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소집 (5)
뇌후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휴······.'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레 겁먹어서 나도 모르게 즉살을 사용해버렸다.
하지만 잘한 일인 것 같았다.
누가 알아, 혹시나 진짜 장막이 뚫렸으면 가루 하나 안 남고 그대로 소멸했을 텐데.
'그나저나 정령한테도 통하긴 하는구나.'
한편으로는 더 강력한 확신도 얻었다.
영혼이든 뭐든, 그냥 넓은 의미로 살아있다고 볼 수 있는 대상이면 즉살은 대체로 다 통할 거라는 걸.
사방을 자욱하게 가렸던 뇌기가 걷히고, 결투를 관전하고 있던 군주들의 모습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멀쩡하기 그지없는 내 모습을 보고서 놀란 듯한 기색들이었다.
나는 다시 뇌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방금 전보다 더욱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왜 저래?'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뭐, 갑자기 소환한 정령이 소멸했으니 당황스럽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어째 너무 평정을 잃은 것 같은······.
【Lv. 90】
······?
나는 뇌후의 머리 위에 떠있는 레벨을 확인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95레벨이었던 그녀의 레벨이 90레벨까지 확 하락해있었다.
대체 뭔 일어난 건가 싶다가, 이내 곧바로 상황을 이해하고서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설마 정령이 완전히 소멸해서?'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즉살에 당해 소멸했으니 천둥의 대정령 라크시아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건 즉, 그녀가 다시 라크시아를 소환하는 건 영영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이미 소멸해버린 정령을 어떻게 불러오겠나.
가지고 있던 가장 거대한 힘 중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그에 따라 그녀의 레벨 역시 그만큼 하락한 것이고.
'와, 잠깐만.'
나는 그제야 내가 좀 엄청난 짓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뇌후의 힘을 무려 5레벨만큼이나 영구적으로 깎아버렸다는 거잖아?
그것도 보통 5레벨이 아니라 90레벨대에서의 5레벨이면 정말 어마무시한 값이다.
의도치 않은 대참사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나와 눈을 마주친 뇌후가 움찔 놀랐다.
"다, 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그때 대군주와 다른 군주들이 주위로 다가왔다.
그에 뇌후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대군주가 나와 그녀를 한 번씩 번갈아 보고서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7군주가 이긴 것 같네. 2군주, 승부를 인정하겠어?"
대군주의 말에도 뇌후는 대답 없이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에게 말을 걸려 했다.
"2군주, 정령······."
그녀가 기겁하며 입을 열었다.
"이, 인정해요! 제 패배를 인정한다고요!"
"······."
"7군주······ 당신의 승리라고요."
그 반응에 다른 군주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뇌후를 바라봤다.
그녀는 패닉에 빠진 눈으로 나를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도망가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저거 왜 저래? 쪽팔려서 튀는 거야?"
광랑이 중얼거렸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진짜 큰일났네, 쟤.'
솔직히 2군주가 힘을 잃든 말든 내 알 바야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벌인 짓이니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90레벨이면 군주는 고사하고, 세인테아의 오성과 비교해도 그 언저리 수준까지 약해졌다는 게 아닌가?
지금 저렇게 황급히 도망가는 것도 대군주와 다른 군주들의 눈을 의식해서 그런 것이리라.
'음······.'
뭐, 별 수 있나?
조금, 아니, 좀 많이 미안하긴 했지만 내가 뭘 어떻게 책임질 방법은 없었다.
이미 소멸해버린 정령을 무슨 수로 되돌리겠나. 내 능력은 죽이는 것뿐이지, 도로 살리는 능력은 없는데.
'미안.'
속으로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곧바로 합리화를 시작했다.
아니, 그러게 누가 싸움을 걸랬나? 저쪽에서 먼저 시작한 거니까 내 잘못만 있는 것도 아니잖······.
"정말로 대단하군."
그때 갑자기 내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돌리자 거왕이 눈을 빛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가 감탄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2군주의 라크시아는 나도 이전에 한번 온몸으로 부딪혀본 적이 있어서 알지. 뼛속까지 태워버리는 듯한 그 가공할 뇌기."
"······."
"그 일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고스란히 받아내다니, 진심으로 감탄했다. 7군주 그대는 들은 대로 뛰어난 전사군."
······뛰어난 전사?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진중한 얼굴로 찬사를 내뱉는 거왕을 쳐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 덩치만큼이나 무게를 잡고 있더니, 갑자기 뭔가 싶었다.
'뭐······ 거왕 성격이 그런 쪽이긴 했나.'
전형적인 전사 캐릭터.
게임에서도 거왕은 자신이 인정한 뛰어난 전사에겐 일방적인 호의를 보이곤 했었다. 설령 그게 다른 진영의 인물이더라도.
여기서 뛰어난 전사라 함은 어떤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고 오로지 정면에서 맞부딪히는 그런 걸 뜻했다. 좋게 말하면 우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식한. 그렇다고 거왕이 뇌까지 근육인 그런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걸로 소집은 종료지?"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던 광랑이 몸을 돌렸다.
"잔뜩 기대하고 왔더니 이것도 저것도 죄다 싱겁게 끝나고, 나도 그만 돌아가련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녀가 아, 하며 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7군주, 너 전에 내 군주령에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
"그거 있잖아, 빌페크 시라고 했었나? 아무튼 어디 시장 놈이랑 말이야."
······아, 그거.
테이르를 만났던 레스토랑에서 미쳐 날뛰었던 그 귀족 영애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어떻게 됐나.
광랑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집사장한테 듣기로는 너한테 별 지랄을 다했다던데, 그래서 대충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거든. 뭐 다른 거 원하는 거라도 있냐?"
"······알아서 해라."
뭘 어쩌든 별 관심도 없었다.
광랑이 픽 웃고는 손을 휘휘 저으며 도로 몸을 돌렸다.
"자, 그럼 이대로 해산할까. 다음 회의 때 다들 다시 보자고."
대군주도 손뼉을 짝짝 치며 소집의 종료를 알렸다.
"아~, 그나저나 곤란하네. 이번 빈자리는 또 언제쯤에 채워지려나······."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본성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이내 다른 군주들도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아까까지의 심각했던 분위기치고는 꽤나 싱거운 끝이었다.
"7군주, 언제든 9군주령에 방문하면 환영하겠다."
거왕은 그 말을 남기고 쿵쿵 육중한 발걸음을 옮겼다.
"7군주, 6군주는 얼마나 강했던가요?"
흑해 여제는 떠나기 전에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참 밥맛없던 흡혈귀라, 예전부터 으적으적 씹어서 삼켜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었거든요."
"······."
"근데 이제 당신도 좀 밥맛이 없어지려고 하네요. 이번엔 그냥 이렇게 넘어가게 됐지만, 앞으로는 주의하자고요. 후후······."
나는 더듬이를 살랑거리며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천궁은······?'
전에 3군주령에서 벌였던 발킬로프 건으로 나한테 뭐라도 말을 걸지 않으려나 했는데, 이미 진작 떠나가고 없었다.
다들 떠나가고 이제 자리에 남은 건 1군주 신퇴와 4군주 망자왕뿐이었다.
신퇴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전부 완만히 해결된 것 같아 다행이군."
······완만히가 맞나?
뭐, 과정은 제쳐두고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기는 했다. 적어도 생사를 건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으니.
'근데 무슨 용건이야.'
여태 기다리고 있던 걸 보니 다른 용건이라도 있나 싶었다.
이어서 신퇴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이전에 대군주령 변경의 루터스 대산맥에서 7군주 그대가 처치했던 거대한 뱀 몬스터, 기억하는가?"
벨르바고라?
그걸 이 드워프가 어떻게 알고 있나 싶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대가 시장에게 사체를 그냥 맡기고 갔길래, 그 비늘을 내가 좀 가져다가 썼었네. 아주 훌륭하더군. 감사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서 말이네."
아······ 그랬나?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장장이인 그에게 그만한 몬스터의 비늘이야 좋은 재료이긴 했을 터였다.
"혹여 필요한 장비가 있다면 1군주령으로 찾아오게. 그럼······."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는 듯 신퇴도 인사를 건네고서 곧바로 떠나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망자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도 용건이 있는 듯 다른 군주들이 모두 떠나가기를 여태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망자왕이 말했다.
"자네에게 전에 건네받은 권성의 시체, 언데드로 되살리는 게 불가능하더군. 혼이 완전히 소멸해서 말이야."
뭐?
그 말에 속으로 놀랐다.
"망자의 몸에는 영혼의 잔재가 남아. 언데드 마법은 기본적으로 그 혼을 붙잡아 종속시키는 것부터 시작하는 마법이네. 한데 7군주 그대가 죽인 권성의 시체엔 자그마한 잔재 하나 남아있지 않고 영혼이 깔끔히 소멸했더군."
"······."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이 소멸해?'
즉살에 죽은 권성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한다.
그럼 설마, 즉살은 대상의 영혼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능력이었던 건가? 그래서 영체에도 상관없이 잘 통한 거고?
'아니, 잠깐만······.'
그럼 그때 던전에서 죽였던 가디언은 뭘까. 가디언한테도 영혼이 있나?
나는 망자왕에게 물었다.
"4군주, 고대의 골렘에 대해서 알고 있나?"
내 뜬금없는 물음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골렘을 제작하는 마법도 영혼과 관련된 마법인가?"
"음, 더미 마법 말인가? 그쪽은 별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걸로 알고 있네."
"······."
"그건 다른 대상에게서 수확한 영혼의 잔재를 인형의 몸체에 주입하는 마법이지. 이미 죽은 것이든, 애초에 살아있던 적이 없는 것이든, 뭐든 움직이게 만드려면 마력뿐만 아니라 영혼의 잔재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어쨌든 마법 골렘에도 영혼이 들어있기는 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진짜 맞는 것 같은데.'
즉살의 본질이 대상의 영혼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능력이라면, 지금까지 죽인 대상들과도 전부 다 들어맞는다.
능력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지만 안다고 뭐가 딱히 달라지는 건 없는 사실이었다. 그냥 그런 거였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언데드한테는 아직 사용해본 적이 없는데, 얘 말대로면 언데드한테도 상관없이 잘 통하겠네.
"그래서, 그에 대해 따지고 싶은 건가?"
내 물음에 망자왕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단지 그대가 한 일이 맞나 궁금해서 물은 것이네. 반응을 보니 그런 것 같군."
호기심은 해결했다는 듯 망자왕도 몸을 돌렸다.
"그럼 나도 이만 가보도록 하지. 회담은 잘 다녀오고 다음 회의에서 보세, 7군주."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었기에 그를 붙잡고 물었다.
"처형에는 어째서 반대했었나?"
이제 보니 빚을 갚으려고 그런 것도 아닌 듯한데.
망자왕이 날 돌아보고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저 개인적인 판단이었네. 전투를 벌였다간 왠지 그대의 협박이 정말로 실현될 것 같아서 말이지."
"······."
"하지만 그에 대한 악감정은 없네. 나는 7군주 그대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길 원하니까 말이야."
나는 그런 망자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6군주의 시체는 아마 언데드로 되살릴 수 있을 거다."
"······음?"
폭왕은 즉살로 죽이지 않았으니 영혼의 잔재라는 게 제대로 남아있을 것이었다.
내 말에 망자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고맙네. 아주 좋은 재료가 하나 생겼군. 대군주에게 말해봐야겠어."
나는 떠나가는 망자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곧 나도 몸을 돌렸다.
'후우······.'
처형 재판에, 결투에, 심신이 피곤했다.
그만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