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루멘타 (4)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공간 도약을 펼쳐 도로 내려왔다.
내가 갑자기 앞에 나타나자 뒤늦게 몸을 일으키고 있던 두 사람이 움찔 놀랐다.
"테, 텔레포트······?"
여자가 경악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누구지?"
마법사인 여인과 검사인 남자.
특히 남자 쪽의 레벨은 73으로 상당히 높았다.
설마 마경의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사람을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뭐 하는 사람들이지?
남자가 뒤쪽에 쓰러진 불칸티어와 날 번갈아 보며 침음을 흘렸다. 기껏 구해줬더니 경계하는 기색이다.
대신 여자가 머리에 묻은 흙을 털며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예. 저희는 그냥 모험가인데요."
"모험가? 둘이서 이런 마경을 돌아다니고 있었나?"
"네, 그런데요······."
"어째서?"
"그, 그야 모험가니까 모험을 하려고······?"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그가 여전히 날 경계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목숨을 구해주신 건 감사하오. 경은 누구이신지 여쭤도 되겠소?"
나는 뭐라 대답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모험가."
"······모험가가 마경엔 어째서?"
"······모험을 하려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음,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마경의 한복판에서 생뚱맞게 마주친 낯선 사람.
내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것도 없고, 그냥 모험가라고 둘러대는 게 적당한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충 이들도 이들의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더 관심은 안 가지기로 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다니게.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려 했다.
"앗, 잠깐······!"
"경, 잠시만."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붙잡았다.
왜 부르나 쳐다보자 여자가 먼저 말했다.
"그, 실례가 아니라면 잠시만 뭐 좀······."
"실례다."
뭔 부탁이라도 하려나 싶어 바로 끊어버렸다.
아셸의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찾아야 하는데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아,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데······?"
여자를 뒤로 하고 남자가 나섰다.
"찾고 있는 몬스터가 있는데, 혹시나 그 몬스터를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소."
"······몬스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 한시가 급······."
말을 하다가 뚝 끊었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단둘이서 헬루멘타의 중앙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던 이들.
사정을 설명하면 혹시나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싶은데."
"예?"
"내 동료가 갑자기 사라졌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이들에게 내 사정을 빠르고 간결하게 요약해서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셸이 사라져버린 것, 현장에 전투의 흔적은 아예 없었던 것, 그리고 흔적을 쫓아 현재 이 숲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까지.
그들은 내 뜬금없는 설명을 일단 잠자코 모두 경청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이 되나?"
설명이 끝나자 남자가 여자를 쳐다봤다.
"글쎄요, 저도 잘······ 아."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혹시 뭐 상대를 수면시키거나, 아니면 환각을 불러일으키거나, 그런 류의 능력을 가진 몬스터에게 잡혀간 건 아닐까요?"
그건 나도 짐작한 부분이었다.
다만, 아셸의 레벨이 레벨이기에 웬만큼 강력한 능력을 가진 놈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처리한 게 아니라 굳이 끌고 간 이유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내 게임 지식으로는 환각계 능력에 특화된 몬스터는 할루멘타에 없었다.
"아, 생각해보니 짐작이 가는 몬스터가 있기는 한데······."
그러나 여자는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기억을 더듬듯 말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료들하고 할루멘타를 한창 돌아다녔던 때가 있거든요. 그때 마주쳤던 놈인데 하마터면 전부 죽을 뻔했죠."
"어떤 놈이지?"
"음, 그게······ 사실 그게 뭐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느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차리고 보니 웬 식물 줄기 같은 것에 꽁꽁 묶여있더라구요."
······식물 줄기?
나는 쫓고 있던 바닥의 흔적을 다시 쳐다봤다.
내가 상상하고 있는 무언가의 이미지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설명이었다.
"근데 그 줄기에 묶여있는 동안 저도 그렇고, 나중에 물어보니까 다른 동료들도 모두 악몽을 꿨다고 하더라고요. 떠올리기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헤맸다고 해야 되나. 결국 한 명이 깨어나서 나머지를 전부 구해준 덕에 간신히 살았지만요."
악몽······.
나는 미간을 좁혔다. 어쩐지 슬슬 감이 잡혔기 때문이다.
마경의 몬스터들 중에는 온갖 괴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놈들이 많다.
그리고 그중에는 상대의 마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그 고통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 것들도 있었다.
특히 정신력이 약하거나 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당하기가 쉬운 종류의 능력이었다.
'이놈도 그런 놈인가?'
내 기억에 할루멘타에 그런 류의 몬스터는 없었지만, 지금은 과거 시점이니 모르는 몬스터는 얼마든 있을 수 있었다.
만약 이놈이 그런 식의 환각계 능력을 가진 몬스터라면, 그래서 아셸을 손쉽게 제압해서 끌고 간 거라면?
나는 다시 흔적을 쫓아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다급히 나를 따라왔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놈이 남긴 흔적을 쫓는 중이다."
"흔적······?"
남자가 눈매를 좁힌 채 내 시선이 향한 바닥을 살피더니, 곧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희미한 흔적을 쫓아가고 있는 거였소?"
"그래."
"어, 뭐가 보이긴 해요? 제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여자도 바닥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아무튼 동료 분을 구하러 가시는 거라면 우선 저희도 도와드릴게요."
"정보를 준 건 고맙지만, 딱히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진 않은데."
"어, 그야 엄청 강해 보이시니 그렇긴 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도움이 될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죠?"
여자가 남자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그는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뜻밖의 두 낯선 사람까지 붙여서 추적을 함께하게 됐다. 돕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었으니.
"저쪽으로 방향을 꺾었군."
그리고 남자는 추적에 꽤나 조예가 깊은지, 흔적이 헷갈릴 때마다 제대로 방향을 파악하고 짚어주었다.
덕분에 잡아먹는 시간을 아끼며 속도가 붙었다.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듯 점점 선명해지는 흔적.
"······."
그리고 마침내 목표했던 것을 발견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눈앞의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Lv. 70】
주위의 나무들을 휘감고 허공에 뻗어있는 식물 줄기. 그 한가운데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묶여있는 한 사람.
바로 아셸이었다.
"저, 저놈이 맞아요! 그때 그놈이에요!"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여자가 그렇게 소리쳤고, 남자는 곧바로 검을 뽑아들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우우웅.
그 순간 식물을 중심으로 한순간 역장처럼 파동이 퍼져나왔다.
파동에 고스란히 노출된 두 사람이 위태롭게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런 둘을 쳐다보다가, 다시 식물 줄기로 시선을 옮겼다.
'뭐야?'
이게 놈의 능력인가?
하지만 제왕의 혼 덕분에 내게는 통하지 않는 듯했다.
놈의 능력이 환각 계열이라고 들었을 때부터 이럴 건 예상했다.
나는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었다.
내가 멀쩡하자 놈이 당황한 듯 꿈틀거리더니 연이어 파동을 쏘아냈다. 하지만 통할 턱이 없었다.
정신적인 공격이 안 되니 놈은 남아있는 줄기 몇 가닥을 내게 채찍처럼 휘둘렀다. 하지만 그 역시 부동 장막에 막혔다.
레벨이 높은 건 전부 환각 능력 때문인지 형편없는 파괴력이었다.
피잇.
내 손가락에서 쏘아진 핏방울이 놈의 줄기에 닿았다.
생명이 끊어져 축 늘어진 놈은 더 이상 성가시게 꿈틀거리지 않았다.
나는 아셸이 묶여있는 위쪽 줄기로 순간이동해서 그녀의 앞에 섰다.
"······."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줄기 사이로 드러난 아셸의 얼굴, 볼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이 보였기 때문이다.
대충 짐작이 되었다. 지금 그녀가 어떤 악몽을 꾸고 있는 건지는.
나는 묵묵히 몸에 묶인 줄기를 하나씩 뜯어내기 시작했다.
전신이 잔줄기에 어지럽게 엉켜있어서 빼내려면 고생을 좀 해야 될 듯했다.
***
"언니는 꿈이 뭐야?"
아셸이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수련은 팽개치고 풀밭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던 동생의 물음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아니면 되고 싶은 거라거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동생은 때때로 이런 생뚱맞은 질문을 자주 던지곤 했다.
아셸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하고 싶은 건 잘 모르겠고······ 일족 제일의 전사가 되고 싶은데."
동생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에이, 그게 진짜 언니가 되고 싶은 거야? 그건 어른들 바람이잖아! 맨날 언니가 천재라고 치켜세우면서 수련 열심히 하라는 말밖에 안 하고."
"아니야. 나도 그러고 싶어."
"거짓말.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 이 둔해빠진 언니야.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 분명 뭐라도 있을걸?"
아셸은 다시 한 번 고민해봤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별로 없는 것 같아.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그 대답이 동생에겐 지루하게만 들렸나 보다.
동생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우리 언니지만 참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그러는 넌 뭘 하고 싶은데?"
"나? 나야 당연히 산맥 바깥으로 나가는 거지!"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산맥 저편을 가리키며 신나서 소리쳤다.
"언젠가 꼭 바깥세상으로 나가서 대륙을 모험할 거야! 그리고 온 세상에 위대한 모험가로 내 이름을 알리는 거지!"
"또 그 소리를 하네. 진심이야?"
"그럼 늙어 죽을 때까지 여기서 평생을 살 일 있어? 아무리 언니라도 내 꿈은 절대로 못 막아."
아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족이 산맥 바깥의 세상으로 나가는 건 금기였다.
그럴 경우엔 산맥에 있는 모든 부족, 그러니까 일족 전부가 나서서 막는다.
왜냐면 그것이 그들의 터전을 외부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동생은 시작부터 막힐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언니는 궁금하지도 않아? 산맥 바깥에 대체 어떤 세상이 펼쳐져있을지?"
"글쎄. 나가봐야 배척만 당하지 않을까."
"플로빅 할아범이 말해줬어. 대륙 북쪽에는 온갖 종족들이 다 모여서 사는 칼데릭이란 땅이 있다고."
플로빅은 부족 제일의 연장자이자, 이제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바깥세상을 직접 경험해본 일족이었다.
"거기서는 어떤 종족도 배척하지도, 배척받지도 않는다고 했어. 그리고 다스리는 우두머리가 무려 드래곤이래!"
그녀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만약에 밖으로 나간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할 거야. 새로운 모험! 새로운 동료! 그리고 새로운 사랑!"
"음."
"어째 내 주변에는 죄다 따분하고 한심한 남자들밖에 없어. 밖으로 나가면 나한테 어울리는 진정한 반려도 찾을 수 있겠지?"
그리곤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묻는다.
"언니는 어떤데? 수련하고 먹고 자고, 수련하고 먹고 자고, 계속 이렇게만 살다가 결혼은 또 누구랑 하려고?"
"누구랑 하냐니······ 때가 되면 부모님이 적당한 상대를 맺어주시겠지."
"아니, 뭔 이야기를 들은 거야. 언니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지! 부모님이 데려오기만 하면 저기 겔트나무 부족장 아들처럼 쪼다 같은 놈이랑도 결혼할 거야?"
"그건 아니지만."
동생이 불만스런 얼굴로 다시 풀밭을 뒹굴대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그러니까······ 그래, 그러면 되겠네. 나중에 내 결심이 완전히 섰을 때 일족 제일의 전사가 된 언니가 다른 사람들을 혼자서 전부 막아주는 거지. 그 사이에 나는 산맥을 무사히 빠져나가고."
엉뚱하기 그지없는 말에 아셸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웃어? 난 진심인데? 그래도 동생 평생의 소원인데 안 들어주진 않을 거지?"
그때 저멀리서 부르는 목소리에 자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이 온화하게 웃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였다.
"아싸, 밥 다 됐나 보다. 수련 끝."
"너 검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잖아."
"헤헤, 아빠한테는 비밀이다? 엄마아!"
먼저 잽싸게 달려가는 동생을 보며 아셸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그녀가 어서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평화롭다. 따스하다. 그리고 안락하다.
아셸은 더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
수련을 하고, 사냥을 하고,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웃고 떠들고, 동생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저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이라도 지금의 행복이 영원토록 이어지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 영원할 것만 같았던 평화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쉽게 무너져버렸다.
"도망쳐라, 아셸! 뒤돌아보지 말고!"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가 괴한들을 막아서고 처절하게 소리쳤다.
그 품에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어머니의 시체가 있었다.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
갑옷을 입은 이들이 부족들을 검으로 베고, 로브를 입은 이들이 불태웠다. 창을 든 괴물 하나가 부족의 전사들을 모조리 무참하게 도륙했다.
사나운 우뢰조차 산맥 전체에 메아리치는 일족의 비명을 가리지 못했다.
아셸은 동생의 손을 잡고 달렸다. 핏물을 밟고, 시체들을 넘고, 악귀처럼 검을 휘두르며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몸을 움직였다.
비명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만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도착했을 때, 더 이상 괴한들의 모습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던 괴물은 끝내 자매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절벽 끝에 내몰린 둘을 향해 걸어왔다. 무정한 눈이었다. 일족의 핏물로 한껏 적셔진 창날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아셸은 동생을 등 뒤로 떠밀었다. 이곳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을 생각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때 갑작스레 등에 격통이 일었다.
"······!"
동생의 손이 상처를 꾹 짓누르고 있었다.
어째서, 의문을 품을 틈조차 없었다.
한순간 휘청인 몸을 그녀가 거세게 떠밀었다. 아셸은 무력하게 허공으로 떠밀렸다.
손을 뻗어 동생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그녀의 몸이 절벽 아래의 강물로 서서히 추락했다.
서글픈 얼굴로 웃는 동생의 중얼거림만이 귓가에 희미하게 닿을 뿐이었다.
"······살아남아, 언니."
곧바로 돌아서서 괴한을 향해 달려드는 동생과, 그런 그녀의 가슴팍을 꿰뚫은 은빛의 창날이 마지막으로 시야에 비쳤다.
아셸은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시야가 암전되었다. 세상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이내 볼을 타고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하염없이.
'왜······.'
바깥의 세상 같은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평화롭게 산맥에서 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부질없는 후회와 격정이 차올랐다.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려선 안 됐는데. 살아남은 건 동생이었어야 했는데. 모두와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었어야 했는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홀로 살아남았단 말인가?
이제 곁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일족도, 터전도, 부모님도, 동생도, 아무것도.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부스럭.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던 몸이 덜컥 멈추었다.
퍼석. 찌지직.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아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물속이 아닌 숲속이었다.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살아는 있나 걱정했더니, 팔자 좋게 자고 있었군."
아셸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두 눈만 깜박거렸다.
얽혀있는 풀줄기를 털어낸 7군주가 손을 뻗었다.
"그만 일어나라."
아셸은 그 새하얀 손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마주 손을 뻗었다.
이제 무엇이 됐든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꼭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