나.'

회담에 참여하기 전에 나도 알아본 게 있었기에 카숄이 물고 늘어지는 게 뭔지는 알고 있었다.

로왈프 평원.

어스힐 왕국 최대의 곡창 지대 중 하나인 황금의 땅.

"카숄이 로왈프 평원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것도 없소. 더 왈가왈부할 것도 없이 로왈프는 국경 안쪽에 위치한 명백한 어스힐의 영토요."

어스힐 국왕의 단호한 말에도 카숄 국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주장을 이어갔다.

"우리는 벌써 20년도 전부터 계속해서 로왈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왔소. 결코 부정할 수 없을 신빙성 있는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말이오."

"근거라니, 저번 회담에서도 제시했던 그 터무니없는 자료를 말하는 것이오? 그 자료의 대체 어디에 신빙성이······."

두 국왕 사이에 벌어진 설전을 들어보면 이러했다.

카숄 국왕은 카숄의 왕실에 남은 선대의 기록을 들먹이며 본래 로왈프가 카숄의 중요한 영토였음을 주장했고, 어스힐은 그건 근거가 될 수 없다며 반박했다.

누가 듣기에도 카숄의 주장은 그들이 언급한 신빙성을 찾아볼 수 없는 억지였지만, 그에 대해 걸고 넘어지는 국왕은 없었다.

사실상 세인테아 쪽에 붙은 나머지 세 국가가 황제와 반대되는 의견을 낼 리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사실 카숄이 어떤 주장을 하든 명분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 사이의 권익 다툼이란 게 원래 이런 거겠지.

"우리는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평화적으로 로왈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소.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카숄을 무시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은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오."

카숄 국왕이 선언했다.

"만약 어스힐이 현재의 입장을 계속 고수할 생각이라면, 카숄은 어스힐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소."

전쟁.

회담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담긴 내용에 비해 너무도 담담한 선포였으나, 자리한 이들 중 놀라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당연히 모두가 알고 있었을 테니까.

단지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다른 세 국가는 모두 카숄의 편에 가까웠다.

나는 슬쩍 테이르를 바라봤다.

그는 더없이 굳은 얼굴로 조용히 어스힐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스힐 국왕이 노기가 담긴 눈빛으로 카숄 국왕을 노려봤다.

"어찌 전쟁이라는 말을 그리 쉽게 입에 올리는······."

"쉬이 내린 결정이 아니오. 그만큼 우리의 각오가 확고하다는 걸 인지하라는 것이오, 롱포드 국왕."

"······."

"다른 분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소."

카숄 국왕이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세 국왕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카숄 측의 주장에 충분한 합당함이 있다고 생각하오. 라쟌이 간섭할 문제가 아닌 것 같소."

"마토르 역시 마찬가지의 의견이오."

"플라가스도 그렇소."

짜고 친 듯 술술 나오는 반응에 어스힐 국왕은 다시 한 번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윽고 황제의 입도 열렸다.

"두 국가의 분쟁에 세인테아는 간섭할 생각이 없소."

황제는 그들의 전쟁에 조금도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두 국가 중 세인테아에 조금 더 협조적인 쪽은 카숄이었으니까.

더 파고 들면 나중에 말을 바꿔서 이번 일을 문제 삼아 카숄의 목줄을 틀어쥘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카숄 역시 그를 감수하고서 어스힐을 치려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인물은 대군주뿐이었다.

카숄 국왕이 눈치를 살피듯 나와 대군주가 있는 쪽을 슬쩍 바라봤다.

지루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아있던 대군주가 하암 하품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칼데릭도 딱히 간섭할 생각은 없답니다. 알아서들 하세요."

그에 카숄 국왕의 얼굴에서 엿보였던 일말의 불안감이 사라지고, 미약한 환희가 피어올랐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스힐과 카숄의 전쟁.

원래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서는 두 국가의 전쟁은 아직 시기가 아니었다.

선포가 뒤고 전쟁을 일으키는 건 더 늦은 것인지, 아니면 내 존재가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키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제 카숄은 로왈프부터 빌미 삼아 하나씩 야금야금 먹으며, 어스힐을 아예 삼켜버리기 위한 전쟁을 벌이려 할 것이다.

두 국가의 국력은 엇비슷하지만 카숄은 게임에서도 다른 세 국가의 병력 지원까지 끌어왔었기에, 어스힐이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기란 힘든 일이었다.

"어쩌시겠소, 롱포드 국왕? 카숄은 이미 전쟁을 각오했소."

어스힐 국왕과 테이르가

카숄 국왕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그의 유일한 걱정은 칼데릭의 간섭이었겠지만, 방금 대군주의 발언으로 그것마저 완전히 불식되었으니까.

카숄이 착각한 것이라면 단 하나였다.

대군주가 칼데릭이 간섭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곧 내 뜻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라는 걸.

나는 두 국가의 전쟁에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 없었다.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나는 어스힐을 지지하겠다."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당황, 경악, 그리고 충격에 찬 시선들이.

카숄 국왕이 말을 잇지 못하고 두 눈만 깜박이다가, 대군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분명 칼데릭은 간섭하지 않겠다고······."

대군주가 고개를 까닥 비틀며 나를 돌아봤다.

"7군주, 난 7군주령의 군사권을 이번 일에 허가할 생각이 없는데?"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칼데릭 외부로의 군사권 발휘는 대군주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했으니까.

나는 대군주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곧 내 말을 이해한 듯 입꼬리를 올리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 흐하하하! 아, 그런 말이었어? 그러면 내가 관여할 건 아니지."

다른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얼떨떨한 얼굴들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군."

나는 다시 카숄 국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대군주의 말대로 칼데릭은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다. 아주 자그마한 병력도, 단 한 명의 기사나 마법사도 동원될 일은 없다."

멍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박거리는 그에게 말했다.

"어스힐 왕국을 지원하겠다는 건 칼데릭이 아니라, 그저 나 혼자뿐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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