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소집 (2)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펼쳐진 건 어두운 공동이었다.
사방에 박혀있는 마석들과 발밑의 마법진,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로브의 마법사들.
호송선에서 탈출해 처음으로 대군주성에 발을 들였을 때의 그 풍경이었다.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 복도를 걸으며, 나는 처음 대군주성에 왔을 때와 조금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온 것만 같은 그 기분.
그리고 그건 실제로도 다르지 않았다.
이 긴급 소집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오늘 이곳은 내 처형장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다만 그때와 달리 마음은 평온한 건 이 세계에 그만큼 익숙해지기도 했고, 또한 오기 전에 충분한 각오를 했기 때문이리라.
군주로서 근엄함을 연기하는 것도 계속 하다 보니 이제 내면까지도 조금은 동화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스름한 복도를 걸어 이내 기사들이 정렬하고 서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전부 흑린의 단장과 같은 칠흑의 갑주를 입고 있는 데다가, 레벨들도 80이 넘는다. 전원이 흑린의 기사인 듯했다.
그리고 그 끝에 보이는 건 거대한 문.
우리는 기사들을 지나쳐 걸어 회의장의 입구 바로 앞에 섰다.
'······음.'
문 너머로 숨길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들이 느껴졌다.
그에 나는 안에 군주들이 전원 모여있음을 확신했으며, 동시에 깨달았다.
만약 일이 계획대로 안 풀린다면 정말로 살아나갈 방법이 없을 것임을.
"이번 소집은 7군주 그대가 6군주를 죽인 것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 열린 자리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를 슬쩍 돌아봤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군주의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는 건 무의미한 짓이야."
"······."
"부디 순순히 자네의 진심을 밝히고 대군주를 설득할 수 있길 바라지. 나 역시 이번 일에 대해선 완만한 해결을 바라고 있네."
1군주 신퇴는 아홉 군주 중에서도 가장 특별하다면 특별한 존재였다.
우선 군주들 중 가장 레벨이 높기도 하고, 무엇보다 칼데릭의 건국부터 군주로서 자리를 지켜온 최초의 군주였으니까.
그만큼 그는 칼데릭의 가장 거대한 기둥과 다름이 없으며, 또한 누구보다 진심으로 칼데릭의 평화를 생각하는 이였다.
아마 그 역시도 나만큼이나 이번 일로 인해 더 이상의 충돌을 빚기를 원치 않는 듯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직접 희의장의 문을 열었다.
쿠구구구.
문이 열리고 회의장 안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원탁,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앉아있는 군주들.
그들의 시선은 이미 전부 이쪽으로 모여있었다.
"······."
지금 내 옆 서있는 1군주 신퇴부터, 이전의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4군주 망자왕과 9군주 거왕까지.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라서 몇 명쯤은 불참했을 법도 한데 정말로 군주 전원이 모였다.
나는 특히나 자리 한편을 혼자서 전부 채우고 있는 9군주의 모습을 바라봤다.
키가 적어도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어마무시한 덩치의 거인. 희소 종족 중 하나인 거인족이다.
그는 다른 군주들과 달리 홀로 몸집에 맞는 거대한 의자에 앉아서 침착한 눈으로 내가 서있는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특별히 적의나 살의를 뿜어내는 이는 없으나, 거대한 압력이 회의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왜냐면 자리에 앉아있는 군주들 전원이 제대로 무장을 하고 있었기에.
"어서 와, 7군주."
원탁의 상석에 앉아있던 대군주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전에 봤던 것과 같은 검은 드레스 복장이었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적의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웃음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별 충돌은 없었던 모양이야?"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던 광랑도 자세를 바로하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내 자리로 다가가서 앉았다.
신퇴도 자신의 자리에 앉고, 참모장과 흑린 단장은 대군주가 앉아있는 뒤쪽으로 다가가서 섰다.
잠시 회의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곧 대군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모두 모였으니 시작해볼까?"
그녀가 빈 6군주의 자리를 가리켰다.
"긴급 소집을 선언한 이유는 다들 알다시피 6군주의 죽음 때문이야. 그리고 그를 죽인 게 바로 얼마 전에 즉위한 7군주고."
다시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방금 말한 사실에 대해서 정정할 부분이 있어?"
"없다."
이 또한 형식적인 확인이었다.
내 대답에 대군주가 계속 말을 이었다.
"좋아, 우선 내가 파악한 정황은 이래. 6군주가 주최한 검투 경기에서 7군주가 갑작스레 난입했고, 경기 중인 노예 검투사를 거둬가겠다고 6군주에게 일방적으로 선언, 그리고 그에 분노한 6군주와 충돌이 일었고, 치열한 전투 끝에 6군주를 죽였다."
"······."
"어때, 7군주. 이에 대해서도 뭐라도 정정할 부분이 있어?"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일단 선공은 6군주 쪽에서 했다."
"아, 그래. 그렇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거야 중요한 사실이 아니잖아?"
대군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2군주 뇌후가 끼어들어서 말을 보탰다.
"선공은 6군주가 했다고 해도 먼저 6군주의 행사에 개입한 건 7군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일의 발단 역시 분명히 그에게 있습니다."
나는 슬쩍 뇌후를 바라봤다.
전에 회의에서 시비가 붙었던 게 아직도 앙금이 있는지, 왜인지 유독 적극적으로 보이는 그녀였다.
대군주가 눈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그리고 7군주, 대답해줄 수 있겠어? 6군주가 먼저 공격하기 전에도 6군주를 죽일 의지가 아예 없었는지 말이야."
"······."
본질을 찌르는 질문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쉽게 흘러가지는 않을 듯했다.
세인테아의 용사 또한 가지고 있는 능력이기도 한,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보는 능력.
대군주에게 그 능력이 있는 이상 이 자리에서 어설프게 입을 놀리는 건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니까.
6군주가 선공하기 전에 놈을 죽일 생각이 없었냐고?
아예 없었다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때 나는 이미 결심을 마친 상태였었으니까.
놈에게서 광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캐내지 못하면, 놈을 죽여서라도 리프 남매를 살려서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말이다.
"아예 없지는 않았지."
대군주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전투가 너무 격해진 끝에 어쩔 수 없이 죽인 게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6군주를 죽인 거라는 거겠지?"
"그렇다."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놈을 죽인 건 놈의 육체 능력을 대부분 빼앗은 뒤 제압하고 난 다음이었으니.
그런 내 대답에 군주들이 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신퇴와 뇌후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고, 광랑이나 흑해 여제는 처음 들어왔을 때 봤던 것처럼 묘한 웃음을 지었으며, 나머지 군주들은 별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실 확인을 분명히 했으니, 이제 이유를 들어봐야겠지."
대군주가 어느새 웃음이 가신 얼굴로 이어 물었다.
"7군주, 어째서 6군주를 죽인 거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6군주를 죽인 이유.
이 소집은 결국 내게서 그 이유를 듣고, 이유가 합당하지 않으면 나를 처형하기 위해서 열린 자리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문답이 바로 내 생사를 가를 결정적인 문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합당한 이유를 말할 수가 없지.'
당연했다.
이들에게 있어선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찮은 벌레에 지나지 않을, 두 명의 인간.
고작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6군주를 죽여버렸다고 대답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물론 거기에도 이유라면 있었다.
남매 중 남자 쪽이 미래에 6군주를 죽일 인물이었다는 것, 어차피 개입하지 않았어도 놈은 머지않은 미래 죽었을 거라는 것.
하지만 당연히 이건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는 대군주라면 내 터무니없는 예지가 정말로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일이 복잡하게 꼬인다. 리곤의 존재를 대놓고 대군주에게 드러내면 또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어때, 나랑도 계악을 하는 건? 네 목숨은 살려줄게. 너는 대신 칼데릭의 군주가······.]
······간신히 지옥에서 탈출한 그들 남매를 다시금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다.
여기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 목숨을 건지자고 내가 가진 패들을 다 대군주에게 꺼내놓는 건,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이었다.
그러니 나는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하고 이곳에서 살아나갈 생각이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응?"
대군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곳에서 6군주를 죽이는 게, 적어도 내 판단에서는 최선이었다는 이야기다. 칼데릭의 미래에 덜 해로운."
이것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었다.
어차피 미래에 죽었을 6군주가 좀 더 일찍이 죽었을 뿐이다. 그리고 미래에 살귀가 될 리곤은 타락하지 않았다.
이게 칼데릭에게 이득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손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대군주가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6군주의 존재가 칼데릭에 해악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
"침묵하지고 있지만 말고 왜 그렇게 판단한 건지 이유를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7군주."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여기서 더 파고들면 어떻게든 리곤의 존재를 드러내야만 했기에, 나는 더 이상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대군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이유를 모르면 아무런 판단을 할 수가 없다고.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더 들어볼 게 있겠습니까?"
뇌후가 싸늘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군주가 군주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냥 넘어간다면 칼데릭의 질서가 뿌리부터 흔들릴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얼마나 합당하든, 여기서 당장 7군주를 처형해 흔들린 질서를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그에 광랑도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너 6군주 존나 싫어했잖아. 솔직히 저번 회의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뒤끝 부리는 것도 있지?"
"······지금 상황에 장난이 나옵니까?"
"봐봐, 찔렸구만."
그녀가 킥킥 웃으며 옆쪽에 세워뒀던 검을 집어들었다.
"그래도 나도 2군주 의견엔 찬성이야. 죽인 이유야 뭐가 됐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이런 일을 그냥 어영부영 넘어갔다간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어?"
"맞아요, 대군주님. 보니까 적극적으로 해명할 생각도 없는 듯한데,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죽이죠."
흑해 여제도 끼어들어 피막 날개를 파닥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나는 대군주를 바라봤다.
"7군주, 마지막 기회를 줄게."
그녀가 무언가 흥이 팍 식었다는 얼굴로 말했다.
"설득이든 뭐든 내 마음을 바꿀 말을 해봐. 아니면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거야."
그 말투는 마치, 군주들의 말대로 무슨 이유를 댔든지 처음부터 나를 처형할 생각이었다는 투였다.
나는 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었다.
대군주는 종잡을 수 없지만 합리적인 인물이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건, 그녀가 어떤 일에 대해서 자존심 따위를 세우는 성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녀가 날 처형하기로 결정한 건 오로지 그게 칼데릭에 더 이득이기에 그런 것이다.
네가 감히 철칙을 깨고 군주를 죽여? 따위의 감정적인 선택이 아니라 말이다.
아무리 날 뛰어난 인재로 판단했다고 해도 나는 이제 막 군좌에 앉은, 사실상 아직 신뢰가 더없이 부족한 인물.
수백 년간 유지되어온 칼데릭의 근본적인 질서를 뒤흔든 불안 요소를 계속해서 남겨두고 감수할 만큼의 메리트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나를 살리는 것에 이득이 없다면, 반대로 죽이는 것에 감수해야 할 피해를 각인시켜주기로.
원탁에 둘러앉은 군주들이 서서히 전의를 일으키며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보고서 입을 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겠지."
이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내가 많은 능력들을 얻었다고 해도, 대군주를 포함한 모든 군주들의 합공에 살아남을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명심해라."
여기서 방어막 계열의 능력이 없는 군주는 5군주 광랑과 9군주 거왕, 그리고 8군주 흑해 여제······.
공간 도약을 연달아 펼칠 수 있는 횟수는 3번, 그리고 혈술.
회의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만약 혈술을 펼쳐 사방으로 피를 터뜨린다면 군주들이 얼마나 고스란히 그에 맞아줄까?
알 수 없다. 어쩌면 한 명도 맞히지 못할 수도 있고, 방심 때문에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이 맞힐 수도 있다.
즉,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내가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을 수도, 반대로 군주들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
"이곳에 자리한 절반."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허세이되 허세가 아닌,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서 오는 순수한 진심이었다.
그리고 대군주는 그를 알 것이다.
"나를 죽일 생각이면, 너희도 절반 이상은 죽을 각오를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