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리곤 (3)
자그마한 딸꾹질 소리가 울렸다.
내 옆쪽에서 바짝 엎드리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 사이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폭왕의 발언에 그의 곁에 있던 수행원이 화들짝 놀란 기색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 아셸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서 입을 열었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그래? 수도에 직접 걸음할 거였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나. 그럼 아주 성대히 맞이했을 텐데 말이야."
놈은 마치 오랜 벗이라도 대하듯 친근한 투로 말했다.
방문 목적에 대해서는 다행히 자세히 안 묻는 건가.
폭왕이 입가에 미소를 건 채 옆쪽의 기사와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뭔가 실랑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게 무슨 상황일까?"
그들의 몸이 덜덜 떨렸다.
나를 향해 엉거주춤 몸을 돌린 기사가 바닥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쿵 박았다. 그리곤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더듬대며 말했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무지함에 감히 위대하신 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부디 자비를······."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때 폭왕이 클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눈웃음을 지은 채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래그래, 어쩐지. 웬 벌레들이 7군주 자네한테 무기를 들이밀고 있길래, 나는 또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지 뭐야."
쫘아악!
섬뜩한 파육음과 기사의 몸이 몇 갈래로 분리되었다.
이어서 뒤쪽에 엎드린 병사들까지도 전신이 무참히 찢겨나갔다.
시뻘건 선혈이 흩뿌리고 시체 조각들이 바닥을 뒹군다. 그 광경에 아셸이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내 대신 사과하지, 7군주. 귀한 손님에게 실례가 많았어."
마치 벌레라도 내쫓듯 폭왕이 휘두른 손짓에 여섯은 그렇게 갈기갈기 찢긴 고깃덩이로 변모했다.
나는 속으로 탄식하며 대수롭지 않게 손을 거두는 놈을 바라봤다.
'미친놈······.'
원래 이런 놈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진짜 또라이 새끼가 따로 없었다.
거리 한편에 한순간에 일어난 참극.
하지만 주위에선 터져나오는 비명 하나 없다. 엎드려있던 행인들 중 몇몇은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치 자그마한 숨소리라도 내면 지금 널브러진 주검들과 똑같은 꼴이 될 거라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으, 우으······."
그때 한쪽에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
한 어린아이가 입을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 아이를 끌어안고 있던 모친으로 보이는 여인이 하얗게 질렸다. 그 작은 입을 틀어막고서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빌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제발······."
······더 지켜보고 있기 힘든 광경이다.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는 폭왕을 말로 붙잡았다.
"사과는 받는 걸로 치고 이쪽도 부탁 하나 하지, 6군주."
다시 내게 시선을 돌린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탁? 무슨?"
"저 수감소에 있는 노예 한 명을 데려가고 싶은데."
아······ 이놈한테 내 목적을 꺼내기는 별로 안 내켰는데.
다급하게 관심 돌릴 이야기를 찾다 보니 이게 튀어나왔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놈에게 부탁해서 후딱 데리고 빠져나가야겠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들어주겠지.
놈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호, 노예를 구하려고 이곳까지 온 거였나? 어떤 놈을 찾는 거지? 왜 찾는 건데?"
놈이 이 일에 깊게 흥미를 가지는 건 좋지 않다.
나는 물음을 무시하고서 무심함을 가장한 채 물었다.
"들어줄 건가?"
그에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놈이, 이내 킬킬 웃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론이지, 누구의 부탁인데. 그깟 노예야 한 놈이든 백 놈이든 원하는 대로 데려가라고. 대신에 나도 부탁 하나만 하지."
뭐?
놈이 내 어깨 너머로 경기장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거든. 잠깐 시간 좀 내서 나와 함께 구경 좀 하자고. 어때? 그 정도는 괜찮겠지?"
"······."
나는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이건 또 갑자기 뭔 개소리야?
***
폭왕의 행차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 악티폴 안으로 들어가자 높은 간부로 보이는 이들이 허겁지겁 몰려와서 놈을 모셨다.
현대의 축구장 크기는 될 법한 거대한 원형 경기장.
관중석은 바깥에서 들렸던 소리처럼 수많은 사람들로 빽빽히 채워져있다.
나는 경기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 황제나 앉을 법한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내 바로 옆에 앉아있는 폭왕은 팔걸이에 턱을 괴고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쪼개고 있었다.
'쯧.'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쩌다 보니 잠시 이놈과 함께 어울려서 경기를 관람해야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에 대해 파악하고 싶은 건지, 친분을 쌓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변덕인 건지.
최대한 마찰 없이 노예만 빼가야 하니 별 수 없이 거절하지 않고 수락은 했다만, 참 성가시고 불편한 자리였다.
"입은 안 허전한가, 7군주?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구경하면 될 텐데 말이야."
술은 개뿔이.
나는 욕을 퍼붓고 싶은 걸 참으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필요 없다."
"큭큭, 그래. 곧 경기가 재개할 모양이니 즐겁게 감상하자고."
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하들이 대령해온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황금색 잔에 한가득 담긴, 각설탕처럼 생긴 붉은색 큐브.
힐끗 쳐다보자 놈이 큐브 하나를 더 집어들어서 입에 넣고 으적으적 씹으며 말했다.
"아아, 이거? 피로 만든 간식이다. 신신한 피도 좋지만 오랫동안 숙성시켜서 굳힌 피도 나름 맛이 각별하거든."
······하여튼 역겹네.
폭왕은 최악의 흡혈귀답게 한시도 쉬지 않고 피를 갈구하는 놈이었다.
게임에서도 고작 놈의 식사 때문에 매년 마헤아에선 수백의 생명들이 희생된다고 했던가.
와아아아!
나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경기가 시작되려는지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졌다.
경기장 끝쪽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철문이 굉음과 함께 올라가더니, 각각 노예 검투사가 걸어나왔다.
검과 방패로 무장한 인간 남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제 몸집만 한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는 수인 남자였다.
- 벌써 10경기째 압도적인 연승을 이어가고 있는 괴물 신인, 오그! 그리고 그 상대는 3계의 수문장, 가테리!
확성 마법 같은 거라도 사용했는지 경기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는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곧바로 결투가 시작됐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수인이 우렁찬 포효와 함께 먼저 돌진했다.
그에 인간 남자도 몸을 옆으로 빼내며 방패로 능숙하게 상대의 공격을 흘렸다.
그렇게 잠시 동안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으나, 나는 어느 쪽이 더 승리할 확률이 높은지 쉽게 알 수 있었다.
【Lv. 26】
【Lv. 23】
왜냐면 검과 방패를 든 인간 쪽이 레벨이 더 높았으니까.
결과는 곧 레벨의 차이대로 나왔다.
거칠게 몰아치는 공격을 노련하게 계속 방어만 하고 있던 그가, 한순간 빈틈을 노려 수인의 옆구리를 베었다.
잇따라 몰아치는 공격에 팔과 다리까지 연달아 베인 수인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악티폴의 검투는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만 끝나는 경기다.
그래서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는 이대로 남자가 수인을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경기를 끝내지 않고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수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 그의 눈에 들이밀었다.
"······끄아악!"
단검에 두 눈을 뽑힌 수인이 피눈물을 쏟아내며 바닥을 굴렀다. 관중들이 환호했다.
남자는 관중석에 손을 흔들며 여유롭게 수인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곧 수인이 떨어뜨린 무기를 더듬더듬 집어들고서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공격이 맞을 리가 없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관중석에서 연신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실컷 수인을 농락하던 남자는 분위기가 식어갈 즈음에 끝내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나는 그 모든 광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봤다. 속으로는 인상을 한가득 찌푸린 채.
'지랄맞네, 참······.'
악티폴의 검투.
게임에서도 관련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이 경기가 이딴 식이라는 건 물론 알고 있었다.
상대를 무조건 모두 죽여야만 경기가 끝나고, 그 과정에 규칙 따윈 아무것도 없다. 고문을 하든 뭘 하든 상대에게 어떤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렇기에 더 높은 퍼포먼스를 관중들에게 보이기 위해 상대를 최대한 잔혹하고, 자극적으로 죽이는 노예들도 많았다. 그래야 자신의 몸값을 더욱 높일 수 있었으니.
악티폴에서 일정 등급 이상의 노예는 수감소에 갇혀있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자유를 얻고 재산도 축적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부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도 필사적이게 되는 것이었다.
이어진 경기들은 1대1 결투 외에도 여러가지 것들이 있었다.
한쪽이 전부 죽을 때까지 싸우는 단체전이라거나, 포획한 몬스터를 풀어놓아서 처절한 사투를 벌이게 하기도 했다.
단체전에서는 한 사람을 남겨놓고 여럿이 남은 쪽이 사방에서 농락하듯 쫓아다니다가 무참히 죽여버렸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경기에서는 노예들보다 몇 배는 더 덩치가 큰 대호가 나왔는데, 결국 상대하는 노예들은 전부 다 죽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일련의 경기들을 보며 내가 느낀 기분은······ 그저 더러움밖에 없었다.
이딴 게 즐거운가?
어떻게 사람이 서로 죽고 죽이는 걸 보면서 이리도 열광할 수 있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옆에 앉은 폭왕을 돌아보니 놈은 따분하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럴 거면 나는 왜 끌어들여서 경기를 보자 한 거야?
- 자, 그럼 다음 경기는 모두가 기다리시던 5계의 경기입니다!
사회자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악티폴의 검투사 등급에 대해 상기했다.
가장 낮은 1계부터 시작해서 5계까지, 그리고 가장 위에는 챔피언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5계의 경기면 챔피언전을 제외하고서 악티폴에서 가장 강한 검투사들이 맞붙는 경기였다.
- 먼저 수문장 루톤을 꺾고 이번에 새로 5계로 승급한 검투사, 철격의 폴!"
이전의 경기들보다 훨씬 커진 함성과 함께, 경기장으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머리통만 한 쇠구가 달린 거대한 철퇴를 무기로 들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상대는 벌써 5계에서 반 년을 넘게 살아남고 있는! 챔피언을 제외하면 사실상 최강의 검투사, 투귀 리프!
이어서 그 반대편의 철문에서 나온 것은 평범한 검을 들고 있는 단발의 여인.
나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왜냐면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으니까.
전에 골목에서 마주쳤던, 병사들을 쫓아내줬던 바로 그 여자였다.
"흐."
그때 지금까지 감흥 없는 표정만 짓고 있던 폭왕이 어째서인지 눈을 빛내며 웃음을 흘렸다.
관중석의 관중들이 흥분에 가득 차서 두 검투사의 이름을 연신 외쳐댔다.
'······리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