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리곤 (5)
수감소에서 밴을 빼내 곧장 포션 상점으로 데리고 갔다.
혹시나 폭왕이 눈을 붙이려고 들진 않을까 초감각을 최대로 펼친 채 이동했으나, 딱히 따라붙는 이는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감사합니다, 플레온 씨! 정말로 감사합니다!"
"전부 이쪽의 나으리 덕분이지, 뭘. 나한테 감사할 게 있나."
그렇게 상점에 도착하고, 그는 나와 굴피로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플레온이 누군가 싶었지만 그의 가명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제 바로 떠날 건가?"
내 물음에 굴피로가 상점 내부를 슥 둘러보며 대답했다.
"며칠만 시간을 주시겠소? 대부분은 버리고 가긴 할 거지만, 이것저것 정리할 게 많아서."
음, 하긴.
짐을 정리하고 챙기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할 듯했다.
계속 폭왕의 도시에 머무르고 있어서 좋을 건 없었지만 며칠쯤이야 상관없겠지.
"아무튼 밴을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하오. 이건 빚으로 여기고 마음에 남겨두겠소."
굴피로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밴을 구해준 건 그가 나를 따라서 7군주령으로 향하는 일에 대한 조건이었기에 빚이라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이조차도 빚으로 치고 나중에 갚을 모양이었다. 내게 있어선 좋은 일이었다.
"혹시 모르니, 준비가 끝날 때까지 내 호위를 이곳에 붙여두지."
나는 아셸을 쳐다보며 말했다.
폭왕은 딱히 내가 마헤아에서 뭘 하는 건지 관심이 없는 듯 보였지만, 떠날 때까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나 굴피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소. 나도 내 한 몸 지킬 힘 정도는 있으니."
【Lv. 56】
나는 그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물론 굴피로의 레벨은 상당했다.
그가 비록 전투와 거리가 먼 연금술사이긴 해도, 대륙적인 명성을 지닌 만큼 보통의 연금술사는 아니었으니까.
마법의 수준도 상당한 걸로 알고 있기에 웬만해서야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정리가 얼마나 걸리겠나?"
"일주일이면 충분하오."
"그럼 그때 다시 찾아오지."
굴피로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가게를 나섰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멀리서 상점을 계속 지켜봐라. 수상한 것이 보이면 바로 보고하고."
아셸이 슬쩍 가게를 돌아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이 정도 안전 장치는 해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셸은 남겨두고 여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길을 빠져나가는데, 반대편에서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나온 포션 상점으로 들어가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곧 다시 몸을 돌렸다.
***
"미안하지만 아직 들어온 정보가 없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대편에 앉은 리프는 그런 그를 말없이 노려볼 뿐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광혈병이야. 그 생존자를 찾는 일이 그렇게 쉬운 줄 아나?"
"······."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한 일이네. 그래도 의뢰를 취소하겠다면 별 수 없지만······."
그녀는 이를 꽉 깨물며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남자가 싱긋 웃으며 돈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인력을 좀 더 동원해서 조사 지역을 넓혀보도록 하지. 다음에 찾아올 땐 반드시 좋은 소식을 준비해놓고 있겠네."
자리에서 일어나 홱 밖으로 나가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남자의 뒤에 서있던 수하가 슬며시 물었다.
"정말 조사 인력을 더 늘리실 겁니까?"
"미쳤나? 안 그래도 부족한 인력을 그딴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게."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광혈병 생존자라니, 찾아봐야 애초에 있을 리가 없지. 만에 하나 있다고 해도 치료법을 알 수 있을 리는 더더욱 없고."
"그런데도 벌써 반 년째 아닙니까? 이쯤 되면 의뢰를 취소할 법도 한데 끈질기네요."
"저년도 속으로는 알고 있을걸?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끝내 지푸라기를 못 놓아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남자가 킥킥 조소를 터뜨렸다.
"뭐, 우리야 계속 적당히 시늉이나 하면서 의뢰금만 받아먹으면 그만이니까 말이야."
정보 길드 건물에서 나온 리프는 길거리를 걸었다.
주위에서 힐끗거리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다음으로 향한 목적지는 포션 상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계산대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굴피로가 그녀를 쳐다봤다.
"왔느냐?"
그는 익숙한 듯 서랍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포션 한 병을 꺼내들었다.
포션을 챙겨든 리프가 은화 몇 닢을 꺼내서 올려놨다. 그리고 한마디 대화 없이 도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굴피로가 물고 있던 담뱃대를 입에서 빼고 말했다.
"난 이제 곧 마헤아에서 떠날 거다. 아마 일주일 뒤쯤에."
"······?!"
그 말에 그녀가 다급히 돌아봤다.
"걱정하지 마라. 포션의 제작법은 푸른 이슬 상점의 마릭 영감한테 맡겨놨으니까. 이제 그쪽에서 제작을 받으면 된다."
"······갑자기 왜 떠나는 건데요?"
"좀 그럴 사정이 생겨서 말이다."
그녀는 잠시 우두커니 서있다가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쯧."
작게 혀를 찬 굴피로가 다시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안타깝다는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며.
***
퍼억.
길거리를 걷고 있는 리프의 머리에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그녀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한 중년 남성이 붉어진 눈시울로 씩씩거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괴물 새끼야! 네가 내 아들을 죽였어! 누구인지 기억하고나 있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중년을 다급히 말렸다.
리프는 무표정하게 머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다시 가던 걸음을 옮겼다.
소란에 행인들이 몰렸다. 몇몇 이들의 적의 가득한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사방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질긴 년, 그렇게 많이 처죽이고서 지는 언제까지 살아남으려고······."
악티폴의 노예 검투.
그 죽음의 경기에서 계속해서 살아남는다는 건 그만큼 다른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
또한, 그만큼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기도 했다.
노예 검투사 중에는 그녀처럼 이 도시에 혈육을 두고 있는 이들 역시 많았으니까.
리프는 입술을 짓씹었다.
손에 들고 있던 포션을 품으로 끌어당겨 꼭 쥐고서, 계속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한 여인이 현관으로 나와서 그녀를 반겼다.
"아, 오셨어요?"
여인은 동생의 간병인이었다.
집에는 경비원과 간병인을 한 명씩 두고 있었다.
3계 이상의 검투사들은 경기 때 외에는 도시 내에서 자유롭게 일상을 지낼 수 있고, 손에 쥐어지는 돈도 많았다. 5계에서도 최상위 검투사인 리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막 식사를 마치셨어요."
"오늘 상태는?"
"그, 몇 시간 전에 각혈을 몇 번 하시기는 했는데······ 지금은 다시 안정됐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녀의 말에 리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위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있는 소년이 보였다.
그녀와 똑같이 잿빛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소년.
창가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방으로 들어온 리프를 보고 활짝 웃었다.
"어서와, 누나."
리프도 옅게 미소 지으며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몸은 어때."
"괜찮아. 말했잖아?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잠시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다. 주로 소년이 떠들고 리프가 듣는 쪽이었다.
두 자매는 약속이라도 한 듯 검투 경기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리프가 건넨 포션을 받아든 소년이 한 모금 마시고서 웩 소리를 냈다.
"항상 먹는 거지만 끔찍한 맛이네. 좀 더 맛있게 만들어달라고 할 수는 없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다 마셔."
소년은 불만스레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계속 포션을 마셨다.
걷힌 소매로 소년의 팔이 드러났다.
앙상하고 창백한,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울룩불룩 솟아난 검붉은 핏줄.
그것을 바라보는 리프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런데 누나."
포션을 전부 마신 소년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리프는 빈 병을 들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이 나올지야 뻔했기 때문에.
"피곤하겠다. 그만 쉬어."
"아니, 나 안 피곤······ 읍."
소년이 갑작스레 입을 틀어막은 채 몸을 숙였다.
리프는 깜짝 놀라서 병을 내던지고 그에게 다가갔다.
"쿨럭, 컥!"
격한 기침과 함께 소년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올리아!"
리프는 다급히 간병인을 불렀다.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온 여인이 소년의 상태를 살폈다. 몸을 반쯤 눕히고 진정시키며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간신히 상태가 다시 안정되고 그녀가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이대로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나아지실 거예요."
"······."
리프는 심란한 눈으로 반쯤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는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간병인을 남겨두고 방에서 나왔다.
철컥.
방문을 닫은 그녀는 옆쪽의 벽에 턱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얼굴에 짙은 피로가 내려앉았다.
6군주령의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
그들 자매가 살던 본래의 터전이었다.
그녀의 동생은 마을에서 천재라 불렸었다.
마을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며 검술 교관을 하던 방랑기사 백 씨도, 자신이 마탑 출신의 마법사라고 허구한 날 자랑하던 마법사 다키오 영감도 동생이 세상에 다시 없을 불세출의 천재라고 했다.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리프도 그들의 말이 괜한 추켜세우기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왜냐면 검술과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검으로 큰 나무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불덩이를 날리며 짐승을 사냥하던 동생의 모습은 누구의 눈에나 비정상적이었으니까.
동생은 천재였다.
그런 동생에게 있어서 시골 마을의 울타리는 너무도 좁아 보였다.
그래서 떠나보내기로 했다. 방랑기사 백 씨가 아는 인맥으로 수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가족들은 동생이 떠나기 전날 밤 큰 잔치를 열었다.
마을의 주민들이 다같이 모여서 기쁨과 슬픔을 머금고 동생의 앞날에 축복을 빌어줬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늦은 밤이었다.
마을의 한쪽 하늘이 갑작스레 검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귀가 찡하고, 폭풍이 몰아쳤다. 정신을 차린 뒤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무너진 건물들과, 마을 사람들의 시체.
자욱한 피 안개가 마을 전체를 덮었다. 주민들의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그 뒤의 기억은 없었다.
그저 덜덜 떨면서도 그녀를 껴안은 채 손에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던 동생과, 온몸에 차올랐던 알 수 없는 기운만이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다.
정신을 차린 다음 가장 먼저 보인 건 곁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동생이었다.
일대가 폐허였다. 살아있는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도, 친인척도, 친구들도.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잔혹한 현실이었다.
좀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동생과 간신히 수도로 이동했다.
행인들이 떠드는 소리에 마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알 수 있었다.
군주성에 세인테아의 간첩이 숨어있었다고 한다. 성의 관리들을 학살하고 도주한 그를 6군주가 직접 쫓아서 참했다고 했다.
그 전투가 일어났던 장소가 바로 그녀의 마을 근처였다.
동생이 걸린 병은 광혈병이라는 것이었다. 6군주의 혈술에 접촉한 대상이 걸리는 죽음의 병.
마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저항할 수 있지만, 왜인지 동생은 광혈병에 걸렸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지옥 속에서 몸을 채웠던 알 수 없는 기운이 무엇이었는지를.
동생이 자신의 마력을 그녀에게 모두 흘려넣고 그 끔찍한 피 안개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것임을.
마을은 멸망하고, 가족은 전부 죽고, 유일하게 남은 동생은 시한부가 됐다. 한순간에 시궁창으로 처박힌 삶.
수도에서 악티폴이라는 노예 검투가 매일마다 열린다는 걸 알게 됐다. 챔피언이 되면 6군주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는가?
그녀는 그 산지옥으로 직접 걸어들어가 검투사가 되었다.
지난 3년간 죽을 고비가 수백 번은 있었지만, 끝내 살아남았다.
5계의 검투사는 원하면 언제든 챔피언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다. 이제 그토록 염원했던 목표는 바로 코앞이었다.
"······."
다시 차갑게 표정을 굳힌 리프가 벽에서 머리를 뗐다.
싸운다. 승리한다. 살아남는다. 그리고 동생의 병을 고친다.
그 일념만으로 버틴 지옥 같은 3년이었다.
동생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칼에 피를 묻힐 수 있다. 죽인 시체들로 산을 쌓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거리낄 건 없었고, 죽음 또한 두렵지 않았다.
단지 두려운 것은 하나였다.
만약 챔피언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한다면 홀로 남게 될 동생.
그것이 이제 단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아직까지 그녀를 망설이게 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닫힌 방문을 바라보고서,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도 머리도 전부 피곤했다. 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