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리곤 (9)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사방에 집중된 이목 속에 소년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대체 뭐였지, 그건?
소년의 외모는 스쳐간 기억 속에서 본 그의 모습과 분명히 똑같았다.
경기에 난입한 건 그저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여기서 이들 남매를 이렇게 죽게 둬선 안 된다는 직감······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런 직감이 솟아올랐기에.
"······."
그러고 보니 이번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한 번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언제였더라?
미간을 좁힌 채 기억을 더듬다 이내 떠올릴 수 있었다.
혼돈의 상자를 융합하고 처음 게임에 빙의했던 순간.
그때, 세상이 뒤집어지는 어지러움과 함께 흐릿하게 울렸던 알 수 없는 목소리.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 그거다.
분명히 그때 느꼈던 것과 똑같다.
마치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하지만 언젠가 일어났을 수도 있는 미래를 엿본 듯한 감각.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머리가 더 혼란스러워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일단 뒤로 미뤘다.
얼추 동요가 가시고 이성이 돌아오고 나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파악이 됐다.
나는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손을 떼고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놈은 더없이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들여서 만든 쇼를 끼어들어 망쳐버렸으니 제대로 빡친 모양.
일단 나서기는 했는데 놈과 대놓고 대치한 꼴이 된 것이다. 심지어 이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어째야 되나, 이제?
뒤늦게 후회가 차올랐지만 이미 저지른 일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관성과,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맴돌고 있는 찝찝한 기시감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복잡하게 섞인 가운데, 나는 입을 열었다.
"경기를 끝내라, 6군주."
경기장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관중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나와 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격노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던 놈도 입을 열었다.
"지금 뭘 하자는 거냐, 7군주?"
······나도 몰라, 씨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지금 득 하나 될 것 없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얼굴 몇 번 본 게 고작인 남매 하나 살리자고 다른 군주의 행사를 망쳐버렸으니.
그러나 이내 결정을 확고히 굳혔다.
이번 한 번은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저지르기로.
'얘네들은 살려서 데리고 나간다.'
방금 내게 일어난 이 알 수 없는 현상과 뭔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마냥 죽게 두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닐 것이다.
나는 가만히 폭왕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가 말했다.
"이 둘은 내가 데리고 가겠다."
"······뭐라고?"
놈은 이제 화가 끓어오르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광혈병의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말해라."
"······."
"치료법을 알려주고, 이 둘의 신변을 내게 넘긴다면 이번 건 빚으로 남겨두고 나중에 갚겠다."
적어도 내가 아는 광혈병의 치료법은 폭왕이 죽는 것밖에 없지만, 혹시나 놈이라면 다른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게 제안이 아니라 그냥 싸우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이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만에 하나라도 완만하게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당연히 그쪽 길을 선택해야 했으니까.
"하, 흐핫······."
하지만 역시 어림도 없는 모양이다.
놈이 실소를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쳐들고 쩌렁쩌렁하게 웃다가 서서히 소리가 그쳤다.
다시 고개를 내린 놈이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입을 뗐다.
"정신이 나갔군. 감히 내 행사를 망치고 지껄인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냐?!"
콰아아앙!
거대한 기운의 폭발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초감각으로 아슬아슬하게 반응하여 펼친 부동장막을 거두고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짐승이 할퀸 듯한 3갈래의 거대한 자국이 경기장을 반으로 나누고 새겨진 채였다.
사방에서 비명과 소란이 일었다. 공격에 휘말린 관중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간 것이 보였다. 혼란과 공포에 빠진 채 도망가는 사람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폭왕은 주위 공기가 붉게 물든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지독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론 님."
아래로 내려와 곁에 선 아셸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여전히 넋을 놓은 표정을 짓고 있는 리프와, 쓰러진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을 데리고서 멀리 물러나라."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셸이 곧바로 두 남매를 양팔에 안고서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다시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아니지. 정말로 아니야, 7군주. 지금 선을 굉장히 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놈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곳이 6군주령이면 내 방식을 존중할 필요가 있는 거야. 반대로 내가 7군주령에 방문했어도 너의 방식을 존중했을 거고. 한데도 내가 직접 공들여 차린 경기를, 내 눈앞에서 망쳐버려? 설령 대군주라 해도 이딴 식으로 날 무시할 수는 없다!"
구구절절 틀린 건 없는 말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놈이 벌이고 있는 게 끔찍한 악행이란 사실을 미뤄두고, 군주 대 군주의 입장으로만 봤을 때.
"내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남매를 도로 데려와라, 7군주. 그리고 내 눈앞에서 네 손으로 직접 죽여라. 그러면 이번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가지."
나는 놈의 말을 무시하고 머릿속으로 가늠해봤다.
94레벨의 혈왕.
고유 혈술은 육체 능력 증폭, 순수한 육체파에 가까운 초인. 그리고 방어막 따위의 능력은 없다.
······대충 할 만하다.
생각을 마친 나는 다시 말했다.
"광혈병의 치료법을 말해라."
놈은 내가 태도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입꼬리를 비튼 놈의 전신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권왕을 일격에 죽였다고 했었지? 어디 그 실력 좀 직접 보자고."
퍼어엉!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놈의 신형이 내 눈앞까지 도달했다.
나는 재차 부동 장막을 펼쳐서 주먹을 막았다. 주위 지반이 통째로 뒤집어지며 허공에 바위들이 비산했다.
이전에 오크킹의 일격을 막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이다.
경기장 반대편으로 순간이동한 뒤 혈술을 펼쳐 허공에 핏방울들을 띄워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놈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혈술?"
뱀파이어도 아닌데 혈술은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
그 의문에 굳이 답해줄 이유는 없었다. 놈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나를 향해서 돌진했다.
놈은 다행히도 내 주위에 떠있는 핏방울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접근해와서 주먹을 휘둘렀다.
공격은 다시금 장막에 막혔고, 놈의 육체는 내 핏방울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나는 다시 허공으로 순간이동했다. 아래에서 곧장 용오름처럼 피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솟아올랐고, 그 역시 장막에 막혔다.
"귀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나는 공간 도약과 부동 장막을 적절히 섞어 사용해 도망치고 방어했으며, 놈은 그런 나를 계속해서 쫓으며 공격을 퍼부었다.
폭왕은 기본적으로 광랑과 같은 육체파 초인에 속하지만, 놈은 순수하게 육체로만 싸우는 게 아니라 혈술까지 사용했다.
놈의 권격이나 혈기가 한 번 몰아칠 때마다 충격에 경기장 한편이 무너져내렸다. 아직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관중들은 그대로 떼죽음을 당했다.
점점 몰아치는 공격이 빠르고 강해짐에 따라 놈의 몸에서 자욱한 피 안개가 뿜어져나왔고, 어느새 일대를 뒤덮었다.
"······!"
나는 아찔함을 느끼며 순간이동을 하자마자 날아든 놈의 혈술을 간신히 막았다.
슬슬 공격에 반응하는 데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최대로 끌어올린 초감각도 94레벨 초인의 속도에 반응하기에는 좀 부족한 모양이었다.
부동 장막이나 공간 도약이 발동에 조금이라도 딜레이가 있는 능력이었다면 진작에 몸이 찢겨나갔을 것이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도망만 칠 거냐!"
놈이 부동장막을 펼친 채 공중에 떠있는 나를 바라보며 기세등등하게 포효했다.
내가 저 괴물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은 방어와 도주밖에 없다. 죽일 게 아니라면.
그래서 안전장치로 공방 와중에 틈틈히 혈술을 펼쳐 놈에게 내 피를 묻혀둔 것이었다.
공격을 막는 데에 한계가 오면 그냥 즉살로 죽여버려야 했으니까.
애초에 믿는 구석이 없었으면 저 괴물 놈과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즉살 말고도 믿고 있는 건 하나 더 있었다.
전투가 시작됐을 때부터 놈에게 발동해둔 가스칼리드의 혈술.
가스칼리드의 생전 레벨은 95, 그리고 폭왕의 레벨은 94였다.
아직까지는 전혀 통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에 레벨 차이가 너무 미미해서 통하지 않나 싶었지만······.
'······왔다.'
어느 순간이 지나자, 내 육체에 서서히 힘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부동 장막만 펼친 채 제자리에서 버티기에 들어갔다.
내 바로 아래에서 연신 혈술을 퍼붓던 폭왕의 기세가 서서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슬슬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놈도 공격을 멈추고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와중에도 내 몸에 흘러들어오는 기운은 시시각각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지면으로 내려와 폭왕과 마주 보고 섰다.
당황하고 있던 놈이 내게 물었다.
"이 빌어먹을······ 무슨 술수를 부린 거냐?"
"글쎄."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린 놈이 거칠게 포효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더 이상 좀 전만큼 강력하지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르지도 않았다.
나는 여유롭게 놈의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발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Lv. 90】
【Lv. 89】
【Lv. 88】
.
.
.
재밌는 건 놈의 레벨 정보도 힘을 빼앗김에 따라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었다.
레벨의 기준이 그 대상의 현 시점에서의 힘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놈의 레벨은 계속해서 내려가고 내려가 이제는 아셸보다도 한참 낮아지게 되었을 때.
【Lv. 70】
"이 인간 놈이! 내 몸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아아아!"
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울부짖었다.
나는 내 육체를 가득 채운 미증유의 힘을 느끼며, 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놈이 창백하게 질려 뒤로 물러섰다.
"이······!"
놈이 꼴사납게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쥐었다 펴고 있다가, 발을 굴렀다.
콰아앙!
한 번의 발구름에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놈은 다급히 팔을 올려 방어하려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가 아무리 몸으로 치고받는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는 초짜라도, 이미 놈과 나 사이의 육체 능력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겼다.
쩌어어엉!
내 주먹에 얻어맞은 놈이 그대로 날아가서 무너진 경기장의 잔해에 처박혔다.
나는 조금 얼얼한 손을 털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었다. 리프의 검이었다.
"끄으으······."
정신을 못 차린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놈에게 다가가서, 목에 검날을 가져갔다.
"광혈병의 치료법은?"
이런 식으로 패배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지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놈이, 이내 실성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딴 건 없다."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없어, 이 개 같은 새끼야! 없다고! 네가 뭔 지랄을 해봐야 그 애새끼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단 말이다!"
"······."
"그딴 웃기지도 않은 협박은 집어치워라. 어디 다음 군주 회의에서 두고보자고. 이번 일은 명백히 네놈이 먼저 시작한 일이다! 내가 직접 대군주께······."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건가?
놈을 제압한 것도 헛수고고, 결국 처음부터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놈도 서서히 지껄이던 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봤다.
"사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뭐?"
"아주 간단한 방법이지. 네가 죽으면 된다. 그럼 이 대륙에서 광혈병은 완전히 사라질 테니."
놈이 멍청하게 날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내가 죽으면 광혈병이 낫는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글쎄."
게임에서는 그랬으니까.
어차피 설명해봐야 놈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나는 놈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놈이 침을 꿀꺽 삼키고서 말했다.
"정말 날 죽이겠다고? 군주가 군주를?"
"······."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라. 칼데릭을 적으로 돌릴 셈이냐? 대군주가 네 목숨을 직접 거두려 들 거다! 그깟 애새끼들 하나 때문에 지금 날 죽이겠단······!"
촤아악!
검날이 내리쳐졌고, 놈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야 죽은 놈이 걱정할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