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62화 (62/189)

리프리곤 (6)

마헤아에 본진을 두고 있는 거대 정보 조직, 놀헤이브. 수장 데르산의 업무실.

"무슨 일이냐? 헐레벌떡 와가지고."

소파에 반쯤 누워 과자를 씹고 있던 데르산이 남자를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어딘가 다급한 기색으로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형님, 내가 엄청난 걸 알아낸 것 같소."

"······뭐? 뜬금없이 뭔 개소리냐."

"농담 아니니까 일어나서 제대로 들어보시오. 도시 동쪽의 1번가 골목에 있는 무명의 포션 상점을 아시오?"

데르산은 이놈이 뜬금없이 뭔 소리를 하나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름 없는 포션 상점? 몰라. 왜."

"그곳에 플레온이라는 노인이 주인으로 있는데 말이오, 내가 어쩌다 그 양반의 행적에 대해서도 좀 파고들게 됐는데······."

남자가 책상에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데르산은 그것을 집어들고서 슥 훑어봤다.

귀찮음 섞인 얼굴로 빠르게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미간을 좁힌 채 한참이나 종이를 뒤적거리다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나지막이 물었다.

"······이거 진짜냐?"

"그럼 거짓이겠소?"

남자가 조사한 내용들은 이러했다.

몇 달 전, 작은 여관을 운영하는 호든이라는 인물이 회복하기 힘든 난치병에 걸린 것.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뛰어난 마법사에게 거액을 갖다바쳐야나 치료할 수 있는 병을 그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완치했다는 것.

다른 것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호기심에 그에 대한 조사를 가볍게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튀어나온 자가 바로 무명 상점의 주인인 플레온이었다.

여러 정황들을 통해 그의 병을 치료해준 것이 플레온이라 판단한 남자는 이번엔 플레온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1년 전 마헤아 시에 자리를 잡은 인물.

사실 그와 관련된 눈에 띄는 정보는 별달리 없었고, 순간의 호기심과 변덕으로 시작했던 조사는 거기서 접어도 무방했다.

그때 남자가 하나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떠올렸던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왜냐면 근래에 대륙을 떠들석하게 했던 세인테아의 대연금술사, 굴피로의 실종 시기 역시 약 1년 전이었으니까.

얼마든지 우연일 수 있는 시기의 맞물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설마 하면서도 계속해서 플레온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경악스럽게도, 그 터무니없는 가정에 확신을 더해주는 정황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에 가장 확정적인 것은 굴피로의 외관에 대한 정보였다.

녹색의 수염과 머리칼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굴피로와 달리 플레온의 외관은 주황색 머리칼과 수염이었으나, 조사 과정에서 그것이 염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에 도시에 찾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의 수염과 머리칼이 녹색이었다는 증언을 안면이 있는 몇몇 사람에게서 캐냈으니.

누군가의 눈에 띄는 걸 피하려는 게 아니려는 이상, 난치병을 고칠 만큼 실력이 뛰어난 연금술사가 그런 작은 포션 가게나 운영하면서 외관까지 바꾼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게 남자는 플레온이라는 인물의 정체가 세인테아에서 도주해온 대연금술사 굴피로라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

"······."

데르산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없이 종이를 반복해서 훑었다.

한참이나 아무 반응이 없자 남자가 조금 답답한 듯 말했다.

"정황적인 증거뿐이라도 이건 거의 100퍼센트요, 형님."

"······그래, 그렇군."

"고민할 것도 없지 않소? 6군주님께 어서 보고를 올립시다."

남자의 말에 데르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둘은 6군주 폭왕과 같은 레오셀 산맥 출신의 뱀파이어다.

그가 부족을 학살해 멸망시키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를 따랐던 부족원들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폭왕의 후광에 기대어 6군주령 제일의 정보 조직을 키워낼 수 있었으나, 그도 요즘은 과거의 영광이었다.

폭왕의 관심이 점점 시들해지며 신경에 거슬리는 경쟁 조직들도 하나둘씩 생겨나고, 군주성의 관리들까지 슬슬 눈치를 보며 은근히 조직을 이리저리 찔러대고 있는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보를 알고 있는 건 너뿐이냐?"

데르산의 물음에 남자가 뭘 당연할 걸 묻느냐는 듯 대꾸했다.

"그렇지, 조사야 수하들이 했지만 내가 다 끼워맞춘 거니까······."

말을 잇던 남자가 퍼뜩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데르산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잠······."

화아악!

허공에 피어오른 핏빛의 화염이 순식간에 남자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이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해버렸다.

방금까지 남자가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데르산이 혀를 찼다.

"멍청한 놈아, 6군주 그놈이 아직 우리에게 남은 관심이 있는 것 같더냐?"

갈수록 궤를 벗어난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 놈에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고향의 일족조차도 아무 의미가 없다.

예전이면 몰라도 더 이상 폭왕에게 무언가를 갖다바쳐서 얻을 수 있는 콩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데르산은 그를 잘 알았다.

아무렇지 않게 몇십 년을 함께한 의동생을 죽여버린 데르산은 조금의 안타깝다는 기색만 내비치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릭서를 제작한 세인테아 출신의 대연금술사.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는 직접 찾아가보는 수밖에 없다.

아는 사람은 남자뿐이라고 했지만 조사 과정에서 눈치를 챈 다른 조직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서둘러야 할 것이었다.

"굴피로······."

그의 두 눈이 흥분과 탐욕이 번뜩였다.

***

늦은 밤, 가게를 정리하고 있던 굴피로는 때 늦은 손님을 맞이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리프를 보며 그는 굽히고 있던 허리를 쭉 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그녀가 어수선한 가게 내부를 슥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떠나기 전에 동생의 상태를 한 번만 더 살펴봐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굴피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돈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 않느냐? 더 봐도 달라질 건 없다고."

굴피로 역시 리프의 사정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마헤아 시에서는 그녀에 대해 모르는 이를 더 찾아보기가 힘드니까.

애초에 그녀의 동생에게 맞는 포션을 제작해서 지금까지 제공해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처음 그녀가 가게에 찾아왔던 게 반 년 전이었던가?

그녀의 사정을 들은 굴피로는 직접 집으로까지 찾아가 그녀의 동생의 상태를 직접 살폈었다.

광혈병의 혈기는 마력과는 완전히 상극인 힘을 지닌 기운이었다.

애초에 마력을 가진 대상은 중독되지 않지만, 이미 한 번 중독된 대상에게 있어서는 마력이 치명적인 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마력이 아예 들어가지 않은 포션을 제작하여 동생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는 포션을 제작해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게 간신히 붙잡고 있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요즘 가게에 찾아오는 빈도가 늘어난 것만 봐도 포션의 약효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이상 결국 그녀의 동생은 죽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광혈병, 6군주 폭왕의 고유한 혈술에 접촉한 이들이 겪는다는 불치의 병.

그것은 대연금술사인 굴피로에게 있어서도 어떻게 치료할 방도가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는 리프의 처지를 동정했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돌아가거라."

"······."

리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양손에 주먹을 꽉 쥔 채 굴피로를 반쯤 노려보고 있다가, 이내 체념한 기색으로 몸을 돌렸다.

"······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녀가 가게 밖으로 도로 나가려고 하는 순간 먼저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손님에게로 옮겨졌다.

로브를 뒤집어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

그가 굴피로와 리프를 한 차례 번갈아 보고서 입을 열었다.

"구매하고 싶은 포션이 있는데······."

굴피로의 안색이 미약하게 굳었다.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애초에 평범한 손님이 찾아올 시간이 아니었다.

"말해보시게. 혹시 급하게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도 있나?"

"아니아니, 그건 아니오."

남자가 후드를 걷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구매하고 싶은 물건은 엘릭서요, 대연금술사 굴피로."

"······!"

굴피로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남자, 데르산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맞군."

"······네놈은 누구냐?"

데르산은 대답 없이 리프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에 굴피로는 다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을 펼쳤다.

콰아앙!

허공에서 혈기와 마력이 충돌했다.

굴피로의 방어 덕분에 직격당하지는 않았으나, 그 충격에 리프는 가게 한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컥······!"

굴피로가 곧바로 다음 마법을 펼치려고 할 때였다.

순식간에 지척까지 접근한 데르산이 어느새 뽑아든 단검을 목에 겨누고 있었다.

"······."

굴피로는 그런 그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두 손을 내렸다.

데르산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시오."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아, 그건 오해 마시고. 난 당신에게는 전혀 적의가 없소. 단지 대화에 방해되는 방해꾼부터 치우려는 참이었는데······ 혹시 저 여자가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나?"

데르산이 빈손으로 턱을 긁적이며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깨달은 듯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너는 악티폴의 노예 검투사 년이 아니냐? 리프였던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리프가 그를 사납게 노려봤다.

"뭐, 아무튼 일단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조금이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데르산이 다시 굴피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오, 굴피로. 당신이 제작한 엘릭서인 디페리의 성혈, 어디에 있소?"

굴피로가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건 나에게 없다."

"수중에 없다고 해도 당연히 레시피는 가지고 있겠지. 그걸 내게 넘기시오."

"미친놈, 고작 목에 칼 한 자루 밀고 협박한다고 내가 네 말대로 따를 것 같더냐?"

데르산이 손에 시뻘건 불꽃을 피워내서 리프를 향해 겨누었다. 그에 굴피로가 침음을 흘렸다.

데르산이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군. 저 검투사 년과 꽤나 각별한 사이셨나 보오?"

"······."

"얌전히 엘릭서의 레시피를 가지고 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것부터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버릴 테······."

그 순간이었다.

창가에서 섬전처럼 쏘아져온 푸른 검기가 그대로 데르산을 덮쳤다.

"······!"

다급히 몸을 비틀어 간신히 방어한 그가 가게 한쪽으로 튕겨나갔다.

바로 이어서 신형 하나가 창문 사이로 날아들어와 가게 한쪽에 착지했다.

검을 들고 있는 여인, 아셸이 싸늘한 눈으로 비틀거리는 데르산을 응시했다.

굴피로가 놀란 눈으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

"자네······?"

이어서 가게 문이 열리며 목소리 하나가 더 끼어들었다.

"그러게 말했지 않았나? 혹시 모른다고."

저벅저벅 걸어들어온 남자가 난장판이 된 가게 내부를 슥 둘러봤다.

그리곤 더없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데르산에게 시선을 멈췄다.

남자, 7군주가 입을 열었다.

"넌 뭐냐, 흡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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