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번 (2)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내 말에 뇌후가 작게 코웃음을 치고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와이번.
이놈의 까다로운 특성은 물론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었기에 원래부터 잘 알고 있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와이번을 얻는 퀘스트는 몇몇 유저들의 키보드를 부숴먹게 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었으니까.
심지어 뭔 히든이나 특별 퀘스트도 아니고, 그냥 스토리를 거쳐가면서 탈것을 얻기 위해 당연히 클리어해야 하는 퀘스트였는데도 말이다.
한창 라사에 미쳐서 하루에 자는 시간만 빼고 종일 플레이했을 적의 나도 꼬박 사흘은 밤새워 겨우 얻었을 정도니 오죽할까.
'솔직히 허탕만 칠 확률이 더 높을 것 같긴 한데.'
그럼에도 애매하게 남은 시간 동안 빈둥거리고만 있기 아까워 찾아가고 있는 거긴 했지만, 사실 이유 하나가 더 있었다.
게임에서 내가 획득했었던 와이번.
몇십 분은 고민해서 '띠용'이라는 입에 착 감기는 이름을 붙어줬던 그 녀석.
녀석이 서식했던 장소가 마침 공교롭게도글라이드 현재 향하는 목적지인 글라이드 산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 찾아가도 같은 장소에 그놈 둥지가 있으려나?'
호기심이 솟아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놈이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도 다른 네임드 NPC나 몬스터들처럼 멀쩡히 존재할지, 그리고 나와 마주친다면 날 주인으로 인정할지.
그래도 이왕 와이번을 얻는다면 게임에서도 함께했던 녀석을 얻고 싶긴 했으니 말이다.
"하나만 묻죠, 7군주."
그때 뇌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6군주를 죽인 진의가 대체 무엇이죠?"
타오르는 모닥불에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집에서 이미 말했을 텐데."
"누가 그걸 묻는 건가요? 당신의 그 잘난 최선의 판단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것이지 않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하, 헛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대군주께는 말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죠. 그래서 당신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결정하신 모양이지만, 나는 절대로 당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야 어련하실까.
나는 그녀에게 역으로 물었다.
"너는 첫 군주회의 때부터 계속 내게 반감을 드러냈었지. 달리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능력도 신원도 확실치 않은 외부인을 지고한 군좌에 다짜고짜 앉히다니, 아무리 대군주의 결정이라 해도 거기에 순순히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
"결국 당신은 6군주까지 죽이며 질서에 큰 혼란을 일으켰죠. 그러니 나는 여전히 내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당신의 알 수 없는 괴이한 능력 때문에 라크시아를 잃긴 했지만······."
말하다가 또 화가 끓는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잇는다.
"다른 군주들이야 어떤지 몰라도 난 진심으로 칼데릭의 안정을 원합니다. 물론 오늘 당신에게 다짜고짜 찾아가서 그런 식으로 막말을 퍼붓고 따진 건 실책이었어요. 하지만 내 개인적인 증오를 빼놓고 봐도, 당신은 칼데릭에 있어 불안하기 그지없는 요소라는 말입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는 뇌후는 확실히 아까 성에서와 달리 냉정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이 어느 정도는 진심이라는 건 알았다.
선악의 성향을 떠나서, 게임에서도 그녀는 진심으로 칼데릭의 평화를 바라는 인물로 나오긴 했었으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대군주나 다른 군주들이 워낙 상식 밖인 거지, 뇌후가 특별히 깐깐하거나 까다로운 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이 보다 평범한 이들이었다면 애초에 내가 군주가 될 수나 있었겠나?
"말했다시피 내게는 아무런 꿍꿍이도 없다."
뇌후가 바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걸 신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짧은 대화는 거기서 끝나고, 더 이상 오가는 말은 없었다.
***
날이 밝고 이동은 계속되었다.
글라이드 산맥에 도착하기까지는 뇌후가 말했던 대로 정확히 닷새가 좀 안되게 걸렸다.
'오.'
글라이드 산맥은 지나치며 봤던 다른 산맥들보다 독특한 경관이었다.
특히나 다른 산맥들보다 자잘하게 솟아난 봉우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유롭게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고 나는 곧 열심히 눈을 굴렸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녀석의 둥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와이번은 무리 생활을 하지 않고 철저히 단독 생활을 하는 생물이라 했다.
그런 놈들의 거처를 둥지라고 하는데 보통은 동굴 같은 장소였다.
지금 내가 찾아야 할 띠용이의 둥지도 꽤 큰 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위치가 분명 그 암벽의 한가운데였었지.
키아악!
그때 난데없이 들려오는 괴성과 함께 아래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해왔다.
거대한 화이트 와이번이 이쪽을 향해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고 있었다.
'오.'
벌써부터 마주한 와이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놈은 우리를 공격할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뇌후의 와이번과 호위기사의 와이번도 포효를 내뱉었다.
아예 육탄 박치기를 할 생각인 듯 돌진해오는 놈에게 호위기사가 마력을 일으키더니 팔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그러자 넓게 파진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쳐서 놈을 강타했다.
놈은 중심을 잃고 잠시 허공에서 휘청거리다가 곧 방향을 돌려서 황급히 도망가버렸다.
'허.'
나는 조금 황당한 눈으로 그 빠른 태세 전환을 바라봤다.
와이번은 기본적으로 사납고 포악하지만 영리한 만큼 눈치도 빨랐다.
공격을 맞자마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강자라고 판단하고 내뺀 것이리라.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광할하게 펼쳐진 산맥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았다.
다행히 녀석의 둥지가 위치한 곳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면 특히 산맥에서도 굉장히 눈에 띄고 이질적인 지형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크고 평평한 암벽.'
마치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생긴 그런 암벽 지형이 이 산맥에는 존재했다.
그리고 둥지가 위치한 곳은 바로 그 근처였다.
아마 이렇게 위에서 날아다니면서 보면 멀리서부터 한눈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서 호위기사에게 물었다.
"나무 그루터기처럼 생긴 거대한 암벽을 알고 있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럼 별 수 없지.
나는 다시 말했다.
"방금 말한 지형을 찾을 때까지 산맥을 크게 돌아보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와이번을 타고 신비를 찾을 때도 지겹게 했던 장소 찾기가 시작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훨씬 빠르고 편할 것이라는 점이었지만.
둥지를 찾는 와중에도 각양각색의 와이번들이 간간이 모습을 비추었다.
대부분은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갔지만, 몇몇은 아까의 화이트 와이번처럼 덤벼들기도 했다. 그런 놈들은 마찬가지로 호위기사가 전부 쫓아냈다.
게임에서 와이번은 비늘의 색에 따라서 총 5종류로 구분됐었다.
그린, 블루, 레드, 화이트, 그리고 블랙 와이번.
단지 색깔만 다른 게 아니라 놈들은 명백히 다른 특징이 있었다.
개체에 따라서 다 다르긴 하지만, 그린에서 블랙으로 갈수록 평균적으로 훨씬 몸집이 크고 강하며 성질도 더러웠다. 또한 희귀했고.
그래서 게임에서도 블랙이 와이번 중에는 능력치가 가장 뛰어났지만, 그만큼 찾고 길들이는 난이도도 가장 높았었다.
내가 게임에서 타고 다녔던 띠용이 역시 블랙 와이번이었다.
색에 따른 능력치 차이가 게임 내에서는 그렇게 유의미할 정도로 크진 않았었지만, 이왕이면 최고의 와이번을 타고 다니고 싶었기에 참 고생해서 잡았었지.
"······7군주! 와이번을 잡겠다면서요?"
우리가 착륙할 생각 없이 계속 날아다니고만 있자 옆에서 날고 있는 뇌후가 소리쳐 물었다.
"찾는 장소가 있으시다고 합니다!"
내가 입을 열기 전에 호위기사가 대신 대답했다.
뇌후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날 흘겨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저게 말씀하신 장소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탐색을 시작한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곧 그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 한가운데에 홀로 주위에 어우러지지 않게 위치해있는 거대한 바위 암벽.
그 테두리를 따라서 천천히 비행하며, 나는 초감각으로 시야를 최대로 강화시켜 암벽면을 샅샅이 훑었다.
'······찾았다.'
그리고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암벽의 정확히 한가운데 높이에 위치한 큼지막한 동굴 하나가.
"저기로 내려가지."
내 요구대로 호위기사는 그 굴의 입구에 착륙했다.
뒤따라 착지한 뇌후도 굴을 의아한 눈으로 둘러봤다.
"······아는 장소인가요? 대체 뭘 하려고 이런 곳에 찾아온 건데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기대감을 품은 채 굴 안쪽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왜냐면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통로는 짧았고, 곧 시야에 나타난 건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누워있는 검고 거대한 생물체였다.
"······블랙 와이번이군요."
뇌후와 호위기사도 와이번을 발견하고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크르릉.
나는 동굴이 떠나가라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와이번을 빤히 쳐다봤다.
'······얘가 띠용이 맞나?'
뭐, 아마 맞겠지?
솔직히 외관으로 구분할 방법은 없었다.
왜냐면 게임에서 와이번마다 각각 외관이 다른 것도 아니고 당연히 다 통일됐었는데, 어떻게 그걸 알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 동굴에서 둥지를 짓고 있는 블랙 와이번이라면 녀석 외에는 없을 것이었다.
"······."
잠시 그렇게 묘한 기분을 느끼며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니, 이내 코골이가 멈추고 녀석이 눈을 떴다.
그리곤 쩍 하품을 하더니 길게 쭉 찢어진 동공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뒤에서 뇌후가 약간의 조소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블랙 와이번을 길들인 사람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없다는 걸 아나요? 보나마나 실패하겠죠."
녀석이 천천히 다가오는 나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만 있더니, 이내 그 거체를 일으켰다.
날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바로 공격부터 날려올 게 뻔했기에 방어할 준비를 했다.
나와 녀석의 거리가 열 걸음도 되지 않게 좁혀졌다. 그리고······.
그르릉.
"······?"
녀석이 순한 울음소리를 내며 내게 먼저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 품에 억지로 거대한 머리를 파묻으려 드는 놈을 나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쓰다듬었다.
'얘 뭐지?'
아무래도 바로 주인으로 인정받은 듯했다.
그래도 내가 알기로 처음부터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그것도 성질 더러운 블랙 와이번이 말이다.
"어······."
그 광경에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뇌후도 당황스러움이 섞인 얼떨떨한 탄성을 뱉었다.
나는 생판 처음 본 내게 더없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녀석을 보며, 왜인지 모르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이 내가 게임 속에서 타고 다녔던 와이번 띠용이가 분명히 맞다고.
'반갑다, 야.'
나는 약간의 반가움을 느끼며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계속 나한테 머리를 들이미는 녀석의 목 부근을 열심히 쓰다듬어주며.
이걸로 와이번은 성공적으로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