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75화 (75/189)

와이번 (1)

"잠깐만."

뇌후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내 와이번으로 7군주 당신을 글라이드 산맥까지 데려가라는 겁니까?"

"그래."

"내가 어째서······!"

그녀는 항의를 하려다가 곧 도로 입을 다물었다.

바로 방금 전 대화한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녀에게 도움을 받으면 정령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는 말.

"산맥까지 데려다주면······ 그 정령의 위치를 알려주겠다는 건가요?"

잠시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기대감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지. 고작 이 정도 도움이 정보의 가치와 무게가 맞는다고 생각하나?"

뇌후의 힘을 빌릴 기회를 고작 와이번 왕복 한 번으로 퉁칠 생각은 없었다.

언제 한 번 크게 써먹기 전까지는 이런 자잘한 도움들은 최대한 많이 받아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정보를 미끼로 걸고 있는 이상 그녀는 사소한 부탁쯤은 거절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나올 생각이었군요? 언젠가 한 번 큰 도움을 받기 전까지 날 계속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고?"

"······."

어라.

그런데 단번에 간파당해버렸다. 그래도 역시 군주는 군주인 모양.

하지만 뭐 눈치챈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뇌후에게 난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거절할 건가?"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려는 듯, 눈을 감고서 깊은 한숨을 내쉰 뇌후가 물었다.

"난데없이 그곳에는 왜 가겠다는 거죠?"

"와이번을 잡으러 간다."

"굳이 내게 데려가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편이 빠르니까."

원래 글라이드 산맥에는 회담에 다녀온 다음 갈 생각이었다. 남은 시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안에 다녀올 수 있다면 당장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회담까지는 푹 쉬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솔직히 며칠 쉬고 나니 벌써부터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진 참이기도 했고.

전부 결과적으로는 목숨이 걸린 문제라 그런가, 아니면 얼마 전까지 너무 열심히 신비를 찾고 다녀서 관성이 붙은 건가.

내가 원래 이런 부지런한 성격은 절대로 아니었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이니 준비하고 있어라, 2군주."

뭐, 할 일이 태산인데 살아남으려면 잠시도 쉴 틈 없이 움직이기는 해야지.

요 며칠 동안 짧게나마 만끽했던 여유도 이것으로 끝이었다.

***

"글라이드 산맥이라면······?"

"와이번들이 서식하는 곳이다."

뇌후와 대화하는 사이, 위층에서 계속 리프 남매를 살피고 있던 아셸이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갑자기 와이번들의 서식지로 향하겠다는 내 말 때문이었다.

"와아······."

한쪽에서 명상이라도 하는 듯 정좌를 하고 있던 리곤이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와이번이라는 말에 관심이 쏠린 모양. 하지만 물론 데려갈 수는 없었다.

집사장에게 시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섰다.

성안에 위치한 공터에 뇌후와 한 푸른색 갑주를 걸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각각 서있는 거대한 2마리의 생물체, 와이번.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위기사도 함께 왔었나?'

【Lv. 83】

레벨도 아셸보다 무려 2레벨이나 높은 강자였다. 거기다 와이번까지 타고 다니는 모양.

뇌후의 가문이야 워낙 거대한 가문이니 이상할 건 없었지만······.

'그나저나 생각보다 훨씬 크네.'

【Lv. 67】

【Lv. 62】

가까이서 보니 와이번의 크기는 훨씬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만큼 레벨들도 상당했다.

더 레벨이 높은 뇌후의 와이번은 그녀와 상반되게 붉은색이었고, 호위의 와이번은 초록색이었다.

뇌후는 나를 보고 멀리서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채였다.

그르르.

그러자 그녀의 와이번 역시 내게 적의를 드러내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주인의 감정을 읽고 나를 적으로 인식이라도 한 건가? 똑똑하다.

뇌후가 와이번의 목 아래를 쓰다듬으며 녀석을 얌전하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

"대체 내가 왜 이딴 일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기다리고 있는 동안 생각해보니 더 분노가 올라왔는지 목소리가 사나웠다.

군주를 뭔 배달부 비슷하게 써먹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2명씩 타고 가면 되겠군."

원래 아셸까지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와이번도 2마리니 상관없을 듯했다.

그런데 뇌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2명씩? 지금 내 와이번에도 사람을 태우겠다는 말인가요?"

"안 보이나?"

나는 날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온 아셸을 가리켰다.

뇌후가 아셸을 바라보고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때 뇌후의 호위기사가 나서서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7군주님, 두 분 모두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와이번을 쳐다봤다.

3명이 함께 타도 상관없을 정도로 크긴 하지만······ 그래도 둘씩 타는 게 낫지 않나?

다시 뇌후를 쳐다보니 그녀는 완전히 질색하고 있다가 안도한 기색이었다.

자기 와이번에 다른 사람을 태우기가 싫은 건가, 아니면 그냥 다른 사람이랑 함께 타는 게 싫은 건가.

그녀라면 격이 떨어진다 생각해서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혹시 성에 3인용 안장이 있습니까? 있다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호위기사의 물음에 곁에 서있던 집사장이 걸음을 옮기려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말렸다.

"됐다. 그냥 나 혼자서 가지."

굳이 아셸까지 동행시킬 필요는 없긴 했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보름 안으로는 돌아올 테니, 그동안 남매를 잘 지도하며 기다리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호위기사의 안장은 원래부터 2인용이었기에 안장을 교체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지금처럼 손님을 태우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2인 안장을 타고 다니는 듯했다.

"쉬이, 착하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대놓고 싫은 기색을 보이는 와이번을 호위기사가 목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이게 바로 와이번을 가축처럼 사육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였다.

워낙에 강하고 사나워서 포획부터가 매우 어렵지만, 와이번은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인물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따르지 않으니까.

지금껏 많은 이들이 와이번을 길들이려고 들었다가 시작부터 실패한 이유가 하나같이 똑같기도 했다.

포획해서 가둬놓으니 굶어 죽을 때까지 먹이를 먹지도 않거나, 그냥 스스로 자해해서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과 동승하는 게 아니면 다른 와이번을 빌려타는 것도 불가능하지.'

와이번을 진정시킨 호위기사가 먼저 놈의 등 위로 훌쩍 뛰어 올라탔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공간 도약을 사용해서 뒤쪽에 올라탔다.

갑자기 내가 뒤에 나타나자 그녀가 흠칫하며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라며 도로 손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말을 안 했군."

이 세계에서 순간이동이 흔한 능력도 아니고, 갑자기 등뒤를 무방비하게 잡히면 놀랄 만도 했다.

어쨌든 대충 그렇게 준비가 끝났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아셸이 아래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펄럭!

뇌후가 탄 와이번이 먼저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주위에 돌풍이 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안장 앞쪽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쥐었다.

곧 내가 탄 와이번도 뇌후의 와이번을 따라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떠오르자마자 순식간에 가속이 붙더니 와이번은 가공할 속도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아래로 보이는 군주성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져서 점처럼 보였다.

'으음.'

간만에 놀이기구 타는 기분을 만끽하며 쥐고 있는 손잡이와 허벅지에 더 힘을 불어넣었다. 놓쳤다간 바로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에서도 놀이기구를 즐겁게 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닷새는 이동해야 한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판타지 만화나 영화에서 보면 그렇다. 평범한 사람도 와이번이나 그리폰 같은 걸 편하게 잘도 타고 다니지 않는가?

실제로 겪으니 역시 허구는 허구일 뿐이었다.

정면에서 쉬지 않고 불어닥치는 바람에, 날갯짓 한 번 할 때마다 위태롭게 덜컹거리는 균형에.

날짐승에 탄다는 건 말이나 마차 따위와는 정말 비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호위기사는 내가 빙의한 이 몸이 멀미를 거의 하지 않는 체질이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아니면 진작 그녀의 등에 토했을 테니.

와이번을 구한다면 이 정도 속도의 비행은 어차피 적응해야 될 문제다.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지금의 비행을 즐기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렇다고 정말 즐거워지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어느 정도의 적응은 금방 되었다.

여전히 승차감이 편히 느껴지지는 않았어도 경치를 구경하는 맛만큼은 일품이었다.

'오······.'

나는 아래로 펼쳐진 푸르른 산봉우리들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지도라도 살피면서 어디쯤 지나고 있는 건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빈손이 없기에 아쉽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와이번은 지치지도 않는지 줄곧 한나절은 쉬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비행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고 해가 슬슬 질 때가 되서야 지상으로 내려섰다.

"여기가 어디쯤까지 온 거지?"

"대략 이쯤입니다."

호위기사가 지도의 한곳을 가리키며 대답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도로 집어넣었다.

마차를 타면 족히 일주일은 넘게 걸릴 거리를 고작 한나절만에 왔다.

날아다니다 보니 지형의 제약이 없기도 하기 때문이겠지만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저녁 식사의 준비는 호위기사가 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와이번의 등에 달린 짐자루에서 식기들을 꺼내서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 외에는 달리 맡을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그녀의 몫이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83레벨이나 되는 초인한테 고작 요리나 시키고 있었으니까.

'기사가 아니라 뭔 하인이야?'

한쪽에서 와이번의 옆구리에 기대 앉아있던 뇌후가 입을 열었다.

"비올라······."

그러다가 내 눈치를 보고는 도로 입을 다물어버린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슬며시 호위기사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그러나 초감각 때문에 내 귀에는 다 들렸다.

"저녁 뭘로 할 거야?"

"치즈 스튜입니다."

"스튜는 질렸어. 고기 구워줘."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로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나는 더 어이가 없어져서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격식 없이 말 건네는 투를 보니 그냥 평범한 주종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뇌후가 군주가 되기 전까지는 가문의 귀한 영애이긴 했을 테니, 뭐······.

내 시선을 의식한 뇌후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계속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호위기사는 순식간에 고기를 구울 틀을 설치하고, 훈제된 고기를 꺼내 불에 한 번 더 굽기 시작했다.

이내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다 구워지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시작됐다.

식사가 거의 끝날 즈음에 뇌후가 입을 열고 물었다.

"와이번을 구하겠다고 했었죠."

"그래."

"7군주 당신은 얼마 뒤에 회담에 가야 하잖아요. 그 안에 구할 수나 있겠어요?"

그녀가 조금은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았다.

와이번을 길들이는 건 말 따위를 길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으니까.

오로지 운이라면 운, 와이번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어느 한 마리라도 자신을 주인으로 선택하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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