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소집 (3)
회의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주 차갑고, 숨 막히는 정적이.
군주들의 시선이 전부 모인 가운데, 나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가장한 채 대군주에게 말했다.
"한번 확인해보겠나, 대군주?"
"······."
그녀가 소름 끼칠 정도로 표정이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대군주와 아홉 군주, 그리고 흑린의 단장에 참모장까지.
만약 용사가 없다면, 다른 병력 없이 그들만으로도 세인테아를 대륙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을 재앙적인 전력.
나는 지금 그들의 전면에 대고서 말한 것이다.
나 혼자 싸워도 너희 중 절반은 저승길 길동무로 데려갈 수 있다고.
군주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1군주 신퇴와 3군주 천궁, 그리고 4군주 망자왕은 별다른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5군주 광랑은 입꼬리를 올렸으며, 8군주 흑해 여제와 9군주 거왕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오만하군."
거왕이 제 덩치만큼이나 육중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래, 그래. 이거지. 이 느낌이지······."
광랑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흥분과 열기가 가득 섞인 숨결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정신이 나간 인간이군요."
그리고 황당함과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내뱉은 건 2군주 뇌후였다.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날 노려보는 게 저번 회의에서 봤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딴 같잖은 허풍이 진심으로 통할 거라 생각했다면, 참으로 멍청하기 짝이 없습니다."
뇌후의 전신을 휘감고서 푸른색의 스파크가 파직거렸다.
그때 갑자기 대군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군주들이 시선을 돌려 배까지 붙잡고 깔깔거리며 웃는 그녀를 바라봤다.
곧 천천히 웃음을 멈춘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새 다시 입가에 천진난만한 웃음을 걸고 있었다.
"······빈말이 아니구나, 7군주?"
그런 대군주의 말에 뇌후가 움찔한 기색으로 미간을 좁혔다.
"진심으로 나와 군주들 전원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9군주의 말마따나 오만일까, 아니면 정말 사실일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면, 상대가 알아서 생각하게 두도록 무게나 잡고 있는다.
적어도 지금까진 잘 풀리지 않은 적이 없던 훌륭한 의사소통 방법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참이나 대군주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그녀는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저 오만함에 가득 찌든 인간의 주제 모르는 망언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판단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대군주는 아직 내 능력에 대해서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도 폭왕까지 죽이며 나는 내 강함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때문에 대군주는 미지의 장막 속에 숨은 나를 판단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전투를 벌였다가 내 엄포대로 군주들 중 절반 이상이 죽어나간다면?
그건 단순히 전력이 반토막 나는 게 아니라 칼데릭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정말 그런 대참사가 발생하면 칼데릭의 가장 큰 대적자인 세인테아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도 않을 테니까.
······솔직히 한편으론 지금 내가 완전히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알았다.
먼저 철칙을 깨놓고 날 죽일 거면 니들도 다 뒈질 각오를 하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많이 뻔뻔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뻔뻔한 억지라도 이런 협박을 안 했으면 결국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내 방금의 발언을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것, 그래서 처형을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도박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
그거면 일단 1차적인 목적은 달성이었다.
그리고 지금 대군주를 보면 충분히 내 그런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한 발자국 물러서야지.'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안 됐다.
나는 타이밍을 재며 다시 말을 꺼낼 준비를 했다.
잠깐 처형 개시에 제동을 걸긴 했어도 그뿐이다.
어쨌든 이대로면 대군주의 결정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칼데릭의 정점에 선 지배자들.
좀 전의 뇌후의 말마따나 이런 협박에 물러날 이들이 아니다.
위신은 둘째치고, 내가 이런 말을 꺼낸 순간부터 나를 살려둔다고 해도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대형 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대로 간다면 결국 대군주는 날 어떻게든 죽이기 위해 처형을 결정할 확률이 높았다.
아직 분위기가 완전히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때, 이 상황을 유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여전히 변함은 없다. 6군주를 거기서 죽이는 것이 칼데릭에 있어서도 이득이었다는 걸."
"······."
"하지만 그 행동이 칼데릭의 질서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대군주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 맹세하지. 앞으로 다시 이번과 같은 일이 반복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물론 내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이 말은 진심이었다.
폭왕이야 이런저런 상황이 우연히 겹치고 겹쳐서 결국 죽이게 된 거고, 사실상 내가 또 군주들과 대적할 일이 뭐가 있겠나?
"흐응······."
대군주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몇몇 군주들이 어처구니 없다는 기색으로 날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고작 몇 마디 말로 이번 소집을 조용히 넘기자고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긴 하겠지.
대군주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7군주. 6군주를 죽인 일이 네가 구했다는 인간 남매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었어?"
"······."
"그래, 그런가 보네. 알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군주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금 흥미가 솟은 듯한 즐거운 얼굴로 군주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군주들의 의견은 어때? 7군주가 다시 이런 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건 진심인 것 같은데."
뇌후가 바로 항의하고 나섰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철칙을 깼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대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의견이 좀 갈릴 것 같으니 찬반으로 가보자고. 2군주는 처형에 찬성인 걸로 하고, 다른 군주들은?"
그에 흑해 여제가 가장 먼저 나섰다.
"저도 찬성이에요, 대군주님. 저 인간 너무 뻔뻔해서 재수가 없네요."
"아, 나도 찬성."
광랑도 곧바로 거들었다.
아까부터 검자루를 꽉 쥐고 있는 게 이미 싸울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1군주는?"
대군주의 물음에 신퇴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본장은 대군주의 뜻에 따르겠소."
그녀의 시선이 다음으로 3군주 천궁에게로 향했다.
아까부터 귀찮음 가득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대군주가 하자는 대로."
이제 남은 사람은 4군주 망자왕과 9군주 거왕뿐이었다.
나를 슬쩍 바라본 망자왕이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말했다.
"나는 처형에 반대하겠네."
그에 다른 군주들이 의외라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뭐야, 4군주. 네 성격이면 당연히 찬성할 줄 알았는데? 설마 쫄았냐?"
광랑의 말에 망자왕은 그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나도 설마 그가 반대를 할 줄은 몰랐기에 속으로 조금 놀랐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망자왕은 신퇴나 뇌후와 더불어 질서의 유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였으니까.
'······설마 저번에 빚 남겨뒀던 거 갚는다고 반대하는 건가?'
아무튼 이제 남은 사람은 9군주 거왕뿐이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앉아있던 그가 이내 눈을 뜨고서 말했다.
"······나도 대군주의 뜻에 따르겠다."
그에 뇌후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찬성 셋에 반대 하나, 그러나 3명이 대군주에게 결정을 맡겼으므로 대군주가 4표를 가진 셈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대군주의 결정에 따라서 내 처우가 결정되는 것이기에 그런 것이리라.
"자, 그럼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거네?"
대군주가 대충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말하며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그녀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만약 그녀가 여기서 내 처형을 결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는 추하게라도 살아남아야지.'
당연히 순순히 목숨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는 그녀가 흥미를 가질 만한 미래 정보로 딜을 걸든 뭘 하든, 정말 가진 패를 다 꺼내서라도 살아남는 수밖에.
그래도 결국 전투가 벌어지면 나도 혼자 뒈지긴 억울하니 최대한 많이 길동무로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꽤나 긴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7군주, 나는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책임은 져야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군주가 군주를 죽인 일이잖아? 고작 말 몇 마디로 넘어가는 건 아니지."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그러니까 내 부탁을 3개만 들어줬으면 해."
"······?"
"물론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 충분히 합리적인 부탁을 할 거니까 걱정 말고. 우선은 얼마 뒤에 있을 중립국 회의부터."
중립국 회의?
내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설명했다.
"얼마 뒤에 세인테아 쪽이랑 중립국에서 회담이 있거든. 그때 나와 동행해서 같이 가줬으면 해. 이걸로 횟수 하나는 치고 나머지 2개는 나중으로 남겨두는 거야. 어때?"
나는 잠시 그녀의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3개의 부탁, 어차피 군주들은 누리는 권한만큼 대군주의 명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기에 매번 군주 회의에서 대군주의 결정에 따라서 각자 군주들이 할 일이 정해지는 거고.
물론 그에 명분이 부족하다면 군주들도 얼마든지 대군주의 명령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거절 권한이 없는 명령권인 거군.'
하지만 뭐, 이 상황을 무사히 넘어가는 걸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거기다 한 번은 세인테아와의 회담에 함께 동행하는 걸로 까겠다니,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다.
뜬금없이 나를 세인테아의 회담에 왜 데려가고 싶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대군주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지만, 어차피 내가 제안을 거부할 처지도 아니고.
"받아들이지."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대군주가 싱긋 웃었다.
"좋아, 그럼 이걸로 끝. 7군주의 처형은 없는 걸로."
대군주의 선언에 광랑이 김빠진 얼굴로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씁, 간만에 좀 싸워보나 싶었더니······."
흑해 여제도 언짢음이 팍팍 드러나는 시선으로 날 쳐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떻게 되나 싶었지만 이번 위기도 결국 무사히 잘 넘겼다.
어쨌든 이제 이대로 다 끝나는 건가 싶었을 때, 갑자기 고함이 울려퍼졌다.
"······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모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뇌후가 씩씩거리며 날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