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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56화 (56/189)

할루멘타 (6)

한순간 전방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쏟아지는 핏물 세례에 그렇게 된 것이다.

작고 가늘은 핏방울들이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뒤덮었다.

그리고 붕괴는 순식간이었다.

돌진해오던 몬스터들의 전열이 우르르 무너졌다. 서로 걸리고, 엉키고, 쓰러지고, 거칠게 지면을 뒹굴고 미끄러졌다. 자욱한 흙먼지가 퍼졌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단 몇십 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

아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더 이상 살아서 움직이는 몬스터는 없었다. 무더기로 겹겹이 쌓인 시체들의 언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시간이 얼마나 주어지든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였기에.

'이건 대체······.'

도대체 이건 어떤 종류의 힘이란 말인가?

지금껏 7군주의 능력은 바로 곁에서 제법 많이 봐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만한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아셸은 시선을 돌려 멍하니 7군주를 바라봤다.

손을 거둔 그는 무심한 눈으로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체들 너머, 촉수를 꿈틀거리며 다급히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괴물을. 마치 도망가는 모양새였다.

하찮다는 듯한 웃음을 흘린 7군주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는 저멀리 떨어진 허공에 있었다.

***

완전한 전멸.

저리 무식하게 떼거지로 몰려왔을 때부터 예정된 결과였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

다만 아셸이나 다른 두 사람은 완전히 넋을 잃고 있었지만.

어째서 몬스터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인지, 내 능력을 전혀 모르는 타인의 시선으로는 눈앞에 대학살 현장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저 약아빠진 새끼 보게.'

나는 촉수를 꿈틀거리며 열심히 도망가고 있는 대장 몬스터 놈을 바라봤다. 부하들이 전부 죽자마자 바로 줄행랑인가?

나는 공간 도약을 연달아 펼쳐 놈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그으으!

놈이 다급한 기색으로 또다시 촉수에서 마력구를 뭉쳐냈다. 이번엔 광선처럼 쏘지 않고 통째로 던졌다.

나는 공중에서 부동 장막을 펼쳤다.

장막과 충돌한 광구가 그대로 폭발했다. 가공할 위력이었으나 장막의 방어력을 뚫기엔 어림도 없었다.

섬광이 가시자마자 곧바로 혈술을 펼쳐 길쭉한 가시 형태로 만들어냈다.

아직 거리가 멀지만 피를 맞출 정도까지는 가까워진 상태였다.

허공을 가르고 쏘아진 핏물이 놈의 거대한 몸체에 적중했다.

쿠우웅!

요란스런 굉음과 함께 쓰러진 놈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나는 지면에 사뿐히 착지했다.

주위는 몬스터들의 시체 밭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잠시 둘러보고 있다가 괜히 입맛을 다셨다.

이만한 몬스터 군단을 학살하고도 경험치 하나 얻을 수 없다는 현실에 새삼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죽인 놈들이 얼마인데, 만약 레벨업이 가능했으면 지금쯤 몇 레벨이었을까.

다시 공간 도약을 해서 쓰러진 대장 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나저나 이런 놈이 왜 몇 년 뒤에는 할루멘타에 네임드 보스로 없었을까.

떠오르는 이유야 많았다. 더 강한 몬스터에게 당했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온 초인에게 죽었거나.

특히 광랑이 마경으로 사냥을 많이 다니기도 하니 어쩌면 그녀에게 걸려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내 내가 있는 곳으로 아셸이 달려왔다.

다른 두 사람도 어느새 근처로 와있었다.

몬스터들의 시체 사이에서 무언가를 빤히 살펴보고 있길래 뭘 보고 있나 했는데, 거대한 두꺼비 몬스터의 시체였다.

'······어.'

잠깐만, 저거 설마?

나는 그들의 옆으로 다가가서 같이 몬스터의 시체를 바라봤다.

데빌 토드. 두 사람이 복수를 위해 찾고 있었다는 몬스터.

아무래도 이놈도 지배에 걸려서 몬스터 무리 사이에 섞여있었던 모양이다. 일이 또 이렇게 되네.

"······이놈이 맞아요. 죽었네요."

체르시가 중얼거렸다.

켈립은 대답 없이 놈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허무함을 포함해서 복잡한 감정들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조금 무안한 채로 서있는데, 그가 이내 내게 시선을 돌려서 말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감사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르시도 어딘가 시원섭섭한 얼굴로 데빌 토드의 시체를 쳐다봤다.

다소 허무하긴 하겠지만 이걸로 깔끔하게 마경을 떠나는 게 그들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었다.

서걱.

다시 이리저리 시체를 살펴보던 켈립이 놈의 발가락 끝부분을 조금 베어내더니, 그것을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저걸 왜 챙기나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뭐, 동생의 원수라니 묘에라도 가져가려는 걸 수도 있지.

어쨌든 이걸로 전부 끝이었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진작 끝났었지만 아셸이 실종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됐다.

이번에도 참 이것저것 일이 많았다. 정작 얻어야 할 신비는 못 얻었는데.

***

체르시와 켈립, 두 사람도 목적을 이뤘기에 더 마경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방향이 같으니 밖으로 나갈 때까지는 동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헬루멘타를 빠져나온 뒤 작별을 나눴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론 경! 그리고 아셸 경도! 정말로 감사했어요!"

체르시가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고, 켈립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마지막으로 짧은 감사를 전했다.

나와 아셸은 다시 둘이 되서 이동했다.

말을 잃어버린 탓에 올 때와는 다르게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초재생 덕분에 체력이야 남아돌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렇게 부지런히 이동하며 긴 시간이 흐른 끝에 바로스가 기다리고 있는, 가장 처음 출발했던 도시로 돌아왔다.

히히힝!

달리는 마차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 창밖 경치를 구경했다.

이것으로 신비 찾기 여정도 끝이다. 이제 7군주령으로 돌아갈 때였다.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계획대로 얻었기에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신비는······ 역시 아쉽네.'

나는 끝내 할루멘타에서 얻지 못한 마지막 신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의 육체를 버리고, 조건이 맞는 타인의 몸을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비.

한마디로 빙의 능력이다.

다만,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버린 자신의 육체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다는 패널티는 있었지만.

나한테 있어선 별 쓸모도 없을 그 신비를 얻으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 신비를 통해 미래에 거대한 재해를 일으킬 빌런이 하나 존재했으니까.

나는 라사의 메인 스토리를 전부 클리어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큰 문제들을 일으킬 주요 빌런들의 존재 역시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빌런들과 다르게 '놈'은 성가시게도 그 빙의 능력으로 자신의 망가진 몸을 바꿔버린 놈이었다.

때문에 그 전에는 어떤 몸이었는지, 또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유일하게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신비를 미리 선점해서 아예 문제를 원천차단시키려고 했었던 건데······.

'어쩔 수 없지.'

나는 깔끔하게 미련을 털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나.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앞으로도 계속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

마차는 달리고 달려 1군주령, 3군주령을 거쳐 6군주령까지 도착했다.

1군주령에서 대군주령을 관통해 바로 7군주령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발킬로프에 대한 소식을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에 일부러 3군주령을 거쳤다.

"후우······."

그렇게 해서 현재 위치는 6군주령의 수도인 마헤아.

나는 여관 방의 창틀에 서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음 군주 회의까지는 몇 달의 시간이 남았다. 군주성으로 돌아가고 나면 뭐부터 해야 되나 고민 중이었다.

세인테아로 넘어갈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까진 촉박하고, 이제 다음 회의까지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기에.

그때 거리에서 소란이 일었다.

나는 고개를 내렸다.

웬 남자가 한 어린 소년의 멱살을 붙잡고서 윽박을 질러대고 있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걸 잡은 모양이었다. 주위의 행인들이 힐끔거리며 그들을 쳐다봤다.

"어이, 무슨 일이야?"

그때 무장한 병사 둘이 그들을 향해서 다가왔다.

소년의 멱살을 잡고 있던 남자가 조금 움츠러든 기색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짓더니 소년을 쳐다봤다.

"어이구, 소매치기라고? 비켜보쇼. 이런 몹쓸 버러지한테 그리 말로만 해서 되겠나?"

그리고는 남자를 밀치더니 갑자기 창대를 휘둘러 소년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병사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는 듯 쓰러진 소년을 가차없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악, 아악······!"

병사의 발길질에 밟힌 소년의 팔에서 우득 소리가 났다. 소년이 더 큰 비명을 내질렀다.

지나치게 가혹한 손속에 오히려 소매치기를 당한 남자도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봤다.

주위 행인들도 다들 쉬쉬하며 병사들을 피해서 가던 길을 갈 뿐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윗물이 썩으면 아랫물도 저렇게 썩어버리는 법이다.

폭왕이 다스리고 있는 이곳 6군주령의 치안이란 대체로 저런 꼬라지였다.

뒷골목의 양아치마냥 여행객들의 돈을 털거나, 처벌을 가장해 폭력을 행사하며 즐긴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그랬었지.

그렇게 병사들은 몇 분 가량을 실컷 소년을 짓밟고 난 뒤에야 떠나갔다.

"으, 으으······."

온몸이 흙먼지에 피투성이가 된 소년이 바닥을 꿈틀거렸다. 물론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걸 도와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자니, 그때 한 지나가던 노인이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난쟁이처럼 작달막한 체구에 주황색의 수염이 성성한 노인.

그가 소년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혀를 차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그의 부러진 팔에 꼴꼴 붓기 시작했다. 포션이었다.

그렇게 노인은 소년을 치료해주고서 곧장 다시 가던 길을 가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등에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

그 일련의 광경을 조금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이 세계에서 포션은 질이 낮은 하품이라도 귀하다. 그런 포션을 남에게 선뜻 베풀어줄 수 사람이란 보기 드문 선인이었다.

멀어져가던 노인은 이내 어느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거리 구경을 관두고 침대에 누웠다.

한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번뜩하고 무언가가 스쳤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서 튕기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그 노인, 설마?

개성이 강한 외모였기에 나는 이내 곧바로 노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 사람이 왜 이 도시에 있지?'

지금 시점에서의 그는 6군주령의 수도에 있었단 말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거물의 발견이었다.

잠시 어쩔까 고민하다가, 서둘러 방 한쪽에 걸려있던 로브를 뒤집어쓰고 여관 밖으로 나섰다. 아셸을 놔두고 혼자서.

나는 거리로 나서서 노인이 들어갔던 골목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어진 길로 쭉 이동하니, 이내 저멀리 있는 포션 가게의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인가 싶어 다가가려는데 옆쪽으로 난 샛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잠깐 멈춰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아까 거리에서 봤던 병사 두 놈이 나를 향해 건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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