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66화 (66/189)

리프리곤 (10)

머리를 잃은 몸이 바닥에 허물어진다.

칼데릭의 군주나 되는 이의 최후치고는 초라한 꼴이었다.

놈의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다가 부러진 검을 바닥에 던졌다. 목을 벰과 동시에 검날도 충격을 못 견디고 부러졌다.

'음.'

나는 전신에 치미는 가벼운 탈력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육체를 채우고 있던 거대한 힘이 증발하듯 전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폭왕이 죽으니 놈에게서 빼앗은 혈술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었다.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 본 주인이 죽었다고 강탈한 능력을 영구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던 모양.

'뭐, 하긴······ 그게 되면 사기지.'

영구 강탈이 가능하면 생전의 가스칼리드도 동족이란 동족은 죄다 학살하며 혈술을 흡수하고 다녔지 않았으려나.

나는 잡생각을 하다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자욱했던 혈무는 걷히고, 완전히 폐허가 된 경기장 한쪽의 떨어진 곳에 있는 이들이 보였다. 아셸과 리프였다.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셸이 들고 있는 소년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하지만 좀 전까지 그의 몸에 감돌고 있던 검붉은 색이나 울룩불룩 징그럽게 튀어나왔던 핏줄은 더 이상 없었다. 몸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리프는 피를 그렇게 흘리고도 용케도 아직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내가 소년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의 시선도 자신의 동생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 동생의 광혈병은 나은 모양이다."

"······."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 리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눈에 초점이 풀리더니 휘청거리며 몸이 넘어갔다. 결국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아셸이 재빨리 쓰러지는 그녀를 빈손으로 받아들었다.

남매 모두 한없이 호흡과 맥박이 미약했지만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스칼릿도 다 사용해서 수중에 있는 포션이 없었기에 서둘러 굴피로에게로 데려가야 했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가자. 치료부터 서둘러야겠군."

"예······."

아셸의 시선이 다시 경기장 저편으로 향했다. 폭왕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는 곳으로.

그녀도 설마 내가 폭왕을 죽이기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표정에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들 남매를 죽이든가, 폭왕을 죽이든가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리고 나는 놈을 죽이고 남매를 살리는 길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쓰읍······.'

다시 생각해도 정말 제대로 정신 나간 짓을 벌이긴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후련했다. 아까 경기에 난입할 때까지만 해도 치밀었던 후회 또한 없었다.

나 스스로도 대체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게 올바른 선택이 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머릿속의 이성은 여전히 날 미친 새끼라고 욕하고, 앞으로의 뒷감당은 어쩔 거냐며 다그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다고 정말 뒷일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저지른 건 아니었다.

일단 남매의 치료가 우선이었기에, 고민은 나중에 하고 어서 포션 상점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

그때 한쪽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기척이 가까워졌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 나는 그들이 군주성 소속의 기사라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6군주성 직속의 기사단이면 아마도 암혼 기사단이었던가?

성에 있던 기사들이 죄다 몰려오기라도 했는지 그 수는 언뜻 봐도 백은 가볍게 넘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난리가 났으니 당연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기색으로 무너진 잔해와 시체들을 넘어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Lv. 72】

이내 우리를 발견한 그들이 흠칫 놀라며 멈춰섰다.

가장 선두에 있는 단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여 7군주님이십니까?"

아무래도 6군주와 내가 싸움이 붙었다는 것까지는 파악하고 서둘러서 달려온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내 뒤쪽으로 향했고,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폭왕의 시체를 발견하고서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나는 그들이 있는 쪽으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물러서라."

폭왕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도 기사들은 날 막아서지 못했다.

그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허겁지겁 앞길에서 물러날 뿐이었다.

아무리 자신들의 군주가 살해당했다고 해도 막아설 엄두가 날 리 없었다.

나는 기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진 길을 따라서 걸어갔고, 아셸이 남매를 양손에 짊어진 채 뒤를 따라왔다.

우리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도 기사들은 한참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

악티폴에서 나온 뒤, 곧바로 굴피로가 있는 포션 상점으로 이동했다.

어째서인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그는 우리를 발견하고서 화색했다.

"7군주! 무사하셨군."

"······?"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다급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오? 악티폴이 있는 쪽에서 난리가 났길래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그대와 6군주가 맞붙었다 하던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

아, 벌써 도시 전체에 소란이 다 퍼진 건가.

그가 아셸이 들고 있는 남매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들을 구하느라 6군주와 충돌한 것이오?"

나는 태연히 대꾸했다.

"별 일은 아니다. 잘 해결됐으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6군주가 순순히 이들을 내어줬소?"

"내어줄 수밖에 없지. 죽었으니까."

"······?!"

굴피로가 경악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 죽였다고? 6군주를?"

"일단 들어가서 이들부터 치료하지."

"아, 그, 그렇지. 어서 들어오시오."

이내 그도 서둘러서 만신창이가 된 남매를 가게 안으로 들였다.

가게 안쪽에 있는 침상에 두 사람을 눕히고서 잠시 상태를 살피더니, 곧장 포션 몇 개를 가지고서 돌아왔다.

"어떤가?"

"일단 리프는 목숨에 지장은 없소. 출혈이 심하긴 해도 외상만 회복시키면 되니. 동생 쪽이 광혈병 때문에 효과 좋은 포션을 못 사용해서 문제지만, 어떻게든 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광혈병이라면 완전히 나았으니, 마력이 담긴 포션을 사용해도 된다."

"······음? 그게 무슨 소리요?"

굴피로가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소년에게로 턱짓했다.

그에 다시 한 번 소년의 상태를 살펴보던 그가 천천히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무슨······ 어떻게?"

잠시 나와 소년을 번갈아 보던 그가, 일단은 치료가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다시 바깥으로 나가서는 다른 포션을 더 가져왔다.

그리고는 소년에게 먼저 포션을 먹이고 몸에 부은 뒤, 이어서 리프도 치료했다.

나와 아셸은 방 한쪽에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내 치료가 끝났는지 굴피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리프는 잠깐 사이에 전신에 가득했던 검상이 순식간에 회복되어 있었고, 창백했던 동생 쪽의 혈색에도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과연 대연금술사가 제작한 포션다운 효과였다.

"이제 말씀해보시오. 대체 광혈병을 어떻게 치료한 것이오?"

굴피로의 물음에, 나는 나란히 누워있는 남매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6군주를 죽였더니 곧바로 낫더군. 광혈병은 놈이 죽어야 사라지는 병이었던 것 같다."

그 사실을 알고 죽인 것이기에 말이 반대이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굴피로가 작게 탄식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리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녀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주위에 서있는 우리를 둘러봤다.

굴피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일어났느냐?"

"······여기는?"

"포션 상점이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가, 이내 옆에 누워있는 소년을 발견한 그녀가 다급히 그의 상태를 살피려고 했다.

"괜찮다. 너도 동생도 전부 치료했으니 안심해라."

"아, 아니. 광혈병, 광혈병이······."

"그래, 네 동생의 몸에 있던 혈기도 완전히 사라졌더구나. 광혈병은 6군주를 죽여야 낫는 병이었던 모양이야."

굴피로의 말에 그녀가 넋이 나간 탄성을 흘리다가, 나를 바라봤다가, 다시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서 곧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으, 으으······."

동생의 몸 이곳저곳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다가 아예 품으로 끌어 안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그녀는 한참을 목놓아서 엉엉 울었다.

***

나와 아셸은 여관에 있는 바로스까지 불러와서 굴피로와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는 상점에 있는 식재료로 바로스가 간단하게 차렸다.

"쯧쯔, 저러다 얼굴에 구멍 나겠군."

아직도 방 안에서 침상 옆에 앉아 누워있는 동생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리프를 보며, 굴피로가 작게 혀를 찼다.

그녀의 몫으로도 수프를 가져다줬지만 다 식을 때까지 먹지 않고 놔두고 있었다.

그럴 만하다 싶었다.

동생 하나 구하자고 악티폴에서 몇 년을 구르다 이제야 겨우 그 염원을 이뤄낸 것이었으니까.

"한데 괜찮겠소? 군주를 죽였는데······."

굴피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별 수 없지. 그대는 7군주령으로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 문제는 둘째치고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으시냔 말이오. 그걸 알아야 나도 뭘 어떻게 할지 정하지 않겠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가 군주를 죽였으니 대군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안다. 그에 대해서는 대충 생각해뒀다.

내 반응에 굴피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뭐, 생각이 있다면 이제 와서 나도 빠질 생각은 없소이다. 7군주령으로 함께 갈 것이오."

"그래······."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지금은 그보다도 아까 경기장에서 스쳐갔던 기억을 되새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스쳐간, 이제는 흐릿해져서 잘 떠오르지도 않는 기억.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마지막에 스쳐간 기억에서 대학살을 벌이던 그의 모습이었지만······.

[너, 마족이랑 계악했구나? 아아, 좀처럼 보기 힘든 자질을 타고났는데 그걸 쓰레기통에 처박고 아깝게 됐네.]

[어때, 나랑도 계악을 하는 건? 네 목숨은 살려줄게. 대신 너는 칼데릭의 군주가······.]

"······!"

내 눈이 서서히 커졌다.

대군주에게 제압당한 소년, 그런 그에게 제안을 하고 있던 대군주.

나는 다급히 방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남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굴피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소년의 이름이 뭐지?"

굴피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모르셨소? 리곤이오."

"······."

나는 침상에 누워있는 소년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그제야, 스쳐간 기억 속의 그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리프, 리곤······.'

살귀 리프리곤.

폭왕에게 혈육을 잃고, 제 누이의 이름까지 뒤집어쓴 살육에 미친 복수귀가 바로 그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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