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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63화 (63/189)

리프리곤 (7)

늦은 밤, 여관에서 나와 거리를 걸으며 가벼운 산책을 했다.

아셸은 지금도 굴피로의 상점을 지켜보고 있기에 나 혼자였다.

고생을 시켜서 미안하긴 하지만 과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세인테아 측의 추적자든, 아니면 폭왕이 보낸 끄나풀이든, 남은 시간 동안 어느 쪽이 굴피로에게 접근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으니까.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저번에 가이탄 호에서도 내가 떠나자마자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이 해린족을 습격해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었던가?

"이건 얼마지?"

"동화 한 닢입니다, 나으리."

나는 야시장이 열린 밤거리에서 먹을 만한 간식을 구매했다.

나온 김에 아셸에게도 좀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의 몫까지 챙겼다.

그리고 포션 상점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초감각에 미약한 기운의 충돌이 걸렸다.

"······?"

나는 인상을 굳힌 채 서둘러 포션 상점을 향해서 뛰었다.

행인들의 눈을 피해 공간 도약까지 사용하며 상점에 도달하자 보인 풍경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난장판이 된 내부와 검을 쥐고 서있는 아셸.

'휴우······.'

대체 무슨 난리야?

그래도 다행히 늦지 않았구나 싶어 뛰던 걸음을 멈추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 등장이 갑작스러웠는지 아셸과 굴피로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게 말했지 않았나? 혹시 모른다고."

굴피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로브를 뒤집어쓴 남성과 여인.

나는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프?

'쟤는 왜 또 여기에 있어?'

그녀 역시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아셸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Lv. 63】

침입자로 보이는 쪽은 남자였다. 외관으로 보아 뱀파이어였다.

설마 정말로 폭왕 쪽에서 보낸 놈인가?

"넌 뭐냐, 흡혈귀."

놈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침묵한 채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리던 놈이 기습적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허공에 시뻘건 핏빛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곧바로 가스칼리드의 혈술을 사용했다.

그러자 불꽃이 사그러들더니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뭐, 뭣?"

놈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놈에게서 강탈한 혈술을 펼쳐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폭발하듯 터진 혈화가 놈을 뒤덮었다.

놈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폭발에 통째로 뜯겨나간 한쪽 팔을 붙잡고서 억눌린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악······!"

대충 이런 능력이군.

가스칼리드의 혈술은 뱀파이어를 상대로는 정말 완전한 카운터나 다름없었다.

나는 쓰러진 놈의 앞으로 다가가서 섰다.

"6군주가 보냈나?"

그렇게 물으며 손에 다시금 혈화를 피어올리자, 놈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6군주님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뭐냐."

"그, 그것이······."

놈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고 보니 마헤아 시에는 6군주와 같은 고향 출신의 뱀파이어들이 꽤 있었던가?

몇몇은 군주성에도 있고, 몇몇은 따로 조직들을 창설해서 열심히 6군주의 발을 핥아주고도 있고······ 아.

'설마 그쪽인가?'

6군주령 제일의 정보 조직인 놀헤이브.

왠지 모르게 정보 조직 쪽과 관련된 놈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떠보듯 물었다.

"놀헤이브냐?"

"······!"

순간 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하고 굴피로에게 물었다.

"이놈이 정체를 알고 찾아온 건가?"

"······그렇소. 대체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르면 지금부터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다시 놈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대답에 뜸을 들이면 죽이겠다. 어떻게 굴피로의 존재를 알았지?"

내가 불꽃을 더 크게 피어내자 놈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저 우연입니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라."

이어진 놈의 설명은 이러했다.

대연금술사 굴피로와 그가 도시에 도착한 시기가 겹친 것, 한 난치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준 것, 그리고 외관에 대한 것까지.

설명을 모두 들은 나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굴피로를 돌아봤다.

그 역시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흘렸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들켰다고? 허······."

어쨌든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만약 정말로 폭왕 쪽에서 보낸 거였다면 괜히 또 놈과 얽혀서 일이 성가셔졌을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엘릭서를 탐내서 상점을 습격했다는 거군."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놈을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굴피로의 정체까지 알게 된 놈이니 자비를 베풀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제 최후를 예감했는지 놈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자, 잠깐만······!"

놈의 전신이 화염에 뒤덮였다.

거칠게 넘실거리던 불꽃은 순식간에 놈을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다.

"허어, 참······."

탄식을 흘리고 있던 굴피로가 나와 아셸에게 말했다.

"고맙소. 두 분 덕분에 살았소. 하마터면 정말로 큰일날 뻔했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아있는 한 사람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받은 여인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쟤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자세한 상황이 궁금해서 굴피로에게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가 먼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방금 그건 어떻게 한 것이오? 마치 그 뱀파이어의 능력을 빼앗은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놈의 혈술을 빼앗은 게 맞다."

"호오······ 그런 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이오? 마법일 리는 없고, 설마 신비인가?"

굳이 자세히 대답해주진 않았다.

"혀, 혈술을 빼앗아?"

그때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시 시선을 옮기니, 그녀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혈술을 빼앗을 수가 있다고? 정말?"

"······그래, 그런데 왜."

나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그녀가 난데없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제발 도와주세요, 나으리. 제, 제 동생이 광혈병에 걸렸어요."

"······."

"혈술을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이면 그 병도 고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 거죠? 그러니 제발······."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절박하게 애원하는 그녀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내 시선을 무슨 의미로 이해한 건지 그녀는 아예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요, 나으리······ 제게 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가진 재산도 전부 바치겠습니다. 개처럼 짖으라면 짖고 핥으라면 핥겠습니다. 제발 제 동생만······."

"이봐."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는 네 동생의 병을 고쳐줄 수 없다."

"······."

"이건 혈술 자체를 빼앗는 것이지, 혈술의 능력에 중독된 누구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광혈병은 오로지 폭왕의 목숨이 끊어져야만 세상에서 사라지는 병이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설령 내가 폭왕의 혈술을 빼앗는다고 해도 이미 광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줄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건 애초에 놈에게 있어서도 자의로 제어가 가능한 능력이 아니었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가 날 허망히 올려다봤다. 절망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녀가 이번엔 굴피로에게로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에, 엘릭서. 엘릭서라면? 엘릭서라면 내 동생을 치료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네? 플레온 영감님······."

"치료할 수 없다."

굴피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광혈병이 어떤 병인지 말했지 않느냐. 조금이라도 마력이 포함된 포션이라면 맹독만 될 뿐이다. 그게 설령 엘릭서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주저앉아있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왜?"

울분과 억울함에 가득 찬 표정으로,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왜, 왜! 왜 안 된다는 건데! 엘릭서잖아!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신약이잖아! 근데 왜!"

"······."

"왜 그깟 병 하나를 못 고친다는 거냐고, 씨발······ 왜 다들 안 된다고만 하는 건데······ 왜······."

그녀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위태로운 걸음으로 가게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도 굴피로도, 아셸도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

거리를 방황하다 집으로 돌아온 리프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다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간병인 여인이 피를 토하며 발작하는 소년을 온몸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검붉은 핏줄이 터질 듯 솟아나있었다.

"꺼르륵······!"

리프는 간병인과 함께 한참을 씨름해 간신히 소년을 진정시켰다.

날이 다 밝았을 즈음에나 의원을 불러와서 상태를 살폈다.

소년의 몸을 진찰한 의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계가 왔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고."

"······."

의원도 간병인도 내보내고, 리프는 방에 홀로 남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동생을 내려다봤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녀는 양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이른 아침부터 악티폴의 경기장에는 거대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평소에도 경기 때면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였으나, 오늘은 특히나 그 정도가 심했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바로 오늘 악티폴에서 열리는 경기는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경기였으니까.

챔피언전, 좀처럼 관전하기 힘든 그 빅매치를 보기 위해 모든 관중들이 기대를 품고 몰려든 것이었다.

"기어코 챔피언에게 도전을 했구만. 오늘 드디어 리프 그 년의 목이 날아가는 꼴을 볼 수 있는 건가?"

"하하, 그거야 모를 일이지. 절대로 못 이길 거라고 예상했던 시합들도 전부 역전해서 지금껏 살아남은 독한 년인데."

"그것도 그렇긴 하지. 그래서 자네는 리프 쪽에 걸 건가?"

"아니, 그래도 돈은 챔피언한테 걸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길로크를 꺾기엔 아직 역부족이지 않겠나."

"뭐? 하하!"

지금껏 10번도 넘는 방어전에서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철벽의 챔피언, 길로크.

그에 도전하는 건 지난 몇 년 동안 누구보다도 빠르게 5계의 검투사 자리까지 올라온 리프.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관중석에는 벌써 흥분과 열기가 가득했다.

몰이꾼들이 도박에 돈을 걸라고 사람들을 재촉하고, 서로가 목소리를 높여 경기의 결과에 대해 예측했다.

"그런데 어째 좀 서둘러서 챔피언 자리에 도전한 느낌이란 말이지."

"그거 아니겠어? 동생이 광혈병에 걸렸잖아. 슬슬 더 끌고 있을 수도 없이 위태로운 모양이지."

"오, 그런가? 그럼 이번에 패배하면 동생까지도 바로 누이를 뒤따라서 죽겠구만, 큭큭."

악티폴의 검투사 중에서도 가장 유명인사인 리프의 사정에 대해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광혈병에 걸린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서 챔피언이 되려고 하는 것.

물론 그런 리프를 동정하는 관중은 누구도 없었다.

그 간절함조차 그들에게 있어선 그녀의 마지막 최후를 더욱 비참하게 장식해줄 흥미진진한 배경이었을 뿐이니.

대기실에서 리프는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꽉 쥔 주먹을 내려다봤다.

마음은 이상하게도 차분했다. 아니, 차분하다기보다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

그래, 새삼 무얼 기대했던 건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기댈 곳 따윈 어디에도 없었는데.

누군가의 동정도, 도움도 필요 없다. 그딴 걸 기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악티폴에 들어왔던 그날, 필사적으로 첫 경기에서 승리했던 그날 다짐하지 않았던가?

반드시 챔피언이 되어 동생을 치료하고야 말겠다고······.

"나와라. 입장할 시간이다."

이제 그 마지막이 다가왔을 뿐이다.

대기실로 들어온 병사의 말에 리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활짝 열린 철창을 통과하자 보인 건 푸른 하늘, 그리고 사방에 들어찬 관중들.

와아아아!

기대감과 흥분에 찬 역겨운 함성들이 울렸다.

리프는 고개를 들었다.

경기장의 가장 높은 곳,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는 6군주의 모습이 보였다.

- ······다음으로 현 챔피언, 길로크가 입장합니다!

다시 시선을 내려 서서히 올라가고 있는 반대편의 철창을 응시했다.

경기장으로 걸어나오는 길로크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살의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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