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유 (1)
무사히 군주성으로 귀환했다.
도착한 건 한밤중이었지만 아셸과 리프는 이때까지 깨어있었는지, 집사장과 함께 입구에서부터 나와서 날 맞이했다.
"다행입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아셸이 진심으로 안도한 기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치고는 굉장히 격한 반응이었기에 의외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신퇴에 흑린 단장에 우르르 몰려와서 날 끌고 갔었으니.
옆에 있는 리프도 우물쭈물 서있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때문에······."
"괜찮다."
결국 전부 내 선택으로 벌어진 일일 뿐이니 리프 남매를 탓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물론 후회도 없었고.
뭐, 진짜로 죽을 위기에 놓였으면 후회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 잘 풀렸으니까. 중요한 건 결과 아니겠는가.
성으로 들어가자 굴피로와 뒤늦게 일어났는지 얼굴을 비추었다.
"무사 귀환하셔서 다행이오, 7군주.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소."
나는 그들에게 별 문제 없이 전부 잘 해결됐다고 적당히 말해주었다.
군주를 죽여놓고 어떻게 별 문제가 없는 건지 굴피로는 몹시 궁금해하는 기색이었지만, 굳이 과정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대충 상황을 정리한 뒤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몸부터 던지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며 생각했다.
'뭔가 오랜만에 여유를 느끼는 기분이네.'
대군주의 말대로 중립국에서 열리는 회담에 동행하는 건 대략 1달 뒤.
6군주 문제도 무사히 매듭지었으니 남은 시간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다음 목표를 위해서는 세인테아로 향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애매했으니까.
신비들을 얻고 스펙업을 하며, 이제 신변의 안전과 군주로서의 포지션은 어느 정도 안정됐다.
이 세계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한 1차적인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한 셈이었다.
물론 여전히 신체 능력은 일반인 수준이었지만, 그건 마력이라도 쌓지 않는 이상 어차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용사, 그리고 계승자······.'
나는 포크로 집은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다음 목표에 대해 생각했다.
게임의 본격적인 메인 스토리.
앞으로 세인테아에서 해야 하는 일들은 바로 그 메인 스토리와 관련된, 이 세계의 운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굉장히 거창하다 싶지만 진짜로 거창한 게 맞았다.
왜냐면 무려 마왕에 부활을 저지할 성검의 다음 계승자를 찾아내고, 그녀를 현 용사와 무사히 접촉시켜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이건 아무리 하기 싫어도 무조건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니면 세상이 멸망할 텐데 피한다고 뭘 어쩌겠어.'
일단 세상이 멀쩡해야 나도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실제로 라사를 플레이하며 진행되는 큰 줄기의 스토리가 바로 그거였였다. 용사 계승자와 함께하는 천방지축 모험.
지금의 내게는 시스템이나 형편 좋은 가이드 라인 따윈 없기에 그걸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것이었고.
대략적인 맥락은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갈 길이 태산이다, 진짜.'
어차피 일단 계승자와 용사부터 만나고 봐야 할 일이기에 당장의 고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내 행동들이 알게 모르게 어떤 나비효과를 미쳤을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찾기는 해야겠지만.
나는 상념을 마치고 다시 눈앞의 스테이크에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근처에 서있는 집사장에게 물었다.
"1군주 일행이 타고 왔던 와이번은 아직 성에 있나?"
그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알아서 돌아갔습니다."
······알아서 돌아가?
순간 고개가 갸웃했지만 뭐 이상할 건 없다 싶었다.
와이번은 영수라 불릴 만큼 굉장히 영리한 생물이었으니 말이다.
'와이번이라······.'
그나저나 와이번 같은 게 하나 있으면 좋긴 할 텐데.
군주들 몇몇이 타고 다니는 걸 보니 문득 필요성이 느껴지기는 했다. 이곳저곳 빠르게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이제는 신비들도 얻었으니 타고 다니다가 까딱 떨어져서 죽을 걱정도 없고 말이다.
와이번은 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비행 수단이자,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평범한 몬스터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하고, 날쌔며, 영리한 아룡종.
하지만 워낙 희소하기도 하고, 포획이나 사육은 불가능에 가까운 데다가, 놈들 고유의 그 '까다로운 특성'상 실제로 타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와이번을 구하고 싶으면 내가 직접 놈들의 서식지로 찾아가야만 할 텐데······.
'그것도 일단 회담부터 다녀오고 나서 생각해봐야겠네.'
마찬가지로 시간이 애매해서 이동할 겨를이 없었으니 말이다.
달그락.
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남은 시간 동안은 성에 눌러앉아서 푹 쉴 생각이었다.
그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고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
휴식이라고 해도 생활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냥 평소보다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낼 뿐.
나는 책을 읽기도 하고, 굴피로와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고, 리곤의 상태도 간간이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계속 성에서 지낼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
"그렇소. 이렇게 사람 많고 넓은 공간은 영 나한테 맞지가 않아서 말이오. 리곤만 완전히 회복되면 바로 나가겠소."
나는 굴피로에게 슬쩍 말했다.
"혹시 제자 같은 걸 둘 생각은 없나?"
그가 뭔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제자라,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소만. 한데 그건 갑자기 왜······?"
"별 건 아니고, 내가 아는 연금술사 중 재능이 뛰어난 젊은 연금술사가 있어서 말이지."
다행히 굴피로는 관심이 끌린 듯한 기색이었다.
"누구요? 이 도시에 있는 연금술사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에 있는 알키마스라는 공방의 주인이다. 언제든 마음이 내킬 때 한번 찾아가봤으면 좋겠군."
"음······ 알겠소이다. 7군주께서 그렇게 말하니 조금 호기심이 생기긴 하는구려."
그렇게 굴피로에게도 스칼릿에 대해서 말을 해두었다.
기왕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사제지간으로 좋게 진전되길 바라면서.
한 번은 그냥 성안을 혼자 산책하며 돌아다니다가 의외의 광경을 마주하기도 했다.
야외 연무장 구석에서 병사들 몇몇이 모여서 체스를 두고 있던 것이다. 한쪽에 동화 몇 닢을 쌓아두고.
"······응? 헉!"
나를 발견한 병사들이 허겁지겁 일어나서 경례를 했다.
나는 그들에게 손짓하며 체스판을 빤히 내려다봤다. 기사도 아니고 병사들이 체스를 다 두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둬봐라."
"예? 예, 옛!"
어떻게 두나 좀 구경하려고 했더니, 병사들은 손을 덜덜 떨며 말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돈이 아니라 목숨이 내걸린 듯.
결국 나는 그들을 놔주고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체스라······.'
뭐, 이 세계에서 보드게임이라 해봐야 체스가 고작이긴 하겠지.
괜히 흥미가 솟아오른 나는 집사장에게 시켜서 체스판과 말을 준비하게 했다.
사실 나도 체스는 꽤 둘 줄 알았다.
이것저것 뭐든 안 좋아하는 게 없는 동생의 다양한 취미에 어렸을 때부터 자주 어울려줬었으니까.
체스를 함께 둘 상대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셸이었다.
"······."
내 부름을 받고 방으로 들어온 아셸이 테이블 위의 체스판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나는 반대편 자리로 손짓을 했다.
"체스를 둘 줄 아나?"
"예, 알긴 압니다만······."
아셸은 뜬금없이 웬 체스인가 싶은 기색이다가도 어쨌든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말하기로 대군주성에서 견습 기사로 있을 때 동기들에게 배워서 몇 번 둬봤다고 했다.
'초보라는 거군.'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맞수가 아니라 초보와 두는 것도 슬슬 가르치면서 두는 맛이 있었으니까.
"가볍게 즐기자고 두는 거니 부담은 갖지 마라.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줄 테니."
"예······."
아셸이 어째서인지 묘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흘리며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흰말을 주고서 흑말을 가져갔다.
아셸이 먼저 말을 움직이며 게임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몇십 분이 흘렀을까.
"······."
나는 멍하니 체스판을 바라봤다. 아셸의 말들에 완전히 갇혀버린 내 킹을.
뭔가 하나둘씩 꼬이는가 싶더니 전세가 기울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뭐지?'
왜 잘 두지?
별로 안 둬봤다면서 이게 뭔데.
내가 장고 끝에 말을 움직이자마자 아셸이 말을 움직이며 말했다.
"체크메이트입니다."
"······."
나는 굳은 얼굴로 패배를 인정했다.
"내가 졌군."
뒤늦게 수치심이 몰려왔다.
게임 시작하기 전에 잘 모르면 가르쳐주겠다는 말까지 했는데, 이건 뭐 아주 시원하게 처발렸기 때문이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내 눈치를 보고서 아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내게는 수치심만 더 자극될 뿐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이해가 안 되서 물었다.
"정말로 몇 달밖에 안 둬본 게 맞나?"
"예."
아셸이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 성격에 굳이 이런 거에 거짓말을 할 리도 없다.
그럼 진짜로 이게 고작 몇 달밖에 안 둬본 사람 실력이라고?
'천재인가?'
아셸이 체스를 잘 둔다는 정보는 게임에서도 나온 적 없는 사실이었다.
얘는 몸 쓰는 일 말고는 다른 것들은 별로 못하는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내심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어쨌든 고작 한 판으로 상대와의 레벨 차이를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었다.
"한 판 더 두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2번째 판은 처음 판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패배했다.
곧장 3번째 판이 이어졌다.
***
"······."
아셸은 반대편에서 신중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체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7군주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서 입술을 슬쩍 깨물고서 참았다.
평소에도 그가 이 정도로 집중한 모습은 별로 본 적 없었는데, 고작 체스에 정말 진심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참 알 수 없는 분이야.'
이 사람의 목적은 뭘까, 그리고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처음에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했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들은 이제 와선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길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시간을 그와 함께했다. 적어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확신을 가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고작 면식 하나 없는 남매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군주와 척을 지고, 대군주성으로 끌려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서 평소처럼 지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셸은 그저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의 어깨에 지금 얼마나 무거운 짐들이 얹혀있을지를.
어쩌면 지금 이렇게 의미 없이 체스를 두는 것도 근래 무거워진 주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어쩔 때는 한없이 냉정하지만 어쩔 때는 그 속에 깃든 선의와 친절함이 분명히 느껴지는, 그런 7군주의 면모가 좋았다.
'······.'
좋았다?
아셸은 자기가 생각하고서 움찔 놀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고개를 드니, 장고 끝에 수를 마친 7군주가 의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차례다."
"아, 예."
아셸은 곧바로 말을 움직였다.
"체크메이트입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