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유 (3)
제자리에 굳은 듯 우두커니 서서 날 노려보기만 하는 뇌후.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인다.
차마 내 말대로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앉기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시 말했다.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면 그대로 나가도 상관없다."
"······."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군주 자리를 걸고 넘어지는 협박은 아찔한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이를 부서져라 까드득 갈며 천천히 자리로 되돌아와서 앉았다.
"당신······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보시다시피 그런데.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할 말을 궁리했다. 딱히 다음 말을 생각하고 부른 건 아니었기에.
어쩔까. 여기서 좀 더 몰아붙여볼까, 아니면······.
"대군주께서 사실을 알면, 당신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사이 뇌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역협박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6군주까지 죽여놓고서 파렴치하게 같은 군주의 전력을 크게 떨어뜨리지 않았습니까. 대군주가 이 사실을 안다면 분명 당신도 결코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물론 영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군주는 칼데릭 최대의 전력이고, 6군주처럼 죽이지 않았다고 한들 그 중대한 전력을 깎아먹은 것도 죄라면 죄였으니.
만약 사실을 알게 되면 대군주가 내게 아예 아무런 책임도 물으려 하지 않을 거라는 장담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봤자지.'
애초에 이건 서로에게 걸린 리스크의 무게가 전혀 맞지 않는 문제였다.
나와 달리 지금 뇌후는 가당치도 않은 협박에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절박한 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당장 대군주에게 사실을 알리러 가볼까."
그에 뇌후가 기겁하며 덩달아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만!"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상황이 누구에게 불리한 건지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농락당했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뾰족한 귀를 시뻘겋게 물들인 채 날 노려봤다. 이제는 처연함마저 느껴졌다.
"이, 이 비열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내 정령을 소멸시킨 것이겠지. 당신은 명예도 긍지도 없습니까? 그래고 군주라는 자가 이렇게 치졸하고 더러운 협박을!"
갑자기 뭔 또 명예 타령이래.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글쎄, 결투에 패배한 다음에 꼴사납게 찾아와 진상이나 부리고 있는 누구만 할까."
"······지, 진상?"
"이미 결론이 난 문제에 꼬투리를 걸고 넘어진 게 누구였지? 결투를 먼저 제안한 건 또 누구였고."
"······."
"심지어 그 일격은 정말로 날 죽일 생각으로 날린 일격이었지. 자신의 행동에도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계속 이렇게 남탓만 하고 있을 건가? 이제야 다른 군주들이 했던 말이 이해가 가는군. 정말로 꼬맹이가 떼쓰는 거나 다름이 없어."
신랄하게 말을 쏟아내자 그녀가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우, 웃기지 마. 당신이 뭘 안다고······ 어쨌든 당신이 죽인 건 죽인 거잖아······."
더듬더듬 목소리를 뱉어내지만 방금 말들이 가슴에 제대로 꽂힌 듯 영혼이 없다.
그녀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쯧 혀를 차며 말했다.
"2군주."
"······."
"앞으로 내 앞에서 아까 같은 같잖은 위협이나 협박은 하지 마라. 그런 거슬리는 눈으로 쳐다보지도 말고."
그녀는 분함과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여전히 날 노려봤다.
"말이 말 같지가 않나 보군."
하지만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곧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마지막 자존심인 듯했지만 처량해보일 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나 분한지 꽉 깨문 입술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짜 개빡쳤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힘도 크게 잃은 마당에 그걸 빌미로 잡혀 협박까지 당하고 있으니.
군주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이런 치욕을 겪은 일이 언제 또 있었겠는가.
일단 누가 위에 있는지 위치 차이를 확실히 새겨주긴 했지만 이래서야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한풀이 꺾였어도 나에 대한 반감과 적의가 점점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테니.
그냥 나중에 생각하고 대충 넘어갈 걸 괜히 붙잡았나도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매듭은 제대로 지어야겠지.
방법은 대충 2가지가 있는 듯했다.
하나는 정말 완전히 몰아붙여서 아예 고개도 처들지 못하게 하는 것.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힘들겠고.'
군주위가 강력한 협박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목숨줄을 잡은 것도 아니다.
너무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간 그녀의 자존심 강한 성격상 그냥 터져버릴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나게 채찍질을 했으니 이제 당근을 주는 것.
마침 문득 생각난 게 있기는 했다.
정령이라는 건 엘프의 종족 특질과는 별개로 자연적인 존재이기에 그들의 정령술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서도 정령은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 혹은 스토리상의 조력자나 적으로서 정령은 간혹 등장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뇌후가 다루는 천둥의 정령들 역시 등장한 적이 있었고, 라크시아만큼 강한 대정령 또한 있었다.
그거라면 만약 그녀가 직접 찾아가서 그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한다면 이전의 힘을 되찾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솔직히 그놈이 계약이 가능한 정령인지는 모르겠지만······.'
왜냐면 놈은 게임에서도 처치해야 할 보스로 등장했던 만큼, 누군가와 계약 따위를 맺을 순한 정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놈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당근으로 휘두르기엔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할 것이었다.
"나는 라크시아만큼이나 강한 천둥의 대정령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내 말에 분을 씹어삼키고 있던 뇌후가 흠칫 놀라서 돌아봤다.
"······뭐라고요?"
"네가 계속 그런 태도를 고수하겠다면 대화는 이만 여기서 마치지. 돌아가라."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 내 태도가 어떻다는 건데요! 계속 말해봐요."
그러면서 방금까지 은근히 뿜어내고 있던 살기는 싹 거두는 꼴이 가관이었다.
"방금 말했다시피, 나는 네가 다뤘던 라크시아 못지않게 강한 천둥 정령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자 그녀의 눈이 부릅 크게 떠졌다.
"그리고 그것을 네게 알려줄 생각도 없지는 않았었지."
"거, 거짓말.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믿지 못하겠다면 믿지 않으면 된다."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쉬운 건 그녀였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적의만 뿜어내는 상대에게 굳이 그런 친절을 베풀 필요가 있겠나? 어떻게 생각하지?"
"······."
"대답해라, 2군주. 아니면 이야기는 이만 여기서 마치든가."
그녀가 반신반의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리고는 잠시 깊은 고뇌에 잠긴 듯하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고서 말했다.
"미안······ 해요. 내가 너무 감정이 격해졌었습니다."
그 사과에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한순간에 이렇게 저자세가 되는 걸 보니 정말 정령이 중요하긴 한 모양이었다.
여기서 갑자기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순간 호기심이 솟아올랐지만, 생각으로만 하고 참았다.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그 정령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고작 사과 한 번으로 되겠나?"
"······읏."
그녀의 인상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럼, 결국 나에게 바라는 게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정말 당신은······."
"아니, 네게 딱히 바라는 건 없다."
나는 말을 끊고서 말했다.
"단지 이만한 정보를 그냥 넘겨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지. 반대로 생각해봐라, 그럴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지?"
"······."
"그러니 앞으로 좀 지켜볼 생각이다."
2군주 뇌후.
비록 힘을 크게 잃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90레벨, 충분히 거대한 전력이다.
이렇게 미끼를 걸어두면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손쉽게 빌릴 수 있을 것이었다.
내 말이 알아서 기라는 의미로 들렸는지 뇌후는 또다시 사나운 얼굴이 됐다. 물론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았다.
하지만 뭘 어쩌겠나?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정령이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데.
"날 그렇게 기만만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아니, 애초에 거짓말이었다면······."
나는 말을 끊고 말했다.
"정 그렇다면 그 부분은 맹세하지.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
"설마 이것마저도 기만이라고 날 모욕하지는 않겠지, 2군주?"
칼데릭의 군주위는 대군주의 임명으로만 정해지는 만큼 혈족의 계승 따위는 없다.
세인테아에서 백성들이 황족의 피를 신성하다 믿고 그들의 군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칼데릭에서 역시 군주는 감히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지고한 존재로서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렇기에 이런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래도 군주들 중 몇몇은 혈족이나 일족으로 거대한 가문을 이루고 있기도 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뇌후의 케리온느 가문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칼데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출신인 만큼, 그에 대한 자존감과 권위 의식이 누구보다 드높은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같은 군주인 내가 이렇게 이름과 명예를 걸어버린다고 말하면, 그건 그녀에게 있어 결코 어겨질 수 없는 약속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거였다.
물론 명예고 자시고 후에 일이 수틀린다면 약속을 지킬 생각 따윈 없었지만 말이다.
"······좋아요. 당신의 말을 믿죠."
뇌후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럼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 짓지."
나는 살짝 물러나는 말을 해주었다.
"지금이야 말하는데, 네 정령을 소멸시킨 건 나로서도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으면 위협적이었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으니까."
앞으로 그녀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웬만하면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으니까.
"······그만 가보겠어요."
그녀는 허탈함과 이런저런 감정들이 섞인 듯한 복잡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힘이 빠져서 축 늘어져 보이는 걸음걸이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쟤를 써먹을 일이 어디에 있을까.'
비록 힘은 좀 잃었다고 해도 뇌후는 얼마든지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물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는 필요할 때 힘을 빌릴 수 있게 됐으니 좀 고민을 해봐야······.
'······아.'
그때 생각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와이번.
놈들은 희귀하기 그지없는 아룡종인 만큼 대륙에서도 서식하는 장소가 몇 없는데, 그중 하나가 칼데릭에서 서쪽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글라이드 대산맥이었다.
평범하게 이동한다면 도착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만약 와이번을 타고 이동한다면?
"이봐, 2군주."
나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녀가 또 뭐냐는 듯 걸음을 멈추고서 돌아봤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와이번을 타고 왔지?"
"······그런데, 왜요?"
"여기서부터 와이번을 타고 글라이드 산맥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지?"
그녀가 뭔 뜬금없는 걸 묻느냐는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적어도 닷새 안에는 도착하겠죠. 갑자기 그건 왜 묻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이동하지."
"······뭐라고요?"
그녀가 두 눈을 깜박였다.
회담까지 남은 시간은 약 1달.
그 전에 다녀오기에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