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루멘타 (5)
할루멘타의 어느 깊은 땅굴.
그것이 원통처럼 길고 거대한 아가리를 지상으로 쭉 뻗었다. 몸체에 박힌 수백의 눈들이 눈동자를 뒤룩거리며 사방을 훑었다.
그것의 주위로 날아든 새들이 말을 전하듯 시끄럽게 지저귀며 주위를 멤돌았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빠르게 진화하며 특히나 뛰어난 지성을 가지게 된 그 괴물은, 자신의 종속들을 죽이고 다니는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했다.
아주 작디 작은 벌레 넷.
괴물은 그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가끔씩 외부에서 흘러들어오곤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생물들.
어떤 것은 제 덩치에 맞게 나약하기 그지없다가도, 또 어떤 것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기도 했다.
특히나 최근에 이 땅을 휩쓸고 다녔던 붉은 벌레는 그야말로 재앙과 다름없었다.
그 붉은 벌레에 대항해서 괴물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이 안식처에 숨을 죽이고 숨어있는 것뿐이었다. 벌레가 종속들을 마음껏 학살하다가 만족하고 떠나가기를 기다리며.
그오오.
그때의 화풀이를 하기엔 마침 적절한 먹잇감들이었다.
그것이 지상으로 거체를 일으켰다. 낮고 무거운 포효를 내뿜어 일대에 위치한 모든 종속들을 불렀다.
이윽고 사방의 지평선에서 시커멓고 거대한 물결들이 몰려왔다.
***
"몸은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정신을 차린 뒤에도 아셸은 현실감이 마저 돌아오지 않았는지 잠시 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몇 분 지나고 나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완전히 평소처럼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됐다. 앞으로는 주의해라."
나는 식물 줄기 한쪽에 얽혀서 죽어있는 말들을 슬쩍 바라봤다.
아셸과 함께 덩달아 끌려갔다가 죽은 것이었다.
그녀가 살았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쟤들도 꽤 오래 함께한 말들인데. 짧게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내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두 사람도 정신을 차렸다.
멍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저희가 언제 쓰러진 건가요?"
나는 축 늘어진 식물 줄기를 가리켰다.
그녀가 상황을 이해한 듯 탄성을 뱉었다. 그리곤 내 옆에 서있는 아셸을 발견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동료는 무사히 구하셨군요? 다행이네요."
반면 남자는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몸 상태를 확인하듯 살펴보다가 일어났다.
인지도 못한 채 당해서 쓰러졌으면 저게 보통 반응이었다. 여자 쪽이 이상한 거지.
아셸이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어쩌다 우연히 만난 자들이다. 모험가라고 하더군."
"아······."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다. 찾고 있다는 몬스터에 대해서 말해봐라. 아는 게 있다면 알려주지."
내게 원하는 게 있기도 하니 돕겠다고 쫓아온 것일 터다.
어쨌든 두 사람 덕분에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얻고 추적에 시간을 훨씬 단축한 건 사실이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물론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알고 있는 몬스터면 기억나는 출몰 지역이라도 알려줄 생각이었다.
끼이익!
그때 하늘에서 날고 있던 새들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나는 슬쩍 놈들을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자꾸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는 것 같은데, 뭐지?
"예, 저희가 찾고 있는 건 생김새가 두꺼비와 닮은 몬스터인데······."
여자가 나서서 찾고 있다는 몬스터에 대해서 설명했다.
두꺼비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데빌 토드?'
시커먼 전신에, 3갈래로 갈라진 혀를 가진 거대 독두꺼비. 레벨은 아마 70에 가까웠던가?
할루멘타에서 두꺼비형 몬스터라고 하면 생각나는 건 놈밖에 없었다.
"······온몸이 새카맣고 혀가 여러 개로 갈라진 놈이었어요. 어, 그리고 또 독을······."
"어떤 몬스터인지 알 것 같군."
내 말에 여자보다도 남자가 더 격하게 반응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서 다급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전에, 놈은 왜 찾고 있는 건지부터 물어도 되겠나?"
이유를 묻는 이유는 2가지였다.
하나는 단순한 호기심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데빌 토드. 할루멘타의 네임드 보스 중에선 최약체에 속하는 몬스터지만 그래도 일단 보스다.
게임에서도 유저의 독 저항력은 대부분 무시할 만큼 강력한 극독 공격을 하던 성가신 놈이었다.
아무리 남자의 레벨이 높더라도 놈을 상대하다 까딱 방심이라도 했다간 한 번에 골로 갈 것이었다.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소. 그저 놈을 죽이기 위해서요."
"어째서?"
"놈이 내 동생을 죽였으니까."
아······ 복수인가?
더없이 간단하고 명확한 이유였다.
근데 동생은 뭘 하는 사람이었길래 이런 마경을 돌아다니다가 죽은 거지?
그 의문은 이어진 여자의 말에 풀렸다.
"제 동료이기도 했죠."
"동료?"
"네. 다섯이서 마경이든 어디든 대륙 곳곳을 탐험했었어요. 녀석이 죽은 뒤로는 지금은 다 뿔뿔이 흩어져버렸지만."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창 마경을 돌아다니고 어쩌고 했었지.
남자에 비해 레벨이 낮을 뿐이지 여자도 결코 낮은 수준의 마법사는 아니었다.
59레벨이면 어지간한 대귀족가에서도 한자리 꿰찰 수 있는 실력이니까. 모험가 기준에선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또 마경을 함부로 돌아다닐 정도는 아닌데.'
내 눈빛에서 의아한 기색을 읽었는지 여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워낙에 합이 잘 맞던 녀석들이라, 강한 몬스터를 마주쳐도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었어요. 근데 그게 몇 번 반복되면서 자신감이 되고, 자신감이 쌓여서 자만이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뒷말은 굳이 잇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데빌 토드를 마주쳐서 끝내 그는 죽고 나머지만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푹 한숨을 내쉰 그녀가 남자를 쳐다봤다.
"그렇게 반 년이 흘렀는데, 갑자기 녀석의 형이라면서 이 사람이 저를 찾아왔어요. 동생의 복수를 하려니까 할루멘타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그래서 어찌어찌하다가 결국 이곳까지 함께 오게 된 거예요."
나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솔직히 더 궁금한 건 그의 정체였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모험가인 것 같지는 않고, 평범한 신분은 아닐 텐데.
"아, 그리고 이 사람은 바르카토의 레인저 출신이었다고 해요."
······바르카토?
여자가 남자의 정체를 대신 밝혔다.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바르카토라면 세인테아의 남부 국경을 수호하는 레인저 집단의 최정예 전력 아닌가. 어쩐지 보통 레벨이 아니더라니.
남자가 멋대로 정체를 말한 게 못마땅한 듯 여자를 한 번 흘겨보고는, 내게 재촉하듯 말했다.
"이제 그 몬스터에 대해 아는 정보를 말해주시오."
뭐, 복수라는데 어쩔 수 없지.
내가 어떻게 말리거나 설득할 문제는 아닌 듯했다.
"그나마 놈이 출몰할 확률이 높은 지형이나 환경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
"······!"
"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지 정확한 건 아니야. 그거라도 괜찮다면 알려주지."
"뭐든 상관없소. 알려주시오."
나는 그에게 데빌 토드가 서식할 만한 장소의 특징, 그리고 아예 지역을 직접 몇 군데 짚어주었다.
뭣 하면 기억나는 공격 패턴까지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게임과 현실이 얼마나 다를지는 알 수 없었다. 괜히 역효과만 날까봐 그건 관두기로 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남자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오?"
그저 마주친 정도로는 알 수 있는 지식도 아니고 의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자유다."
딱히 둘러댈 말이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침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감사하오."
이것으로 서로에게 볼일은 끝이었다.
숲은 빠져나가야 했기에 그때까지만 마저 동행하기로 했다.
원래 말이 지고 다녔던 짐들은 아셸이 모두 짊어졌다.
숲길을 걷다가 여자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저는 체르시라고 해요."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남자도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켈립이오."
어차피 곧 헤어질 텐데 이제와서 굳이 이름을 주고받나 싶었다.
"론이다. 이쪽은 아셸."
체르시가 다시 물었다.
"론 경이셨군요. 여쭙기가 조심스러워서 이제야 여쭙는 건데, 경께선 누구신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모험가라고 했었는데."
그녀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건 아무리 봐도 진짜 신분이 아니시지 않나요? 옆에 분도 지금 보니까 동료가 아니라 호위기사······."
내 대답이 없자 그녀도 더 묻지 않고 다른 질문들을 했다.
"그러면 아까 전에 마주쳤던 곰은 대체 어떻게 죽이신 건지 알려주세요, 네? 마력이 아예 안 느껴졌는데 마법은 아니죠?"
모험가라 그런가 호기심이 많은 여자였다. 눈치를 보면서도 물어보고 싶은 건 다 물어본다.
전부 대답하기가 애매했기에 그냥 적당히 무시했다.
그녀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더니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새들이 저희 머리 위를 빙빙 도는 것 같네요. 기분 탓인가?"
나도 계속 거슬렸던 것이기에 슬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까부터 어디론가 왔다거리면서 머리 위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새들. 왜 저럴까.
거의 숲 밖으로 빠져나왔을 즈음이었다.
초감각으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
아니, 희미한 건 단지 거리 때문이었다.
멀리서부터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그것은 아주 방대한 머릿수의 무리였다.
이내 땅의 진동까지 미세하게 느껴지며 다른 세 사람도 이상함을 인지했다.
"어······ 뭐죠? 땅이 진동하는데?"
그리고 이윽고 숲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전방의 대지로 지평선을 따라서 펼쳐져있는 검고 거대한 선을.
그것은 이곳 할루멘타 마경의 수많은 괴물들로 이루어진 몬스터 대군이었다.
"······."
순간 저게 대체 뭔가 싶었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아니······ 진짜 저게 뭐야?
"······꿈인가?"
체르시가 넋을 놓은 얼굴로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옆에서 아셸과 켈립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몬스터들 사이에 눈에 띄는 놈이 하나 있었다.
아주 거대하고, 몸체 한가운데에 길고 두꺼운 촉수 같은 게 달려있는······ 그보다 괴상한 생김새는 둘째치고.
【Lv. 91】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놈의 레벨이었다.
91레벨.
권성과 동일한, 그리고 전에 루터스 산맥에서 만났던 벨르바고라보다도 1레벨이 더 높은 괴물.
'······아.'
나는 놈의 레벨을 확인하고서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저놈이었음을.
마경을 돌아다니면서 이해하기 힘든 몬스터 무리를 자주 조우했던 것도, 아까부터 머리 위에서 거슬렸던 새들도, 지금 눈앞에 펼쳐져있는 몬스터 군단도, 전부 놈의 소행이었음을.
'지배 능력.'
다른 몬스터들을 지배하고 자신의 노예처럼 부리는 능력.
현재 시점에서의 할루멘타에는 아무래도 지배 계열의 능력을 가진 네임드 보스가 존재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게 뭔 미친 물량이야.'
놈이 거대한 촉수를 꿈틀거리며 이쪽을 향해 뻗었다.
촉수의 끝에서 곧 빛이 모여들더니 거대한 자색빛의 광구가 생성되었다.
여기까지 느껴지는 섬뜩한 마력의 기운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부동 장막을 최대한 넓게 펼쳤다.
번쩍!
시야가 완전히 빛으로 물들었다.
놈이 쏘아낸 마력포가 장막을 완전히 뒤덮은 것이었다.
빛이 가시고 다시 돌아온 시야에 보인 건 폐허가 된 주위였다. 등 뒤로 나무들이 우수수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장막에 막힌 부분만 멀쩡하고 숲 한가운데가 지워진 듯 뻥 뚫려있었다.
"······무슨 정신 나간."
상황을 파악한 켈립이 맥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넋을 놓고 있던 체르시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 방금 막아주신 건가요?"
나는 대답 없이 저멀리 있는 놈을 빤히 응시했다.
방금의 일격이 아무래도 총공격의 신호였나 보다.
몬스터들이 일제히 포효를 터뜨리는가 싶더니 이쪽을 향해서 해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도, 도망가죠! 빨리요!"
체르시가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켈립은 왜 가만히 있냐는 듯 날 쳐다봤다.
"론 님."
아셸도 드물게 다급한 기색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일천의 머릿수가 넘는 마경의 몬스터 대군단. 저것과 정면으로 맞부딪혔다가는 뼛조각 하나 남기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도망칠 필요는 없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경우라 좀 당황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내 눈에는 저것들 전부가 죽으려고 뛰어드는 불나방 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앞쪽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스으으.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혈액이 하늘 높이 떠올라 뭉쳐지며 구체를 만든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혈술을 펼쳐 피를 뽑아냈다.
점점 크기가 불어나는 시뻘건 혈구는 이내 내 몸통만큼이나 거대해졌다.
나는 그것을 최대한 압축한 뒤, 그대로 전방을 향해 전력으로 폭발시켰다.
퍼어엉!
허공에서 터진 무수한 핏방울들이 대지를 뒤덮은 괴물들을 향해 폭우처럼 쏟아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