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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70화 (70/189)

긴급 소집 (4)

"다들 이대로 넘어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뇌후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군주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이미 결정이 난 사안 아닌가. 그리고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치르기로 했고."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군주가 군주의 손에 살해를 당했습니다! 죽음으로밖에 대가를 치를 수 없는 중죄 중의 중죄란 말입니다!"

"아, 저거 또 오버하고 앉았네."

광랑이 쯧쯧 혀를 찼다.

참모장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군주끼리 전투가 벌어졌거나, 혹은 군주가 군주를 살해했을 시, 소집을 통해 대군주의 권한으로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것으로 헌령에 제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반드시 처형이 집행되어야만 하는 사안은 아닙니다, 2군주님."

뇌후가 홱 시선을 돌려 참모장을 노려봤다가, 대군주를 바라봤다.

항의가 가득 담긴 그녀의 시선에도 대군주는 말없이 입가에 웃음만 걸고 있을 뿐이었다.

뇌후가 입술을 짓씹고는 말했다.

"이제 막 군좌에 앉은 이가 벌써부터 이런 혼란을 일으켰지 않습니까. 쉬이 넘어갔다간······."

"이리 열성적으로 칼데릭의 미래를 생각해줘서 고맙네, 2군주."

"······."

"그래도 나 혼자 결정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수결로 결정한 사안이잖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조곤조곤 타이르는 듯한 대군주의 목소리에는 감히 항거하기 힘든 압력이 서려있었다.

"그래요, 2군주. 나도 마음에 안 들지만 별 수 있겠어요? 꼬맹이가 떼쓰는 것도 아니고, 결정에 따라야죠."

비꼬는 듯한 흑해 여제의 말투에 광랑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꼬맹이, 전에 군주 회의에서도 광랑이 그런 말을 했었지.

나는 두 사람이 왜 뇌후를 그렇게 부르며 놀리는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날 제외하고 군주들 중 가장 최근에 군주가 된 인물인 데다가, 살아온 세월도 가장 어렸으니까.

자기도 군좌에 앉은 지 고작 몇 년밖에 안됐으면서 나더러 방금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우습게 들릴 만도 하겠지.

뭐, 그래도 그녀의 가문만큼은 칼데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이긴 하지만······.

"이······!"

발작적으로 그런 둘을 노려보던 뇌후가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내쉬었다. 폭발하려는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내 다시 눈을 뜬 그녀가 나를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허락해주십시오, 대군주."

"응?"

"7군주와의 정식 결투를 원합니다. 감히 아까와 같은 망언을 지껄일 만한 실력이 정말로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그에 나는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또냐?'

저번 회의에서도 그 지랄을 하더니, 이번에도 또 이러고 있었다.

아니, 그냥 좀 넘어가면 어디가 덧나나. 왜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진짜 저번에 붙었던 시비 때문에 아직도 뒤끝이 남아있나?

"음, 결투 말이지······."

대군주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나와 뇌후를 번갈아 봤다.

"뭐, 그래. 정 그리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는데······."

그러다 히죽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때, 7군주? 아까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조금은 7군주의 실력이 직접 보고 싶어졌는데."

"······."

씨발.

나는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외통수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저번에야 입을 털어서 어떻게든 적당히 넘어갔지만, 이번엔 대군주도 마침 잘 됐다는 듯 빠져나가게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금 막 처형 위기를 넘겼기에 지금의 나는 발언권도 부족한 상황이었으니까.

"오, 그러면 나도! 나도 7군주랑 한판 붙을래!"

대군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광랑도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제발 좀 닥쳐줬으면.

나는 더 상황이 막장으로 흘러가기 전에 머리를 굴려 해결책을 짜냈다.

여기서 결투라는 건 당연히 상대를 죽이는 게 아닌 제압하는 결투었다. 즉, 즉살을 사용할 수 없는 내게는 승리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폭왕을 상대할 때야 놈이 마침 흡혈귀라 운 좋게도 가스칼리드의 혈술까지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부동 장막으로 방어하고 공간 도약으로 회피하는 게 전부······.

'······아.'

그래, 그러면 되잖아?

"이렇게 하지."

나는 뇌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적당한 제압에 별 소질이 없다. 6군주까지 죽인 마당에 또 다른 군주를 죽이면 내 처지만 곤란해지지."

"하! 설마 또 그따위 핑계로 결투를 회피하겠다는 건 아니겠······."

"그러니 방어만 하겠다."

"······뭐라고요?"

"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공격에 방어만 하겠다는 뜻이다."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는지 잠시 멈칫한 뇌후가, 이내 살기를 폭사했다.

"날 모욕하는 것도 정도껏 하세요, 7군주. 이제 그 오만함이 경멸스러울 지경이니. 내 공격에 제자리에서 방어만 하겠다고?"

"그래."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2군주 뇌후, 천둥의 정령술사. 군주들 중 파괴력 하나만큼은 제일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지."

"······."

"3번의 공격을 모두 완전히 막아내면 내 승리, 그렇지 못하면 네 승리다. 이 조건이면 결투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대군주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흥미진진하기 그지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뇌후는 귀까지 부르르 떨며 분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Lv. 95】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그녀는 전 대륙에 존재하는 엘프들 중 거의 최강에 가까운 정령술사다.

그런 그녀의 공격을 나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막기만 하겠다 선언한 것이고.

특히 자존심이 강한 그녀의 성격이면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고 느끼고 있지 않을까.

"······좋습니다."

이내 뇌후가 흉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결투를 진행하는 대신, 조건을 더 추가하죠. 만약 7군주 당신이 패배한다면, 당신의 오만한 언행에 대해서 내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십시오."

"그러지."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쯧, 그딴 게 뭐 결투라고 재미없게······."

방금까지 활기가 넘치던 광랑도 흥이 죽었는지 다행히 알아서 물러나줬다.

대군주가 상황을 정리했다.

"자, 그럼 7군주와 2군주가 방금의 조건대로 결투를 벌이겠다는 거지? 바로 적당한 장소로 이동하자고."

***

회의장에서 나서서 이동한 곳은 대군주성 한편에 위치한 거대한 연무장이었다. 언뜻 봐도 직경이 몇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나와 뇌후는 그 연무장의 한가운데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섰고, 다른 군주들은 관전하기 위해 주위에 섰다.

파지직.

뇌후의 전신에 푸른색의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질질 끌 것도 없이 바로 결투를 시작할 마음이 한가득인 기색.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건을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7군주."

조금은 비웃음이 섞인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 없이 팔짱을 꼈다.

경멸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린 그녀가 더욱 기운을 거세게 일으켰다.

츠츠츠.

이내 그녀의 머리 위에 거대한 독수리와 같은 푸른빛의 형상이 나타났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와 계약한 수많은 천둥의 정령들 중 하나인 코고스.

'대충 중간급 정도 되는 놈이었나.'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올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점점 그녀의 주위를 휘감은 뇌기가 강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여유롭게 부동 장막을 펼쳤다.

빠지지직!

한 차례 날갯짓을 한 독수리 정령이 강대한 뇌기를 휘감은 채 그대로 나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뇌기가 폭발하고, 한순간 시야가 새파란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뇌기는 장막에 완벽히 막혀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허무히 소멸했다.

나는 장막을 거두고서 뇌후를 바라봤다.

손을 거둔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콰르릉!

사나운 천둥소리와 함께 다음으로 나타난 형상은······ 페가수스?

등에 한 쌍의 날개와 머리에 거대한 뿔이 달린 말이었다.

'저게 이름이 레퀴사크론이었나.'

2군주가 부리고 있는 정령들은 그녀의 레벨만큼이나 워낙 많았기에, 이름이 가물가물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놈이 뇌후가 부리는 정령들 중에서 거의 최상위 정령에 가까운 놈이라는 건 알았다.

놈의 등장에 그녀의 주위에 퍼진 뇌기가 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뇌기에 파묻혀서 이제 뇌후의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다만 그녀의 입가에 걸린 자신만만한 미소가 보일 뿐이었다.

파츠츠츠!

놈의 이마에 달린 뿔 끝에 뇌기가 구의 형태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서 다시 한 번 부동 장막을 펼쳤다.

곧 거대하게 뭉쳐진 구체에서 섬광이 터짐과 동시에 가공할 뇌기가 몰아쳤다.

시야가 좀 전보다 훨씬 강한 빛으로 물들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피해를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슈우우우.

나는 장막을 거두고 폐허가 된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전력은 발휘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인가.

속으로 감탄하며 다시 뇌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도 이번엔 조금은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이 정도까지 했음에도 아직 내 옷자국 하나 그을리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 한 번 남았다."

내 말에 그녀가 이를 까득 깨물었다.

"······혀를 놀릴 만한 실력이 최소한 없지는 않았군요."

그녀의 머리칼이 서서히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방금 전 두 정령과는 비교조차 안될 강대한 기운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꽈르르릉!

어찌나 뇌기가 강한지 사방이 전부 푸른빛으로 뒤덮여, 결계에 갇힌 것처럼 주변이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됐을 정도.

나는 온몸이 따끔거리는 걸 느끼며 허공에 나타난 거신과 같은 인간형 정령을 멍하니 응시했다.

'결국 저걸 꺼내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최강의 천둥 정령인 라크시아.

그 거신의 양손에 서서히 가공할 뇌기가 뭉쳐지더니, 곧 길쭉한 창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거신은 그 거대한 창을 그대로 나를 향해 내리찍으려는 듯 창대를 역수로 쥐고 겨누었다.

게임에서도 뇌후의 궁극기였던 바로 그 기술.

'잠깐만, 이거······.'

나는 부동 장막을 펼치면서도 섬짓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못 막는 건 아니겠지?'

애초에 내가 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내건 승부였다.

아무리 강력한들 게임에서도 무적 방어기였던 부동 장막을 뚫을 수 있는 공격은 없었으니까.

······근데 실제로 직접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뇌후의 궁극기 역시 게임에서는 고정 피해를 입히는 즉사기에 가까운 공격이었었기에, 더더욱 쫄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부동 장막이 뚫리는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마음에 솟아오른 것이었다.

"어디, 이것도 피하지 않고 막아봐라!"

뇌후가 그렇게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결국 나는 본능에 가깝게 장막을 거두고 혈술을 사용했다.

핏방울이 막 창을 내려꽂으려는 라크시아를 향해 날아갔고, 형체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타버려 사라졌다.

쿠구구구.

그리고 그렇게 핏방울과 함께 라크시아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소멸해버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뇌기도.

"······어?"

막 기세 좋게 공격을 날리려던 뇌후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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