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리곤 (2)
······조건?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연금술 연구에 필요한 재료라도 구해달라고 하려는 건가?
그러나 이어진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사람 한 명을 좀 구해줬으면 하오."
"······사람?"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악티폴의 노예 검투에 대해 아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모를 리가 있나.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굴피로가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도시에 정착했을 즈음부터 꽤 친하게 지낸 자가 하나 있소. 작은 과일 노점상을 운영하던 밴이라는 젊은 놈인데, 최근에 얼굴 비추는 일이 없어서 알아보니 도시의 대부업자들한테 빚을 못 갚고 끌러갔다더군."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였기에 나는 눈만 깜박거렸다.
"이미 악티폴 쪽에 노예로 팔려서 경기에 출전하게 될 것 같다고 하던데, 7군주께서 그놈을 구해줬으면 하오. 부탁드리겠소."
방금 전보다 좀 더 정중해진 말투로 부탁하는 그였다.
나는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갚아야 할 빚이 좀 큰가?"
"이자를 얼마나 붙여먹은 건지 30골드가 넘었다더군. 악티폴을 찾아가보니 놈들은 몸값을 거기서 또 배로 부르고 있고. 그래서 제대로 된 포션이라도 하나 제작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소. 내가 지금 재산이랄 게 거의 없는 빈털털이 처지라."
이게 무슨 말인가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가 이내 이해했다.
상품의 포션을 제작해서 그 잡혀갔다는 남자의 몸값을 대신 지불해주려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찾아온 거고.
'······조금만 늦었으면 곤란할 뻔했잖아?'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내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굴피로를 찾아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지금은 그냥 적당한 포션들이나 만들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가 정말 제대로 된 포션을 제작해서 판매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이 수도의 권력자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정체까지 탄로날 수도 있는 일이다.
그가 멀지 않은 미래에 이곳에 계속 남아있지 않고 남대륙으로 이동했던 것도 어쩌면 이번 일과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어려울 건 없는 일인데.'
주머니에 썩어나는 게 돈이었다. 몇십 골드쯤이야 푼돈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돈으로 안 되는 일이라고 해도 권력으로 얼마든 해결할 수 있었고.
단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알겠다. 바로 데려오도록 하지."
"고맙소."
나는 일단 흔쾌히 대답했다.
그리고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뒤, 대화를 마무리하고서 가게를 빠져나왔다.
***
폭왕이 다스리는 6군주령.
특히 수도인 마헤아는 그의 악명답게 여러가지 패악과 부패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하나를 꼽자면 바로 노예 검투였다.
'저기군.'
여관으로 돌아간 뒤, 아셸과 함께 곧장 다시 밖으로 나서서 향한 곳은 도시의 서쪽이었다.
나는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대로와 건물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세워져있는 거대한 건축물을 바라봤다.
악티폴.
마치 콜로세움처럼 생긴 저 거대한 경기장을 부르는 이름이다.
무장한 노예 검투사들이 출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오로지 승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죽음의 경기.
주위에는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악티폴 안으로 출입하고 있는 많은 행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도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지 경기장 안에서는 관중들의 시끄러운 환성과 야유가 뒤섞여 울려퍼지고 있었다.
"쯧."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게임에서도 악티폴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특히 그 스토리가 어두웠었다.
그렇기에 저 안에서 지금 얼마나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을지 안 봐도 훤히 보였다.
목숨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운 세계였고, 특히 이 마헤아 시는 더더욱 그렇다.
저들에게 있어 노예들의 처절한 사투는 그저 한순간의 여흥일 뿐이고, 도박으로 한탕 크게 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나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지금 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경기장이 아니라 그 옆에 붙은 노예 수감소 건물이었다.
굴피로가 말했던 대로면 그 밴이라는 남자는 지금쯤 저곳에 갇혀있을 테니까.
'일단 돈으로 해결을 봐보고.'
좀 염려되는 건 저쪽에서 자꾸 몸값을 올려치려 하거나, 아예 강짜를 부리며 안 팔겠다고 나오는 경우인데.
그럴 경우에는 그냥 권력으로 찍어누르면 그만이긴 했지만 이게 또 애매했다.
내가 7군주라고 정체를 밝히면 당연히 군주성에 있을 폭왕의 귀에도 순식간에 들어갈 테니까.
내가 이 도시에 있다는 게 놈에게 알려지는 건 웬만해서 피하고 싶었다. 혹시 날 만나겠다고 직접 찾아올지도 모르니.
지금 이렇게 로브까지 입고 다니는 이유도 혹시나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그런 것이었다. 7군주령과 바로 이웃한 6군주령이었으니까.
'폭왕 발테거.'
나는 잠시 놈에 대해 떠올렸다.
놈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아주 많으면서도 하나같이 간단했다.
쓰레기, 말종, 폭군, 악마, 괴물, 그리고 밖에도 기타 등등······.
놈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대로만 행동하며, 타인의 고통을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즐기는 최악의 흡혈귀다. 노예 검투장 악티폴이 세워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
이 라사 세계관에는 수많은 빌런들이 존재하지만, 그중에 가장 원초적으로 역겹고 추악한 놈을 꼽으라면 그건 폭왕이었다.
"······."
그러고 보니, 놈에 대해 생각하니 문득 또 다른 인물 하나가 떠오른다.
사실 폭왕은 다른 군주들보다 여러모로 주의를 기울여 지켜봐야 할 놈이기도 했다.
그냥 단순한 쓰레기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놈의 정도를 한참 벗어난 악인이긴 해도 어쨌든 같은 군주로 있는 이상 딱히 나에게 해가 될 건 없었으니까.
단지 이유는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서 다른 중요한 인물 하나와 아주 깊이 엮여있었기 때문이다.
'살귀 리프리곤.'
7군주좌의 본 주인.
지금은 어쩌다 내가 차지하게 된 7군주좌에 본래 앉았어야 할 인물.
게임 플레이 시점에서, 그러니까 몇 년 뒤 시점에서의 칼데릭의 7군주는 바로 그였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왜냐면 게임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는 나온 게 아예 없다시피했기 때문이다. 군주씩이나 되는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녔기에 얼굴조차 드러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리프리곤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인간 남성이라는 것, 한마디로 종족과 성별 정도였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폭왕에 대해 엄청난 복수심과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
심지어 메인 스토리에서도 세인테아 테러 에피소드 중 폭왕을 무참히 살해한 뒤 허망하게 자폭해버렸기에, 그에 대한 자그마한 뒷배경조차 하나 나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유저들 사이에서도 라사 최대의 미스테리 중 하나로 꼽혔었지.'
따로 배경 스토리도 안 풀 놈은 대체 왜 군주로 만들어놓은 거냐고 운영진 욕도 엄청 했었고.
혹시 리프리곤과 관련된 히든 피스라도 숨겨져있는 건가 찾아다닌 유저들도 한가득이었지만 결국 발견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굳이 리프리곤뿐이 아니더라도,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는 이런저런 시원찮게 풀리지 않은 부분들이 많았기에 유저들의 원성을 많이 사긴 했었다.
어쨌든 그래서 폭왕은 앞으로 계속 신경을 써야 될 놈이기는 했다.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는 리프리곤의 존재 때문에.
그 정체 모를 괴물이 미래에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니 신상 파악은 가능하면 해두는 게 이로운 것이 당연했다.
'일단은 굴피로부터 데려가는 일에 집중하고.'
잡생각을 마치고 다시 해야 할 일로 신경을 돌렸다.
수감소 건물로 향하는데 근처에서 고함이 울려퍼졌다.
"······어, 저거 저놈!"
경기장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던 한 병사 무리였다.
병사들 중 하나가 날 가리키며 소리치더니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또 뭔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는데, 자세히 보니 아까 전에 골목에서 마주쳤던 그놈들이었다.
"뭐야? 뭔 일인데?"
"아니, 아까 골목에서 마주친 놈인데······."
한 놈이 동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한 놈은 띠꺼운 미소를 입에 건 채 내 앞에 섰다.
"너 이 새끼, 잘 걸렸다. 아까는 잘도 그렇게 빠져나갔지?"
······아, 바쁜데 짜증나게 구네.
놈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그에 아셸이 나서서 놈의 팔목을 덥썩 붙잡았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놈이 붙잡힌 팔목을 빼내려고 발버둥쳤지만 될 리가 없다.
나는 고개를 까닥였다.
"치워라."
그에 아셸이 가볍게 옆으로 밀어버리자 놈이 한순간 붕 떴다가 비명을 내지르며 요란스레 땅바닥을 굴렀다.
다른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창을 치켜들었다.
어째 판에 박힌 삼류 빌런 같은 모습들에 괜히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이것들 진짜 뭐 하냐?
"가, 감히 병사를 공격······."
"무슨 소란들이냐!"
그때 또 여기로 다가오는 새로운 인물이 있었다.
경갑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저벅저벅 이쪽으로 다가온 그가 병사들을 둘러보고는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병사를 공격한 걸로 보이는데,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나는 귀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마헤아에서 감히 군권에 저항한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나?"
기사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채 검을 뽑아들었다.
"두 연놈 모두 순순히 투항하고 따라오도록. 아니면 바로 즉결 처형하겠다."
얼씨구······.
진짜 이 도시가 아주 개판이긴 하구나 싶었다.
살기까지 뿜어내는 게 놈은 말에 따르지 않으면 진심으로 죽일 생각인 듯 싶었다.
소란에 주위에 인파가 조금 몰려들었다.
방금 아셸에게 던져져서 날아간 놈은 기사의 눈치를 보며 우리를 향해 꼴 좋다는 듯 조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 병신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다가, 순간 미간을 좁힌 채 옆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부터 거대한 기운 하나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곧 경기장 입구로 이어지는 길에 모습을 드러낸 건 두 남녀의 모습이었다.
흑발에 적안을 지닌 거구의 남자, 그리고 그 뒤쪽에 붙은 수행원으로 보이는 여인.
【Lv. 94】
나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썅, 마주치기 싫었는데 하필······.
"······!"
일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남자의 등장에 경기장 주위를 지나다니던 행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나한테 검을 겨누고 있던 기사 놈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은 검을 떨어뜨리고서 허겁지겁 무릎을 꿇은 뒤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6군주 폭왕.
모두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 가운데 서있는 사람은 나와 아셸뿐이었다.
"미, 미친놈. 뭘 하는 거냐? 6군주님이시다! 어서 무릎을 꿇어!"
나를 힐끗 올려다본 기사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외쳤다.
나는 무시하고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폭왕을 빤히 응시했다.
이내 바로 근처까지 가까이 다가온 놈이 걸음을 멈춰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폭왕이 씨익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깜짝 놀랐군. 6군주령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7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