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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60화 (60/189)

리프리곤 (4)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함성 속,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쥔 검을 늘어트리고 섰다.

무장이라고는 지금껏 나온 노예들처럼 방어구 하나 없이 무기가 전부다. 반대편에 선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철퇴를 붕붕 휘두르며 그녀를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마치 투지를 끌어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쪽이 이길 것 같나?"

폭왕이 내게 물었다. 묘하게 들뜬 듯한 목소리.

지금껏 쓸데없는 말들만 지껄이다가 처음으로 경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를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여자 쪽이 이기겠지."

놈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웃음을 흘렸다.

"바로 단언하는군? 확신할 수 있나?"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Lv. 43】

【Lv. 42】

확신까지는 아니었다.

40레벨대에서의 1레벨이 그렇게까지 큰 격차는 아니니까.

여자 쪽이 이길 확률이 높은 건 맞지만 변수가 일어나긴 충분한 차이였다.

'그렇다고 해도······.'

왠지 그 변수가 일어날 일은 없을 것 같네.

이건 그냥 직감이었다.

나는 마주 보고 서있는 두 검투사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 자, 그럼······ 경기 시작!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남자가 돌리고 있던 철퇴를 곧장 여인을 향해 쏘아냈다.

여인이 몸을 틀어 피하며 접근했다. 그에 남자가 능숙하게 철퇴를 거둬들이며 다시 한 번 휘둘렀다.

그는 거리를 좀처럼 내주지 않았다. 뒤로 몸을 빼내며 육중한 철퇴를 거침없이 휘둘렀다. 철구에 붙은 가시가 여인의 몸 이곳저곳을 스치고 피가 튀어올랐다.

그녀는 몰아치는 공격을 한끗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계속해서 상대에게 몸을 붙이려 들었다. 한 대쯤은 맞아도 상관없다는 듯, 야수처럼 과감하고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쥐새끼 같은 년이······!"

기세에서 밀린 쪽은 남자였다.

그가 다급히 철퇴를 짧게 잡고서 강하게 내리쳤다.

여인의 순간 낮게 자세를 낮췄다. 공격을 피하며 철구와 이어진 사슬에 검을 한 차례 휘감고서, 확 당겨버렸다.

남자가 철퇴를 놓쳤다. 그녀 역시 사슬에 얽힌 검을 그대로 내던져버리고서 허리춤의 다른 검을 뽑아들며 돌진했다.

다급히 검을 뽑아든 남자도 여인의 공격에 응수했다.

잠시 동안 검투가 이어졌다. 검술을 모르는 내가 봐도 명백히 실력이 위인 쪽은 여인이었다.

거칠게 몰아치는 검격에 남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어만 하기 급급했다.

촤아악!

그리고 어느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남자의 한쪽 팔이 날아갔다.

그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사, 살려줘! 제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시간도 없이 남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집에 기다리고 있는 동생들이 있어! 내가 없으면 걔들은 전부 죽는다고! 제발······!"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붕 떠오른 남자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여인이 무정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거칠어진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남자의 시체에도, 관중들에게도 시선 하나 주지 않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곤 바로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여지껏 싱겁게 끝난 시합들에는 야유만 퍼붓던 관중들이었기에 역시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만큼 환호성도 컸다.

"하하! 역시 리프 저 년이 최고라니까!"

"최고긴 뭐가 최고야? 저건 예전에 한창 밑바닥에서 구를 때가 재밌었지, 요즘은 이따위로 다 싱겁게만 끝내고 말이야."

"그나저나 5계에서는 이제 아예 상대가 없겠는데? 곧 챔피언한테도 도전하지 않겠어?"

"에이, 아무리 그래도 챔피언한테는 아직 안 되지······."

귓가에 들려오는 관중들의 대화 소리.

폭왕이 능청스레 감탄하듯 말했다.

"이거 자네 말대로 됐군."

"······."

놈은 경기장 밖으로 퇴장하는 여인의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내게 물었다.

"어때, 7군주. 경기는 즐거웠나?"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런 게 재밌나?"

예상한 반응이었다는 듯 놈이 클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글쎄, 제법?"

"······."

"벌레들 싸움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법이거든. 저런 하찮은 목숨이라도 부지하겠다고 아등바등 발악하고, 물어뜯고, 끝내 절망하고. 가끔씩 구경하면 가벼운 여흥 정도는 된다고······ 뭐,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이구만. 큭큭."

다른 군주들도 다 그렇더라고.

그렇게 뒷말을 덧붙인 놈이 쩍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몇 경기 더 남은 모양인데, 계속 관전하겠나?"

이제 볼 건 다 봤다는 듯한 말투였다.

고개를 저으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그만 끝낼까. 찾는다는 노예는 이놈한테 안내받으면 돼."

그렇게 말하며 놈이 가리킨 이는 뒤쪽에 서있던 수하들 중 한 명이었다. 덥수룩한 장발에, 무뚝뚝한 인상을 가진 수인 남자.

"만나서 즐거웠어, 7군주. 나는 먼저 가보겠네."

놈은 그렇게 말하고서 손을 흔들며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수하들이 따라붙었다.

나는 놈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홀로 자리에 남은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수감소장인 길로크입니다. 수감소에 있는 노예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말씀해주시면 곧바로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래를 힐끗 내려다봤다.

여인의 모습은 어느새 출구 바깥으로 사라져있었다.

아직 채 식지 않은 열기 속에 경기장에는 핏물과 시체 한 구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

길로크는 자신이 찾고 있는 노예를 데려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직접 수감소로 이동했다.

이것저것 뒤섞인 역겨운 냄새가 가득 풍기는 복도.

노예들이 갇혀있는 철창을 지나치며 앞장서서 걷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마지막으로 본 경기에 출전했던 여자, 이름이 리프라고 했던가?"

길로크가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6군주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나?"

아까부터 궁금했던 거였다.

다른 경기들엔 관심도 없던 폭왕이 유일하게 그녀의 경기에만 흥미를 드러낸 것처럼 보였으니까.

경기 자체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이전 경기들보다 수준이 높긴 했어도 기껏해야 40레벨대의 대결, 놈이 보기에는 어차피 전부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그렇다면 경기가 아니라, 여인의 존재 자체에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예상이 맞는지 그가 조금 굳은 얼굴로 대답을 머뭇거렸다.

"꺼내기가 곤란한 이야기인가?"

"아닙니다."

"그럼 말해보도록."

재촉하자 곧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친동생이 6군주님의 혈술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중독?"

그 말에 나는 곧바로 이해했다.

6군주의 혈술, 중독.

'······광혈병을 말하는 거군.'

6군주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혈술은 놈의 성향답게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놈의 혈술은 기본으로 육체 능력을 증폭시키는 능력이다.

하지만 혈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폭주 상태에 돌입하면 몸에서 혈무를 뿜어내는데, 문제는 그 안개에 접촉한 대상은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전신에 피가 들끓어 스스로의 생명력을 불태우며 말이다.

이것이 병이라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폭주가 끝나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도 놈의 혈기가 계속해서 몸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도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재앙인 놈이지.'

놈이 최악의 흡혈귀라 불리는 데에는 단순히 악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 능력의 존재도 큰 몫을 했다.

게임에서도 놈의 그런 능력 때문에 과거에 멸망한 도시나 마을이 몇몇 있다는 설정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마력이 있거나 정신의 격이 높다면 저항이 가능했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민간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챔피언을 차지한 검투사에게는 6군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녀는 악티폴의 검투사가 된 겁니다."

"······."

짧은 설명이지만 의문을 모두 해결하기에는 충분했다.

광혈병에 걸린 동생, 그리고 챔피언이 되면 6군주에게 하나의 소원을 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녀는 챔피언이 되서 동생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기 위해 검투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의문이 하나 더 생겼다.

"현재 챔피언은 누구지?"

"저입니다."

······뭐?

내가 쳐다보자 길로크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제가 현 악티폴의 챔피언입니다."

"······아까는 이곳의 수감소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소원으로 노예 수감소를 관리하고 싶다고 간청드렸기에 수감소장의 직위도 함께 겸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 건가.

나는 살짝 이해가 안 되서 물었다.

"왜 하필 수감소장이지? 훨씬 더 좋은 자리들이 있을 텐데."

소원이라고 해도 당연히 한계는 있겠지만, 그래도 평생 놀고먹으며 살 재산을 얻거나 군주성의 기사 직위 정도는 꿰찰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임에서도 6군주성에 악티폴의 챔피언 출신인 기사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 당시에는 달리 원하는 게 없었습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고, 함께 생활했던 노예들의 형편이나 조금이라도 좋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수감소장이 되었습니다."

"······."

의외의 이유라서 나는 조금 놀랐다.

6군주령 온데간데서 삶이 시궁창에 처박힌 인간들이 전부 모이는 장소.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경기가 매일마다 치뤄지는데 동료애 따위가 생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노예들의 형편을 봐주려고 소원으로 수감소장이 됐다니.

이 길로크라는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대충 파악하기엔 충분한 대목이었다.

나는 그와 더 대화를 나누지 않고 말없이 걸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건 리프라는 여인에 대한 생각이었다.

'동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챔피언이 되려고 한다고······.'

【Lv. 48】

마음 한편에 찝찝함이 느껴졌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길로크의 레벨이 그녀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길로크를 꺾고 챔피언이 된다고 해도······ 내가 알기로 광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병의 근원이 되는 혈왕이 죽는 것.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광혈병에 걸리고 살아남은 이 역시 아무도 없었고.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나는 굴피로의 부탁대로 밴이라는 남자만 데리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걸로 6군주령에도, 악티폴에도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곧 길로크가 어느 철창 앞에서 멈춰섰다.

어두운 철창 안에 여러 노예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었다.

"문을 열어라."

"예."

끼기긱.

길로크의 명령에 경비병이 철창의 문을 열었다.

그가 구석에 무릎을 감싸고 앉아 쭈그려있던 젊은 남자를 가리켰다.

"저 자가 밴입니다."

지목당한 밴이 두려움에 가득 질린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끌려와서 꽤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에 피딱지와 멍이 한가득이었다.

"과일 가게를 운영하던 밴이냐?"

"······예, 예? 맞습니다."

나는 그에게 손짓했다.

"나와라. 풀어주마."

***

경기장의 외곽 복도.

막 수감소에서 나와 복도를 걷던 길로크는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여인을 보고 멈춰섰다.

그러나 여인은 그를 한 번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나쳐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길로크가 입을 열었다.

"동생의 상태는 괜찮나?"

우뚝.

그제야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길로크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길로크는 입을 우물거리며 할 말을 고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챔피언 자리에 도전하지 마라, 리프."

"······."

"너는 날 이기지 못해.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설령 승리한다고 해도, 6군주는 분명······."

"닥쳐."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말을 끊은 리프가 도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로크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엿 같군, 정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