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80화 (80/189)

암영 프레온 (3)

역시 세인테아 쪽이었나.

칼데릭에, 그것도 군주성에 직접 첩자를 들여놓을 생각을 할 세력은 그쪽 말고는 딱히 없었다.

그리고 기억하기로 암영은 황실의 의뢰를 여러 차례 수행하며 그쪽과 줄이 꽤 긴밀하게 닿아있는 인물이었고.

나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성에 잠입한 목적은?"

"7군주님에 대한 정보 수집이요."

"황실이 어째서 그런 의뢰를 요청했지?"

"저야 보수만 받고 의뢰를 수행하는 거라 자세한 이유는 몰라요. 그런데 뭐······ 알려진 정보 하나 없이 베일에 쌓인 사람이 칼데릭의 새로운 군주가 됐는데, 당연히 세인테아에서도 한번 조사해볼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뭐, 그렇긴 하지.

암영에게까지 의뢰를 요청해가며 7군주성에 첩자를 들였는데, 목적이 나에 대한 것 말고는 달리 뭐가 있겠는가?

나는 더 캐묻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가 불안 섞인 얼굴로 그런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배후가 세인테아라는 것은 크게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칼데릭이든 세인테아든 서로 진영에 쉬지 않고 첩자들을 심어놓는 거야 일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군주성에까지 첩자가 잠입한 건 꽤 심각한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과 같은 경우는 딱히 성의 경계 태만을 탓해야 할 문제는 아닐 것이었다. 왜냐면 상대가 암영이니까.

"저, 군주님. 제가 말씀을 조금 드려도 될까요?"

그때 그녀가 눈치를 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를 한눈에 알아보신 걸로 보아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저에 대해서 이것저것 잘 알고 계신다고 생각됩니다만, 저는 어느 세력에도 속해있거나 얽혀있지 않습니다."

"······."

"이번 일도 정말 철저히 사무적으로 황실의 의뢰를 받아든 것뿐이지 개인적인 의도 따윈 추호도 없었고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걸려버린 이상에야 할 말이 뭐가 있겠냐만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혀가 길어지기에 말을 끊었다.

"조만간 중립국 회담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곳에서 제가 황실의 의뢰를 받고 군주성에서 첩자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전부 자백 진술할 수도 있습니다. 제 목숨에 조금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만 한다면······."

그녀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중립국 회담에는 세인테아 측에서도 황제가 직접 참여하니, 그들을 대놓고 쥐어짤 강력할 명분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참나······.'

암영의 대충 이런 성격의 캐릭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한.

그러니까 이렇게 의뢰주를 팔아넘기는 데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는 것이고.

뻐기는 건 안 통하겠다 싶었는지 어떻게든 당장 목숨부터 연명하고 보자 판단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은 그닥 끌리는 내용이 아니었다.

왜냐면 내가 세인테아를 압박한다고 해서 딱히 얻을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내 다음 목표에 도움이 될 것도 하등 없고.

난 지금 다른 무엇보다도 암영, 그녀의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되나.'

첩자질이야 당장 목이 떨어져도 차고 넘칠 죄목이긴 했지만, 일단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야 이만한 인재를 그냥 처형해버리는 건 아까웠으니까.

뛰어난 정보 수집과 추적 능력에, 67이라는 레벨만큼 상당한 전투력에, 대륙에서 그녀만큼 발이 빠르고 온갖 다양한 재주에 능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게임 스토리에서 딱히 조력자 역할을 한 적 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빌런 짓을 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마침 슬슬 뛰어난 정보원이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여태까지는 신비 찾기에 집중했었지만 이제 앞으로의 목표는 본격적인 메인 스토리와 관련된 것이다.

미래에 발생한 사건들, 내 게임 지식으로도 해결이 부족한 몇몇 중대한 사항들에 대해선 정보 조사가 필요했다.

단지 문제는 그녀가 내가 밑에 두고 다룰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

어디 가서 정보라도 수집하라고 풀어놓으면 그대로 도주해서 종적을 감춰버릴 테니 말이다.

'문제는 잡아두고 다룰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없다는 건데.'

어디 정보라도 수집하라고 풀어놓으면 그대로 도주해서 종적을 감춰버릴 테니 말이다. 아니면 뒷통수를 맞거나.

그 이름이나 이명이 전 대륙에 널리 퍼져있는 자들은 괜히 그만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어중간한 협박이나 약점 잡기로 부려먹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말만 하면 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저자세로 나오고 있지만, 전부 어떻게든 살아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겠지.

'······아.'

고민에 잠겨있던 나는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 있어 더없이 유용할.

"일단 너를 죽일 생각은 없다."

"······정말이신가요? 감사합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말 앞에 '일단'이 붙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불안감은 정확히 맞았다.

"낙인 반지."

"······예?"

"네가 가지고 있는 고대의 유물 말이다. 당연히 지금 가지고 있겠지. 꺼내라."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한순간일 뿐이었고 곧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낙인 반지······? 고대 유물? 죄송한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참 대단한 연기력이다 싶었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할 물건의 존재를 입에 담았는데도 이런 반응인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소용없다, 그렇게 잡아떼도. 내가 어떻게 이 이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

"아셸, 내가 셋을 세기 전에 이 여자가 아무것도 꺼내지 않으면 목을 베어라."

아셸이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하나."

나는 팔짱을 낀 채 나지막하게 카운트를 뱉었다.

그리고 둘을 세기 전에 그녀의 입이 다시 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혼란스러운 시선이 함께.

"······대체 뭐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유물에 대해서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어서 꺼내기나 해라."

고대 마법의 황금기에는 현재는 실전된 온갖 종류의 마법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낙인 반지, 그것은 누군가에게 무슨 수로도 지울 수 없는 마력 낙인을 남길 수 있는 고대의 유물.

그리고 반지의 소유자는 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낙인이 찍힌 대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암영이 그 유물의 능력을 활용하는 건 게임에서 나온 적이 있었기에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녀가 더없이 굳은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내가 낙인 반지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둘째치고, 이 타이밍에 그걸 꺼내라는 이유를 그녀도 짐작 못할 리는 없었으니.

"자꾸 경고하기도 지치는군. 그냥 이대로 죽겠느냐?"

"······."

하지만 결국에는 거의 울상이 돼서 로브 품에서 반지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가 꺼낸 반지를 받아들고서 이리저리 살펴봤다.

때가 낀 낡은 은반지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육각형의 문양이 하나 작게 새겨져있었다.

"자."

아셸에게 건네주자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나는 마력이 없기에 유물의 능력을 활성화시킬 수가 없었다.

"마력을 주입하면 유물의 능력이 활성화될 거다. 한번 해봐라."

"아, 예."

아셸은 왜 굳이 자신에게 시키는지 의아한 기색이면서도, 더 묻지 않고 순순히 내 말대로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반지에 새겨진 육각형 문양에서 자색의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나왔다.

나는 암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디에 찍겠나?"

"······손목이요."

그녀가 한쪽 팔을 힘없이 내밀었다. 반쯤 해탈한 얼굴이었다.

아셸이 엉거주춤 빛이 뿜어져나오는 반지를 가져가서 그녀의 손목에 도장처럼 찍었다. 그러자 반지의 문양대로 자색의 육각형 문양이 새겨졌다.

나는 다시 아셸에게서 반지를 받아들고서 살펴봤다.

반지에서 얇고 희미한 빛살이 뿜어져나와 정확히 그녀가 있는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좋아.'

나는 만족스럽게 반지를 챙겼다.

이제 그녀가 어디에, 얼마나 멀리 있든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이제 평생을 내게서 도망칠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방금 찍은 마력 낙인은 또 다른 대상에게 사용하기 전까지 영원히 그녀에게 남아있을 테니까.

멍하니 손목의 낙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침울해하지 마라. 시키는 일만 제대로 수행한다면 널 죽이지 않겠다 맹세하지. 그리고 반지도 다시 돌려주고."

그녀가 날이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한테 선택권이 있기야 한가요. 원하시는 게 뭔데요?"

"정보 수집이다."

가장 먼저 시킬 생각인 건 세인테아 제국의 수도 테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전에 할루멘타에서 선점하는 데에 실패했던 빙의의 신비. 그 신비를 얻은 빌런이 일으킬 끔찍한 재앙.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사건들 중 피해의 단위가 가장 큰 재해였기에 그것부터 조사시킬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아주 뛰어난 정보원 한 명을 얻었다.

***

그녀는 내 요구에 따라서 곧바로 조사를 위해 세인테아로 떠났다.

뇌후도 그렇고 왠지 요즘 들어서 여기저기 협박을 많이 하고 다니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도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서 내 나름대로의 노력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는데.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리프는 정식으로 군주성의 기사 작위를 받았고, 리곤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가 26레벨에 도달했다. 아셸은 자신의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는 한편 그런 두 남매를 계속 열심히 가르쳤다.

언제나와 같이 방에 박혀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대군주성으로부터의 소식을 받을 수 있었다.

'사흘 뒤에 출발인가.'

이제 슬슬 회담을 위해 중립국으로 이동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준비를 마친 뒤 띠용이를 타고 대군주성으로 날아갈 준비를 했다.

"너는 성에 남아서 계속 남매의 지도에 집중하면 된다."

리곤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았기에 이번에도 굳이 아셸은 데려가지 않고 성에 남겨두고 갈 생각이었지만······.

"······저도 데려가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조금 놀라서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가 내 명령과 반대해서 스스로의 뜻을 주장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세인테아 때문인가?'

이번 회담은 두 중립국 사이의 갈등을 논의함과 동시에, 세인테아의 황족들과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자리였다.

나는 고개를 숙인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겠다. 그럼 동행하지."

그렇게 나는 아셸을 데리고 띠용이가 있는 우리로 향했다.

이미 하인들에게 시켜서 안장은 모두 착용시킨 상태였다.

그르릉.

여전히 머리를 들이밀며 치대는 녀석의 목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아셸과 함께 등 위에 올랐다.

녀석은 다른 사람이 같이 탄 게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몇 번 칭얼거리듯 몸을 흔들고는 더 난리를 치진 않았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군주님."

"그래."

언제나처럼 집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띠용이를 툭툭 두드렸다.

녀석이 힘찬 포효와 함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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