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국 회담 (2)
7군주의 행동에 테이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는 해도 이런 자리에서 갑작스레 아는 체를 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놀란 건 테이르뿐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해 못할 상황에 롱포드 국왕은 눈을 휘둥그레 떴고, 세리는 아예 반쯤 넋을 놓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칼데릭의 군주가 뜬금없이 테이르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단 말인가? 대체 무슨 접점이 존재한다고?
집중된 이목 속, 테이르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 우물쭈물거렸다.
그에 7군주가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왕국에는 언제 돌아왔나?"
"······아, 예. 바로 오늘 돌아왔습니다."
테이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7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가던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남기고.
"나중에 다시 보지."
단지 몇 마디 대화일 뿐이었지만 마치 고요한 폭풍이라도 몰아친 분위기였다.
대군주와 7군주가 왕성 안쪽으로 들어가고 자리에는 어수선한 소란이 감돌았다.
'뭐지, 진짜······.'
테이르는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에 서있는 카숄의 인사들 사이에 초르단과 올리비카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 방금 대체 뭐야? 응?"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리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이르는 대답하지 않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제일 혼란스러운 건 그였다.
***
'도착하자마자 바로 마주쳤네.'
나는 어스힐의 국왕을 따라 궁전 안으로 입장하며 테이르에 대해 생각했다.
네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라, 내가 이전에 그에게 남겼던 한마디.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말일 뿐이라 아무것도 안 달라졌어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결국 돌아온 모양이었다.
"7군주, 실례가 아니면 테이르 왕자를 어떻게 알고 계신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그때 어스힐의 국왕이 입을 열었다.
그는 좀 전부터 나를 신경 쓰는 기색이 만연했는데,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 것은 아니오. 그저 5군주령에서 우연히 연이 닿은 적이 있었을 뿐이니."
그리고 아주 고맙기 그지없는 빚을 지다시피하기도 했고.
테이르가 준 지도 덕분에 본래라면 얻지 못했을 초감각의 신비를 얻었으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국왕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만도 하겠다 싶었다.
대체 왕성 밖으로 나가서 뭔 짓을 하고 다녔기에 칼데릭의 군주를 다 마주쳤나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궁전 복도를 걷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일련의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젊은 여인과 초로의 남성,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늙어 보이는, 그들의 가운데 서있는 작은 체구의 노인.
세 명의 뒤로는 몇몇 수행원이나 기사들이 따라붙어 있었다.
"······."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바로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운데의 노인은 세인테아의 황제, 그란디오스.
그 왼쪽에 서있는 남자는 레벨과 외관으로 보아 오성 중 일인인 창성, 퀘이덴.
그리고 오른쪽의 여자는······ 아마 황녀 중 하나일 텐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잠시 걸음이 멈추고, 대군주가 눈웃음을 지으며 전방에 마주 선 그들을 바라봤다.
짧게 이어진 침묵 뒤에 먼저 입을 연 것은 황제였다.
"오랜만이오, 대군주. 방금 막 도착하신 모양이오."
중저음의 갈라지는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는 작은 체구에 전혀 높다고 할 수 없는 레벨을 가지고 있었으나, 확실히 형용하기 힘든 묘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게임에 처음 빙의하고 대군주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약간은 비슷한 감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황제라는 인물 자체에서 대군주만큼의 강대한 격을 느꼈다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왜냐면 어쨌든 황제였으니까.
이 라사 세계관의 메인 스토리 흐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바로 그 용사가 존재하는 세력의 우두머리였으니까.
"그래. 오랜만이네, 황제."
대군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어스힐의 국왕에게는 최소한의 존중은 담아 경어를 썼던 그녀였지만, 황제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도 그에 대해서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그대가 칼데릭의 새로운 7군주겠군. 만나게 되어 반갑소."
아무래도 한눈에 내 정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놀랄 건 없었다. 황제도 나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이것저것 알아봤을 테고, 지금 내가 당장 대군주와 나란히 서있기도 했으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7군주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용사는 이번 회담에도 오지 않은 건가?"
"그렇소. 오지 않았지."
"아아, 아쉬워라. 저번에도 얼굴을 못 봐서 이번엔 기대했었는데 말이야."
대군주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기색으로 그렇게 툴툴거렸다.
"그럼 회담 때 다시 보겠소."
그리고 더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우연한 마주침은 아니었겠지만 황제는 단지 잠깐 얼굴을 보는 게 목적의 전부였던 듯했다.
황제의 옆에 서있던 여인은 나와 대군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창성은 내 뒤에 서있는 아셸을 힐끗 바라봤다.
그렇게 그들은 곁을 지나쳐서 가던 길을 마저 가버렸다.
"······."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꽉 쥔 주먹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들끓는 살기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은 멀어지는 세 사람 중 한 명의 등에 꽂혀있었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창성······.'
그녀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알고 있었다.
창성 퀘이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일족을 몰살시킨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 누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당장 검을 뽑지 않고 덤벼들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아셸."
내가 이름을 부르자 아셸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뭐라도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그냥 관두기로 했다.
고개를 돌리니 대군주가 흥미롭다는 눈길로 그런 아셸을 쳐다보고 있었다.
***
마저 안내를 받아 회담 동안 머무를 숙소로 이동하고, 마침 때였기에 나와 대군주는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국왕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건 어차피 이제 회담의 시작이 곧이었고, 그게 끝난 뒤엔 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긴 식탁에서 대군주와 마주 앉고서 말없이 식사를 하는데, 그녀가 물어왔다.
"7군주의 호위 기사 말이야, 이름이 아셸이라고 했던가? 본래 대군주성의 견습 기사로 들어왔었지?"
나는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속으로 약간 당황하며.
지금까지 별 말 없길래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들어오네.
"참모장이 7군주가 견습 기사 하나를 데려갔다고 하길래, 좀 관심이 있긴 했거든. 그래도 그 정도로 뛰어난 인재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하하. 7군주가 데려가지만 않았으면 흑린에도 충분히 입단할 수 있었을 텐데."
"······."
싱글싱글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지만 어째 조금 탓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고 보니 대군주가 아셸을 처음으로 본 건 중립국으로 출발하기 전 대군주성에서였다.
그녀라면 당연히 처음 봤을 때부터 아셸의 한눈에 수준을 파악했었겠지.
나도 아셸을 빼간 것에 대해선 솔직히 약간 찔리는 마음이 있긴 했기에 그냥 침묵했다.
"카숄이 어스힐에 전쟁을 예고할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슬쩍 회담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자, 대군주가 작게 웃음을 흘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근데 왜?"
"관여할 생각이 있나?"
"아니, 없어. 물론 황제도 그럴 거고."
질문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그런가.
어스힐과 카숄의 전쟁은 메인 스토리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게임에서도 칼데릭과 세인테아는 어느 쪽도 그 전쟁에 간섭하지 않았었기에, 대군주의 의향이야 이미 알고는 있었다.
물론 그들이 전쟁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이유 또한 알고 있었고.
"그런데 7군주는 아까 그 왕자를 꽤 신경 쓰는 것 같던데? 일부러 그렇게 말까지 걸고 말이야. 아까 말했던 우연한 연이라는 게 뭔지 궁금하네~."
"신경 쓸 것 없다."
대군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삭막하다니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군주의 말대로 아까 그 자리에서 테이르에게 말을 걸었던 건 약간 의도한 부분은 있었다.
왜냐면 일단 나는 어스힐 왕국을 도와줄 생각이었으니까.
테이르한테 진 빚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서도 이 전쟁은 결국 어스힐의 승리로 끝났었으니까. 유저 일행의 활약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사실 무엇이 이득인지를 착착 계산하고 하려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스토리가 그랬으니까, 그를 따라서 잠재적인 위험을 최대한 줄이고 싶을 뿐이지.
뭐, 일단 회담이 시작하고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부터 봐야겠지만 말이다.
***
"오라버니, 말 좀 해보라니까? 대체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녔길래 칼데릭의 군주랑 친분을 쌓은 건데! 응?!"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테이르는 옆에서 쫑알거리는 세리를 시끄럽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내 도착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이미 롱포드 국왕이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다른 남자가 서있었는데, 그의 형이자 1왕자인 루커스였다.
"······어서 와라."
"어, 응."
루커스의 어색한 인사에 테이르도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롱포드가 작게 혀를 차며 턱짓을 했다.
"앉거라."
"······아뇨. 그냥 서있겠습니다."
테이르는 루커스의 반대편에 거리를 두고 섰고, 세리도 그 옆에 슬며시 섰다.
잠시 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복잡한 눈빛으로 테이르를 바라보고 있던 롱포드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테이르, 내 아들아. 너는 대체 바깥에서 뭘 하고 돌아다닌 것이냐?"
"······."
"7군주가 말하기로는 5군주령에서 우연히 연이 닿은 적이 있었다고 하더구나. 좀 설명해줄 수 있겠느냐?"
"예, 뭐······."
테이르는 순순히 7군주와 관련해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자신의 팔을 짜르려 했던 미친 영애 이야기부터 술술 전부.
그렇게 사정을 모두 들은 세 사람은 하나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게 전부냐?"
방금의 이야기에서 7군주가 테이르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세리가 조금 흥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무려 칼데릭의 군주잖아요. 이유가 뭔진 몰라도 오라버니를 좋게 본 거라면······."
"그게 문제라는 거다. 의중을 알 수 없으니 더욱 조심해야지.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위험한 자들이야."
루커스의 말에 테이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7군주에게 별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마 고작 그 지도 때문은 아닐 거고.'
물론 말마따나 결국 이유를 알 수가 없기에 이해되는 반응이기는 했다.
심란한 기색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던 롱포드가 다시 물었다.
"테이르, 네가 보기에 7군주는 어떤 인물이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