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리곤 (1)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병사들이 나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러더니 곧 능청스레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너 뭐야? 수상한데? 대낮에 로브를 뒤집어쓰고 이런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나?"
······뭐라는 거야?
로브 후드 좀 올렸다고 수상하다니,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다가 이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지금 삥뜯는 거여?'
다른 군주령에 비해서 특히나 여러모로 막장인 6군주령이었다.
치안을 유지해야 할 병사들이 행인들의 돈주머니를 터는 것쯤은 이곳에선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병사 중 한 놈이 야비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서 손을 흔들거렸다. 다른 한 놈은 조금 떨어진 뒤에서 위협하듯 창을 까닥거렸다.
"조용히 지나가고 싶으면 성의 좀 보이지 그래. 아니면 어디 몇 군데 얻어맞고 우리랑 함께 가든가."
그냥 대놓고 하는 강도질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자식이 쪼개고 있네? 지금 장난 같냐?"
놈들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무시하고서 위쪽을 둘러봤다.
내 능력에는 중간이 없어서 죽일 게 아니라면 이것들을 적당히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마경에서 몬스터들을 그렇게 학살하고 다녔으면서 20레벨도 안되는 병사 두 놈 제압하지 못하는 처지가 레전드네.
아무리 그래도 죽이긴 그렇고, 대충 공간 도약으로 건물 위로 올라가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어이."
또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막 향하려던 포션 상점에서 나온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허리춤에 검을 메고 있는, 얼굴에 사선으로 길쭉한 칼자국이 난 단발의 여인. 한 손에는 막 구매해서 나온 것인지 포션 한 병이 들려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병사들이 어째서인지 움찔 놀라며 물러섰다.
그녀가 그런 놈들과 나를 한 번 번갈아 보고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 병신들아."
병사들에게 한 말이었다.
그에 한 놈이 욱한 표정으로 뭐라 입을 열려고 했으나, 동료가 다급히 말렸다.
"야, 야······ 가자."
두 놈은 여인을 노려보는 것밖에 못한 채 이내 도망치듯 옆쪽의 샛길로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놈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기껏해야 노예 나부랭이인 년이 건방지게······."
······노예?
나는 말 한마디로 병사들을 쫓아내버린 여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옆을 지나쳐서 가던 길을 마저 가버렸다. 뭐지?
일단 도와준 것 같은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홱 가버리니 좀 황당하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신경 끄고 나도 마저 갈 길을 갔다. 그녀가 나온 포션 상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간판이 걸린 낡은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밖에서 본 외관처럼 낡았지만 깔끔히 정돈된 분위기였다. 다만 냄새는 뭔가 이것저것 섞인 매캐한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는 갖가지 색의 포션들. 알키마스 공방에서 봤던 풍경이 떠오른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니 이내 구석에 있던 진열대 안쪽에서 노인이 걸어나왔다. 찾고 있던 노인이었다.
'제대로 맞게 찾아왔네.'
그가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계산대의 의자로 다가가서 털썩 앉으며 말했다.
"못 보던 손님이군. 어떤 포션을 구매하려고 오셨나?"
나는 잠시 고민하고 대답했다.
"일단 좀 둘러보고."
"편한대로 하시게."
노인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책상 위에 있던 담뱃대를 집어들었다.
서랍에서 잎파리를 꺼내 채워서 불을 붙이고는 입에 물고 뻑뻑 피워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노인을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진열대의 포션들을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둘러보겠다고 한 건, 그와 어떻게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하나 신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연금술사 굴피로.'
현시대의 대륙에서 가장 명망 높은 대연금술사 중 하나.
그리고 무려 엘릭서, '디페리의 성혈'을 제작해낸 인물.
그것이 바로 노인의 정체였다.
그가 어째서 이런 인적 드문 골목에서 낡은 포션 상점이나 운영하고 있는지는, 현시점에서의 그의 처지가 어떨지 알기에 대충 예상이 됐지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른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뿜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주인장, 이 가게는 얼마나 운영했지?"
그가 미간을 좁혔다.
"거 젊은 놈이 말을······ 이제 대충 1년 정도 됐지, 왜?"
1년이라.
나는 다시 물었다.
"주인장은 이름이 뭔가?"
"내 이름? 플레온. 그건 알아서 어디에 쓰시게."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명이 아닌 진짜 이름을 묻는 것이다."
그 말에 순간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노인이 풍기고 있던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대신 위압감으로 채워졌다.
그가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고 정색한 채 나를 쳐다봤다.
"누구냐, 네놈은?"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7군주."
"······뭐?"
노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위협할 생각은 없다. 잠시 그대와 대화를 나누고 뿐이다, 연금술사 굴피로."
그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가게 창밖을 슬쩍 쳐다봤다. 그 모습에 말을 덧붙였다.
"혼자서 왔다."
"······정말 당신이 7군주요? 이번에 새로 즉위했다는?"
"그래."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고?"
"아니라면 칼데릭에서 군주의 이름을 사칭하는 미치광이인 거겠지. 조금안 알아봐도 드러날 사실을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노인, 굴피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는 물어봐야 의미도 없겠지. 이유가 뭐요?"
왜 자신을 찾아왔냐고 묻는 것이었다.
"엘릭서라도 만들어달라고 할 셈이면 관두시오. 이제는 못 만드니까."
"아니다."
"아니면 영입을 할 생각이신가? 날 죽이겠다고 협박해도 소용없으니까 그것도 관두시고."
"그 또한 아니다."
무려 엘릭서로 인정받을 정도의 신약을 제작한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당연히 영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나는 딱히 그것을 목적으로 이 사람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대연금술사 굴피로.
그는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서도 아군 진영에 중요한 때에 한 번 큰 도움을 주는 강력한 조력자로서 등장했었다.
아까 길거리에서 소년을 돕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선인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굳이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더라도, 그의 신변이 위험하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면 보호해주는 게 좋았다.
왜냐면 지금 그는 아마······.
"세인테아의 눈을 피해서 칼데릭까지 온 거겠지."
굴피로가 쯧 혀를 찼다.
"뒷조사야 이미 다 했을 거면서 뭘 물으시나?"
그는 본래 세인테아 진영에 속해있던 인물이었다.
세인테아에서 가장 거대하고 위세 높은 마법사 집단인 마탑.
본래 그곳에 속해있던 연금술사인 그는 어떠한 이유로 마탑과 황실에 배신을 당했다. 엘릭서와 관련된 문제였다.
그리고 목숨만 건져 겨우겨우 추적에서 벗어난 그는, 몇 년 뒤 미래에선 이곳 칼데릭이 아니라 남대륙의 땅에 있었다.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굳이 6군주령의 수도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성향상이나 다른 여러가지 것들이나, 이곳 마헤아는 자리를 잡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폭왕의 군주성이 떡하니 있고 매일마다 '노예 검투'까지 벌여대는 도시였으니까.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소. 안 그래도 가능하면 바로 뜰 생각이오."
"그럼 7군주령의 수도로 오면 되겠군."
나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굴피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영입할 게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소?"
"영입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다스리는 땅으로 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나는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 굴피로. 그저 세인테아의 추적으로부터 그대의 신변을 완전히 보호해주고 싶을 뿐이야."
그가 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신변을 보호해주겠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군주가,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보호해주겠다니.
그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전부 사실인데.
"일단 이것부터 알아둬라, 굴피로."
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굴피로쯤 되는 인물에게 어설픈 이유를 갖다붙이기는 통하지 않을 테니.
"그대는 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 중 한 명이다. 그런 인물이 세인테아에 등을 돌리고 칼데릭에 왔는데, 이 땅에 머물고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이득이지. 칼데릭이 너의 안위를 챙기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당신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해도?"
"그래, 생각이야 나중에도 얼마든 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호감 사기라고 여겨도 좋다."
나는 굴피로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사소한 빚 하나 때문에 유저 일행을 끝까지 도와줬었다.
한마디로 뭘 받기만 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지금 당장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를 곁에 두고서 지속적으로 호감도를 쌓으면 언젠간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까.
"······호감 사기라, 허."
굴피로가 헛웃음을 흘렸다.
"칼데릭의 군주나 되시는 지고한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도 단순히 대륙적인 명성만으로는 군주에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단지 일신의 무력이 부족한 연금술사기에 이렇게 세인테아의 눈을 피해 숨어서 사는 신세가 된 것이지.
"이거 좀 마저 펴도 되겠소?"
굴피로가 내려놓은 담뱃대를 가리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잠시 연기만 뻑뻑 피워대더니, 곧 입을 열었다.
"대군주도 내 존재를 알고 있소?"
"아니."
"그러면 6군주는?"
"그 역시 모른다."
그에 굴피로가 어째서인지 작게 침음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만약 7군주령으로 가면 설마 군주성에서 머물러야 되는 것이오?"
"거처야 원하는 곳으로 얼마든 마련해주지."
순간 머릿속에 알키마스 공방이 떠올랐다.
굴피로와 그녀를 은근히 접촉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스칼릿은 재능 있는 연금술사고, 그런 그녀가 굴피로에게 조금이라도 연금술을 배울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테니까.
다시 생각에 잠긴 듯 굴피로는 말없이 한참을 담배만 태웠다.
그리고는 몇 분이 지난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7군주 그대의 말대로 엔록으로 가지. 어차피 거절해도 내 주위에 눈은 계속 붙여둘 것 아니오."
······음,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내 제안을 수락한 데에 그것까지도 고려한 듯했으니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잘 생각했다고 말하려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 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