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영 프레온 (2)
세인테아의 수도, 켈리아로드.
로브를 걸친 한 남성이 인적 없는 어두운 골목길을 걷고 있다.
남성은 이내 벽면에 그려진 희미한 문양을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본 그가 입을 열었다.
"나와라."
스으으.
그러자 남성의 뒤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기척 하나 없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남자와 마찬가지로 로브를 걸치고 있는 장신의 여인이었다.
밤하늘에 떠오른 반월을 올려다본 그녀가 입꼬리에 호선을 그렸다.
"황실의 의뢰를 받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슬리안 공."
그녀가 입을 열고 나서야 존재를 알아챈 남자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불쾌함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쯧 혀를 찼다.
암영.
대륙에서 여인을 부르는 이름은 많고도 다양했지만, 가장 잘 알려진 이름은 그것이었다.
그림자처럼 어둡고, 잡히지 않으며, 어둠 속에선 어느샌가 모습을 감춰버리는 이명 그대로와 같은 존재.
"그래서, 이번 의뢰는 뭘까요? 암살 의뢰는 여전히 받지 않고 있으니 그쪽이 목적이면 그대로 돌아가주시면 된답니다."
남자는 그녀의 여유로운 태도가 거슬렸지만 이곳까지 걸음한 목적에 집중했다.
"칼데릭의 7군주에 관한 것이다."
여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원하는 건 정보다. 7군주의 성에 잠입을 하든 어쩌든 그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면 된다."
"흐응, 정보 수집이었나요. 그것도 이번에 새로이 즉위한 군주에 관한 정보라······."
그녀가 씩 미소를 지었다.
"권성도 그의 손에 죽었다고 하죠? 세인테아 출신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나돌던데 말이에요."
그에 남자의 인상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소문 같은 게 나돌 리 없다. 권성이 새로운 7군주의 손에 죽었다는 건 아직 세인테아의 고위층들만 짐작 식으로 아는 사실.
여인은 그것을 알면서도 능청스레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거대 정보 단체와도 맞먹을 정도의 정보력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그녀였으니.
"아하하, 죄송해요. 아무튼 그런 의뢰라면 이번엔 값을 좀 많이 지불하셔야겠는걸요? 무얼 챙겨오셨을까요?"
남자가 아무런 대답 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어서 여인을 향해 던졌다. 돈주머니.
그 안에는 무려 10닢이 넘는 백금화가 들어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여인이 휘파람을 불고는 돈주머니를 품에 갈무리했다.
의뢰를 수행하지 않고 그냥 들고 튀어도 이상하지 않을 어마무시한 금액의 선수금.
하지만 돈을 건넨 남자는 그에 대해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 금액에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를 무너뜨리고 황실과 척을 지려고 할 리 없었으니.
"그럼 먼저 가볼게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1년 내로는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뵙도록 하죠."
여인이 벽면에 그려진 문양을 손가락으로 슥 문질러 지웠다.
스르륵.
다시 한 번 좀 전과 같은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여인의 모습은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쳐다보고 있던 남자도 이내 걸음을 옮겨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의 은밀한 접선은 하늘에 떠오른 달만을 목격자로 남긴 채 끝났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칼데릭.
"케이트, 종이랑 펜 챙겨서 따라나와라."
"예? 종이하고 펜은 갑자기 왜?"
"오늘 기사 시험 있잖냐. 그거 기록 담당한 레피 씨가 몸살 앓고 누워서 너랑 내가 해야겠다. 잔말 말고 빨리 나와."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여인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속으로는 욕을 뱉으며.
'아이씨, 귀찮게.'
이전에 골목에서 봤을 때와 완전히 다른 외모를 하고 있는 그녀의 정체는 바로 암영이었다.
7군주령 엔록으로 와서 이곳 군주성에 들어온 지도 몇 개월.
온갖 재주가 많은 그녀에게 행정관 신분으로 성에 잠입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헉······ 군주님께서 직접 나오셨잖아?"
상관을 뒤따라서 이동한 연무장에는 이미 수많은 기사들이 모여있었고, 심지어 7군주까지 나와있었다.
작게 중얼거리는 상관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인은 7군주가 앉아있는 단상을 슬쩍 곁눈질로 살폈다.
'7군주······.'
성에서 지낸 지도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 7군주에 대해서 얻은 큰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면 그는 성에 있는 것보다 바깥을 나도는 시간이 훨씬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방랑벽이라도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알아낸 건 단지 종족, 성별, 외모적 특징, 그리고 성의 관리들에게 딱히 위세를 부리지 않는 유한 성격이라는 것 정도일까.
그리고 최근에 6군주를 죽이며 군주들의 긴급 소집까지 열린 엄청난 대사건이 있었지만, 그에 대해선 아무리 그녀라도 깊게 파고드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멀쩡히 살아돌아온 걸까. 분명히 죽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래서 근래에는 7군주가 6군주를 죽인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되는 리프 남매에 대해 조사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최근엔 그의 호위이자 굉장한 실력자로 짐작되는 아셸이 직접 도맡아 남매에게 검술 지도까지 하고 있었다.
7군주가 그들 남매에게 명백히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었고, 당연히 무언가 있다는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성에서 머물며 더 캐낼 건 없으니 조만간 6군주령의 수도로 향해 그들 남매의 과거를 본격적으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그녀는 신경은 7군주에게 기울인 채 결과를 기록했다.
그중에는 리프도 있었는데 그녀는 다른 견습기사들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어렵지 않게 시험을 통과했다.
슬슬 그렇게 시험이 끝나갈 즈음 그녀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슬쩍 돌리니 어째서인지 7군주가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
뭐지?
순간 의아함과 영문 모를 불길함이 솟아올랐지만, 그녀는 일단 깜짝 놀라며 다급히 고개를 숙이는 척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자니 서서히 주위의 소란이 멎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정적과 함께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주위의 시선은 모두 이쪽으로 모여있었다.
"······."
무언가 단단히 틀어졌음을 인지한 그녀는 미약하게 굳은 얼굴로 7군주를 바라봤다.
그가 이쪽을 가리키고서 입을 열었다.
"첩자다. 잡아라."
***
촤앙!
철혈 기사단의 단원들이 내 말과 동시에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고, 다른 기사들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 양옆에 서있는 아셸과 철혈 기사단장도 굳은 얼굴로 검을 든 채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곧 연무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기사들 전원이 그녀에게 검을 겨눈 상황이 되었다.
"어, 어어? 헉!"
여인의 옆에 서있던 다른 행정관은 얼빠진 얼굴로 서있다가 기겁하며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완전히 낭패라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잠깐."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
그녀가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계시나요? 제가 오늘 먹은 점심 메뉴가 뭔지?"
"······."
하지만 이어진 말은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헛소리였다.
그에 기사들도 이게 갑자기 뭔 개소리인가 싶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 여자 맞네.'
저건 그냥 한순간이라도 기사들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한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일 뿐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건······.
화아아악!
갑작스레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나온 안개가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었다.
해가 중천에 떠있음에도 아예 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칠흑의 안개가.
"······첩자가 도주한다! 잡아라!"
누군가 소리쳤지만 안개에 둘러싸인 기사들은 그 안에서 우왕좌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아셸과 철혈 기사단장이 곧바로 연무장으로 뛰어들며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두 갈래의 거대한 검풍이 안개를 갈라버리고 시야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여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온데간데 없었다.
아셸조차 도주한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미간을 좁힌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나는 초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그녀의 능력이 무엇인지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곧 감각에 걸려들었다. 모습을 감춘 채 빠르게 멀어지고 있는 기척 하나가.
'더럽게 빠르네.'
나는 곧바로 공간 도약을 연달아 사용해서 연무장 한쪽 허공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부동 장막을 펼쳤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고, 내 장막에 가로막혀 충돌한 그녀는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껙······."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그녀의 목에 검날이 겨누어졌다.
어느새 따라붙은 아셸이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이어서 몰려든 기사들도 주위를 완전히 에워싸고서 빠져나갈 틈 하나 없이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녀가 조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굴하게 웃으며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렸다.
"하, 항복. 항복이요."
바닥에 착지한 나는 마무리된 상황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외가 담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은 무시하며.
'암영······.'
그래서, 이 여자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
상황을 정리하고서 나는 아셸과 함께 여인을 내 방까지 끌고 왔다.
반대편 자리에 앉히고서 나는 가만히 그녀와 마주 앉았다.
연신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말했다.
"네가 무슨 술수를 부리든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암영."
"······."
"몸을 숨기는 그 신비도 사용해봤자 소용없다. 다시 도주를 시도하면 그때는 바로 목을 벨 테니 단념하도록."
검은 안개 속에서 아셸조차 그녀를 잡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은신의 신비 때문이었다.
나야 초감각이 있어서 어떻게든 몸을 숨기고 도망치는 걸 캐치할 수 있었지만.
정체와 능력까지 단번에 간파당했는 줄은 몰랐는지,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날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 뭐 이런 괴물한테 걸려서······."
이제야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된 것 같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가장 먼저 물었다.
"누가 보냈지?"
암영 프레온.
이 대륙에서 가장 신출귀몰한 존재를 꼽으라면 반드시 한 손에는 꼽을 수 있을 인물.
대륙 최고의 정보원이자 도둑이기도 한 그녀는 지금과 같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첩자 활동도 밥 먹듯 하곤 했다.
그녀 정도 되는 인물을 부릴 수 있는 세력이야 어차피 몇 곳 있지도 않으니 대충 짐작은 가는데······.
그녀가 반쯤 체념한 기색으로 물었다.
"말하면 살려주실 건가요?"
"일단 말해라."
"원하신다면 전부 불 수야 있는데, 그 전에 저를 어떻게 하실 건지부터 알고 싶은데요. 그 전에는 죽어도 입을 안 열 겁니다."
"그럼 죽어야지. 아셸."
내 말에 옆에 서있던 아셸이 검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입이 바로 열렸다.
"······세인테아 황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