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리곤 (8)
길로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옷을 챙겨 입었다.
허리춤에 메인 검을 뽑아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도로 검집에 집어넣고 벨트를 꽉 고정했다.
철컥.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한 여인이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준비는 다 끝나셨어요?"
"음."
"자, 여기. 레몬하고 설탕하고 섞은 에이드예요. 쭉 들이키세요."
길로크는 여인이 건넨 음료를 단숨에 들이키고 빈 컵을 넘겼다.
"그럼 다녀오세요."
현관으로 나선 그는 자신을 배웅하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밝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얼굴 한편엔 숨길 수 없는 미약한 어두움이 깃들어있는 게 느껴졌다.
경기 때면 매번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그늘이 짙은 느낌이었다.
여인은 길로크의 아내였다.
노예상에게 억울하게 붙잡혀 수감소까지 끌려왔던 그녀를 길로크가 구해줬던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길로크는 새삼 생각했다.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고.
평생을 검이나 휘두르다 쓸쓸히 죽게 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을 만났으니.
"걱정 마, 엘리. 이기고 돌아올 테니."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춰주고서 길로크는 저택을 나섰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 악티폴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대기실로 이동했다.
"시간이 다 됐소."
어두운 복도를 걸어 경기장으로 나서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길로크는 관중석을 한 차례 둘러보고서 앞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반대편의 철창에서 먼저 나와 서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리프.'
이쪽을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그녀를,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챔피언전.
지금껏 수많은 도전자들을 꺾어왔지만, 이번 경기는 길로크에게 있어서도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처음 리프의 경기를 봤던 건 대충 3년쯤 전이었던가.
당시는 길로크가 막 새로운 챔피언이 되었을 즈음의 시기였다.
아직 여인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여린 소녀가 한 자루 검을 쥐고 경기장에 섰다.
상대는 그 배는 되는 덩치의 사내였다. 누가 봐도 애초에 성립될 것 같지 않던 경기.
모두의 예상대로 리프는 손쉽게 제압당했고, 사내는 그런 그녀를 곧바로 죽이지 않고 덮치려 들었다.
악티폴에선 상대 검투사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모든 게 퍼포먼스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결국 살아남은 쪽은 리프였다.
길로크는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뇌리에 선명히 각인된 것만 같았다.
몸 위에 올라탄 사내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목을 섬전처럼 물어뜯었던 리프의 모습을.
기겁하며 단검을 뽑아든 그가 옆구리를 연신 찔러도 놓지 않고, 기어코 아득바득 버티던 지독한 독기를.
사내의 몸이 축 늘어져 더 움직이지 않게 된 뒤에도 리프는 그의 목을 물고서 놓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후에도 계속.
"······."
길로크는 슬쩍 고개를 돌려 경기장의 위쪽을 올려다봤다.
또한 잊지 못했다.
그 경기를 모두 지켜본 6군주의 입가에 걸렸던, 섬뜩하고 악의 가득한 미소를.
'저 계집, 동생이 광혈병에 걸렸다고 했었나?'
'······예, 그렇습니다.'
'죽지 않게 치료해서 살려라.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싸우는 법도 가르쳐보고.'
그 명령대로 길로크는 리프에게 여러가지를 가르쳤다. 마력을 쌓는 법, 검을 휘두르는 법, 몸을 움직이는 법······.
물론 리프도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뭐라도, 누구에게라도 배울 수 있으면 배워야만 했으니까.
그저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 외에 감정의 교류는 일절 없었다.
분명 길로크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지만 둘은 사제 사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묘한 관계였다.
그녀는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빠르게 강해졌다. 워낙 필사적이기도 했지만 본래 전투에 타고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리고 시간은 흘러 순식간에 5계의 검투사가 되었고, 이제 챔피언의 자리에 도전하기 위해 바로 눈앞에 서있었다.
'이렇게 됐군, 결국은······.'
길로크는 짧은 상념을 마쳤다.
예전이었다면,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가던 때였다면 이 경기를 그냥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게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 구해야만 하는 동생이 있듯, 그에게도 지켜야 하는 행복이 있었으니.
- ······모두가 기다리시던 챔피언전! 그 대망의 경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리프가 먼저 몸을 날렸다.
사납게 돌진해오는 그녀를 보며 길로크는 차분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카앙!
두 검투사의 검이 맞붙었다.
길로크가 리프의 검을 강하게 튕겨냈다. 그녀는 허리를 꺾어 이어진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곧바로 다시 검을 휘둘러 하단을 노렸으나 간단히 막혔다.
푸른 검기에 휩싸인 두 검날이 연신 부딪히고 엉켰다. 어지러운 공방이 오고 갔다.
주로 공격하는 쪽은 리프였다. 그녀는 광인처럼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듯 미친 듯이 길로크를 몰아붙였다.
길로크는 여전히 처음과 같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몰아치는 공격을 전부 피하고, 막아냈다.
리프의 모습은 반쯤 이성을 잃고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길로크는 알았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차가운 냉정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수한 실력만으로 부딪히면 길로크를 이길 수 없다는 건 그에게 검을 배운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방심을 끌어내는 수밖에 없다.
먼저 틈을 드러내 상대의 틈을 찾는 것, 아주 작은 방심이라도 좋으니 그 틈을 비집고 어떻게든 검날을 쑤셔넣는 것, 그것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나마의 가능성일 뿐이었다.
길로크는 당연하게도 그런 그녀의 의도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함부로 방심 같은 걸 하는 인간이었다면 지금까지 챔피언 자리에서 이토록 오래 살아남지도 못했으리라.
퍼억!
길로크의 발차기가 리프의 복부에 꽂혔다.
리프는 헛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섰다. 잠시의 겨를도 주지 않고 공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선다는 듯 길로크는 매섭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리프는 연신 뒤로 물러서기만 하며 방어하기 급급했다.
온몸에 잔상처가 점점 늘어간다. 순식간에 뒤집힌 양상은 다시 역전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리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어떻게든 넘어간 기세를 되찾으려고 발악했다.
어느 순간, 길로크의 검이 섬전처럼 그녀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끅······!"
길로크는 잠시 검을 거두고서 휘청거리는 그녀를 비정히 응시했다.
만약 리프에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시간이 촉박하지 않았더라면 언젠간 분명 길로크를 꺾고 챔피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둘 사이에는 넘기 힘든 근본적인 실력의 차이가 있었다.
피가 쏟아져나오는 옆구리를 붙잡은 채 리프가 곧장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녀의 안광이 형형히 번뜩였다.
여전히 투지가 조금도 꺾이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뿐이었다.
길로크도 재차 검을 치켜들고 자세를 잡았다. 더 끌지 않고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
'설령, 네가 챔피언이 되었다고 해도······.'
어차피 그녀의 동생은 처음부터 살릴 수 없는 목숨이었다.
길로크는 그것을 확신했다.
6군주 폭왕, 그 악마가 얼마나 치가 떨리도록 악랄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이렇게 죽는 게 그녀에게는 차라리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그가 입을 열고 작게 중얼거렸다.
"네 동생의 마지막은 내가 곁에서 배웅해주마."
리프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길로크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촤아악!
길로크의 검격이 그녀의 몸 곳곳을 베고 지나갔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간신히 막기만 하는 게 고작이었다. 중상까지 입은 마당에 더 이상의 결투는 성사되지 않았다.
"크아아아!"
리프는 처절하게 포효하며 악에 받쳐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길로크에게 조금도 닿지 않았다.
바닥에 시뻘건 선혈이 낭자했다.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리프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급소만큼은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길로크는 그만 끝을 내려고 했다. 전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옆구리를 베어오는 이 검격을 튕겨낸 후, 그대로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속에서 치솟아오르는 구역감과 함께, 길로크는 한순간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공격을 막지 못했다. 리프의 검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그의 몸이 휘청였다.
리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필사적으로 찌른 검이 그의 심장을 노렸다.
"······!"
길로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관통한 검날을 내려다봤다.
몸이 무겁고 차가웠다. 마치 독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그것은 단지 지금 심장을 꿰뚫은 검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대체······.'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집에서 나오기 전, 아내가 건네주었던 음료.
길로크는 간신히 고개를 틀어 경기장의 가장 위쪽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6군주의 모습을.
'······아.'
그제야 길로크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전부 정해진 결과였음을.
그는 허망한 눈으로 리프를 바라봤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그녀는 필사적으로 검자루를 쥔 채 버티고 서있었다.
'결국 너나, 나나 끝까지······.'
저 악마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다 죽는구나.
검이 뽑히고, 길로크의 몸이 허물어졌다.
***
거친 숨을 몰아쉬며, 리프는 멍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길로크를 바라봤다.
'······이겼어.'
이겼다.
길로크를 죽였다. 챔피언을 쓰러뜨렸다.
속에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치솟았다. 기쁨과 슬픔, 성취감과 죄책감 따위의 상반된 것들이 덩어리처럼 뒤섞였다.
리프는 입술을 꽉 짓씹고서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관중석에서는 자그마한 환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관중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곧 폭왕이 자리해있는 바로 아래까지 이동한 리프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가 이겼습니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갈라지는 목소리로 쩌렁쩌렁 외쳤다.
"제가 이제 악티폴의 챔피언입니다!"
고요한 정적 속, 폭왕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래······."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조용하지만 거대한 음성이 경기장 전체에 선명히 울려퍼졌다.
"어디 소원을 말해봐라."
"제 동생!"
리프는 차오르는 격정에 잠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가, 다시 외쳤다.
"위대하신 6군주님께 간청드립니다! 부디 동생의 광혈병을 치료해주십시오! 소원은 오직 그것 하나뿐입니다!"
폭왕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동생의 병을 고쳐달라고?"
"······."
"혈육에 대한 정이 참 갸륵하구나. 좋다, 네 바람대로 동생을 치료해주도록 하마."
리프의 얼굴에 환희가 차오르려는 순간이었다.
"한데 그 전에, 아직 남은 게 있다."
"······예?"
그녀가 멍하니 폭왕을 올려다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건 마치, 지금까지 오랫동안 공들여 키워낸 달콤한 과실을 막 따낼 순간을 맞이한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폭왕이 경기장 한편에 있는 사회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길을 받은 사회자가 곧바로 외쳤다.
- ······자, 그럼! 몇 년 만의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이벤트 경기가, 지금 바로 이어서 시작됩니다!
그에 관중석에서 소란이 일었다.
본래 챔피언전에 그런 이벤트 경기 같은 건 여지껏 없었으니까.
쿠르르르.
경기장 한쪽에 위치한 철창이 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은 검투사가 아닌 포획한 몬스터가 나오는 문이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프의 표정이 서서히 알 수 없게 일그러졌다.
문에서 걸어나온 건 익숙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다만 다른 건, 전신이 검붉게 물들어 완전히 괴물과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
"아, 아······."
리프는 그런 소년을, 동생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신음을 뱉었다.
크르르.
소년이 시뻘건 안광을 번뜩이며 그녀를 노려봤다.
제 누이가 아닌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적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 동생의 병은 얼마든지 고쳐주마. 고쳐주고말고. 물론 그 전에 남은 경기부터 끝내야겠지?"
폭왕의 웃음 섞인 말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있는 리프를 보며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자, 뭘 하고 있는 거냐? 어서 저 괴물을 죽이지 않고."
이성을 잃고 폭주한 소년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
"······."
나는 경기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참극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챔피언전을 관전하러 온 건, 도시를 떠나기 전에 그냥 결과만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상점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이 걸렸기에.
하지만 경기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군.'
나는 저멀리 경기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혈왕을 노려봤다.
동생에게 일부러 더 혈기를 주입해서 광혈병을 폭주시킨 건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폭왕, 놈의 악의는 상상을 가볍게 초월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제 손으로 동생을 죽이거나, 아니면 동생의 손에 죽어야만 했다. 악티폴의 경기는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것이었으니까.
옆에 있는 아셸도 참담하게 굳은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관중들은 방금 전 길로크와의 경기보다 더욱 흥분에 차서 환호하고 있었다.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나는 그녀를 도와줄 수 없다.
애초에 광혈병은 폭왕이 죽어야만 사라지는 병.
저 자매를 구하자고 폭왕과 적대하고 놈을 죽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군주가 같은 군주를 죽이는 건 칼데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절대적인 철칙이 있기에 각자 다른 성향의 군주들이 서로에게 일절 간섭하지 않는 것이고, 칼데릭의 질서와 체계가 몇백 년의 세월 동안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쯧."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더 이곳에 있기도 역겨웠기에 그만 경기장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
순간 밀려드는 엄청난 두통에 나는 이마를 잡고 휘청였다.
아셸이 놀라서 나를 붙잡았다.
"······론 님? 왜 그러십니까?"
나는 그런 그녀를 밀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게······.'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기억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기시감? 데자뷰?
마치 언젠가 한 번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은 기이한 감각.
[전부, 전부 죽여버리겠다!]
죽은 여인, 리프의 시체를 붙잡고 울부짖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스쳤다.
[너, 마족이랑 계약했구나? 아아, 좀처럼 보기 힘든 자질을 타고났는데 그걸 쓰레기통에 처박고, 아깝게 됐네.]
시간이 흘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해버린 소년과, 그런 그를 제압하고 앞에 서있는 대군주의 모습이 스쳤다.
[어때, 나랑도 계악을 하는 건? 네 목숨은 살려줄게. 대신 너는 칼데릭의 7군주가 되는 거야. 딱 5년이면 돼. 그 뒤에는 네가 뭘 하든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어느 도시.
타오르는 열화 속에서, 환하게 미소를 지은 채 대학살을 벌이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스쳤다.
"······."
이내 두통이 가시고, 더 이상 스쳐가는 기억 따윈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시 경기장을 내려다봤다.
제 누이를 죽이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소년을 멍하니 응시했다.
***
리프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소년은 마치 맹수처럼 달려들며 그녀를 붙잡고 물어뜯으려 했다.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괴력이었다.
그에 대항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검을 휘둘러 반격할 수도 없고, 그저 공격을 쳐내는 게 고작이었다.
크아악!
동생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쳐도, 돌아오는 건 지독한 살의에 찬 괴성뿐.
울려퍼지는 관중들의 함성 속에 리프는 그렇게 한참을 동생과 씨름했다. 그러나 진작 한계에 달했던 몸이었다.
"으······!"
리프는 자신을 깔아뭉갠 채 이빨을 들이미는 소년의 얼굴을 간신히 붙잡았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목을 물어뜯기 위해 미친 듯이 발악하는 동생을,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이보다 끔찍한 악몽이 또 있을까.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점점 빠졌다.
꿈이라면 깨고, 현실이라면 그냥 이대로 다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힘이 다한 건 소년 쪽이었다.
소년의 몸이 옆으로 털썩 넘어갔다. 기운이 다해 폭주가 끝난 것이었다.
리프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동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즐거워 죽겠다는 웃음을 입가에 건 채 이쪽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어서 끝을 내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사방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온몸에 수북한 상처 때문이 아니라, 저 악마들의 함성 때문에.
리프는 풀린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고, 쓰러진 소년이 아닌 자신의 목에 검날을 가져다 댔다. 그들의 바람대로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
그 순간이었다.
텁.
검을 쥔 손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리프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서있었다.
방금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함성들은 어디에도 없고, 경기장에 지독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허?"
즐겁게 웃고 있던 폭왕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쓰러진 소년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 7군주의 입이 나지막이 열렸다.
"경기를 끝내라, 6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