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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53화 (53/189)

할루멘타 (3)

어두운 숲 한가운데, 한 쌍의 남녀가 모닥불 앞에 앉아있다.

허리춤에 여러 종류의 무기를 차고 있는 남자와, 얇은 로브 차림의 여자.

그들의 옆에는 난도질이 된 채 죽어있는 거대한 늑대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익숙하다는 듯 단검으로 몬스터의 살점을 슥슥 발라내서 불 위에 올린 여자는 휘파람을 불며 고기가 익기를 기다렸다.

"마경의 몬스터라고 해서 다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거든요. 오히려 몇몇 놈들은 보통 짐승의 고기보다 훨씬 맛있다고요."

여자의 말에도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저 타오르는 불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가 칫 혀를 차며 고기가 꽂힌 꼬챙이를 뒤적거렸다.

"그래서, 중앙 지역까지 왔는데 이제부터 어쩌려고요?"

"놈을 찾아야지."

"그러니까 자세한 계획이 어떻게 되냐고요.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입만 다물고 있었잖아요."

"그런 건 없다. 할루멘타 전체를 뒤져서라도 놈을 찾아서 죽인다. 그뿐이야."

무식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대답에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했잖아요, 마경이 어떤 곳인지. 그놈도 지금쯤 더 강한 괴물한테 진작 잡아먹혔을 수 있다니까요? 그러면 어쩌게요?"

"계속 그렇게 참견할 거면 따라오지를 말라고 했을 텐데."

그녀가 불만스레 미간을 좁혔다.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 했죠?"

"······."

"랜드는 내게도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동료였어요. 그 형이 동생 복수를 하겠답시고 기약도 없이 사지를 떠돌겠다는데, 내가 참견을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쓸데없는 걱정이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

"예예, 아무렴요. 그러시겠죠. 무려 그 악명 높은 바르카토의 레인저셨는데, 저 같은 모험가 나부랭이가 감히 비교가 되겠나요? 길 안내하고 고기 굽기나 열심히 해야죠."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뒤적였다.

남자가 그 광경을 보다가 슬쩍 말했다.

"······식량 놔두고 몬스터를 굽겠다고 나선 건 너다."

"누가 뭐래요?"

"시킬 일이 있으면 말해라."

"없어요. 다 구우면 먹기나 해요."

그녀는 퉁명스레 말하면서 속으로는 피식 웃었다.

성격은 정반대지만 마음 여린 건 형제가 참 똑같았기 때문이다.

크릉!

한창 고기가 익어가는데 수풀이 흔들리더니 다시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거대한 전갈과 다리가 여섯 달린 악어, 그리고 흉악한 뿔이 달린 사슴이었다. 종잡을 수가 없는 괴상한 조합.

긴장한 얼굴로 옆에 내려둔 스태프를 집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허리춤의 단검 하나를 뽑아들었다.

푸슉!

빛살처럼 쏘아진 단검이 가장 먼저 사슴의 미간을 관통했다.

이어 곧장 장검을 뽑아든 남자가 몸을 날려 전갈을 향해 돌진했다. 검날에는 푸른빛의 짙은 검기가 빚어진 채였다.

독침을 바짝 세운 채 휘둘러오는 꼬리를 피하고 검을 휘둘러 그것을 반토막냈다.

남자는 몸부림치는 전갈의 몸체를 난도질하다가 순식간에 머리까지 베어내 절명시켰다.

콰악!

옆쪽에서 펄쩍 뛰어오른 악어가 애꿎은 허공만 물어뜯었다.

기습적인 일격이었지만 남자는 어느새 땅을 딛고 허공으로 도약한 채였다.

그리곤 나무 기둥을 한 번 디디고 곧장 다시 아래로 쏘아지더니, 악어에게로 떨어지며 그대로 머리를 꿰뚫었다.

"······헤에."

순식간에 셋을 처치해버리고 유유히 검을 거두는 남자의 모습을 여자가 잠시 넋 놓고서 바라봤다.

나서서 도울 틈도 없이 간단히 끝났다. 그의 실력이야 여기까지 오면서 충분히 경험했지만 볼 때마다 놀라웠다.

"이런 놈들을 자주 마주치는군."

남자가 죽은 몬스터들을 슥 둘러보고는 말했다.

사슴, 악어, 그리고 전갈. 도대체 무슨 조합인지 알 수가 없는 무리.

"마경의 몬스터들은 원래 이렇나?"

"아뇨, 그럴리가요. 그냥 이놈들이 이상한 거예요."

그렇게 말한 여자도 묘한 눈빛으로 그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마경은 보통의 상식을 벗어난 장소고, 갖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하는 거야 일상이다.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몬스터 무리를 여기까지 오며 꽤나 마주쳤다.

여태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그녀도 슬슬 의아함과 이상함을 느꼈다.

끼이익!

고개를 들어올리니,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내며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기로 신경을 돌렸다.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동안 고기가 벌써 다 익은 듯했다.

***

곤란하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상정해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동굴 밖으로 나오니 온데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아셸. 거기다 말들도 사라졌다.

동굴에 있는 동안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냐고, 대체······."

몬스터에게 습격이라도 당했나?

떠오르는 가능성은 그것밖에 없었다.

무언가 불가피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니고서야 그녀가 내 명령을 어겼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정말 습격을 당했다면 어떤 놈한테 당했단 말인가?

일단 이곳이 아무리 마경이라도 그녀를 압도할 만한 수준의 몬스터들은 네임드 보스들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정도로 강한 놈들과 전투가 있었다고 하면, 아무리 내가 굴 깊은 곳에 있었어도 초감각으로 알아챘을 텐데······.

'이상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바위탑 위쪽을 올려다보다가, 공간 도약을 연속해서 사용해 순식간에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마경의 전경을 한눈에 둘러봤다.

앞쪽은 우리가 지나온 길, 왼쪽으로는 숲이 있었고, 오른쪽과 뒤쪽으로는 평야가 있다.

물론 시각을 최대한으로 강화한 채 샅샅이 살펴봐도 아셸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나더니 거대한 괴조 한 마리가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덤벼드는 놈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핏방울을 쏘아냈다. 기세 좋게 날아들던 놈이 그대로 추락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놈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바위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도 주위에 흔적을 살펴보면 뭐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여기가 서있던 자리.'

아셸이 서있던 자리부터 시작해서 주위의 흔적을 샅샅이 훑어봤다.

딱딱한 돌바닥이라서 발자국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초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아주 작은 흔적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땅바닥에 무언가 희미하게 쓸린 흔적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무언가가 난잡하게 쓸린 흔적.

상상력을 발휘해봤지만 그 이상의 것은 파악할 수 없었다. 흔적이 너무 희미했기에.

그러나 그게 어디로 나아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는 흔적이 이어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숲이 있는 방향이었다.

"······."

다시 한 번 상상력을 발휘해봤다.

바닥에서 찾을 수 있는 흔적은 이 쓸린 자국뿐이고, 그 외의 것은 아예 없다.

일단 이 정체 모를 흔적의 주인이 덩치가 거대한 놈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면 무게 때문에 땅이 조금이라도 파였겠지, 이런 식의 흔적이 남지는 않았을 테니까.

'별로 크지 않고 가벼운 무언가.'

그런 무언가가 아셸을 습격해서 숲으로 끌고 갔다? 아니, 끌고 간 게 맞나?

모르겠다. 하지만 아셸이 사라졌으니 당장은 그런 방향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할루멘타에 서식하는 네임드 보스들을 떠올렸다.

다 덩치가 산만큼 거대한 놈들이라서 아셸을 습격한 무언가가 놈들 중에 있다기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결국 뭔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흔적을 쫓아보는 것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셸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핏자국은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그녀가 멀쩡히 살아있기를 바라며 숲을 향해 이동했다.

숲부터는 바닥이 흙이었기에 이어진 흔적이 훨씬 더 선명했다.

나는 놈이 지네처럼 다리가 많이 달린 몬스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흔적을 살피니 그것도 아니었다.

이건 마치, 뭐라고 해야 되나······ 촉수?

마치 어지럽게 얽힌 촉수가 바닥을 꿈틀거리면서 기어가면 이런 식의 흔적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부스럭.

【Lv. 56】

흔적을 계속해서 쫓는데 수풀을 헤치고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이마에 난 뿔이 악마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사슴이었다.

놈이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앞발로 바닥을 긁어댔다. 돌진을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손가락을 뻗고 핏방울을 쏘아내려는데 그 순간 서있던 바닥이 진동했다.

"······?"

이건 또 뭐야?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푸확!

갑작스레 땅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거대한 손이 사슴의 몸을 우왁스레 붙잡고 짓눌러버렸다.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놈은 썩은 열매처럼 그대로 땅바닥에 찌부러져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서 앞쪽의 땅이 통째로 뒤집어지며 그 아래에 묻혀있던 손의 주인이 그 거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Lv. 82】

전에 루터스 산맥에서 마주쳤던 벨르바고라에 못지않을 정도로 거대한 곰.

나는 두 눈을 깜박이며 놈을 응시했다.

'······불칸티어?'

내가 알고 있는, 헬루멘타에 서식하는 네임드 보스들 중 하나.

참으로 뜬금없이 땅바닥에서 튀어나온 놈은 얼마나 땅속에 묻혀있던 건지 등에 나무가 자라있을 정도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뭔 겨울잠이라도 자고 있었냐?"

불칸티어가 몸을 흔들어 등에 무성히 난 풀과 나무들을 털어냈다.

덩치가 어찌나 큰지 나무를 털어내는 게 마치 티끌을 터는 것처럼 보였다.

크릉!

이윽고 놈이 시뻘건 안광을 빛내며 금방이라도 날 찢어죽일 듯 온몸으로 흉흉함을 뿜어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놈을 다시 영원히 재워주기 위해서 손가락을 뻗었다.

그 순간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로 물러나요!"

이어서 날아든 거대한 불꽃이 불칸티어의 몸을 강타했다.

고개를 돌리니 웬 두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

【Lv. 73】

불덩이에 맞은 놈의 정신이 잠시 팔린 틈에 내게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날 떠밀었다.

"방해되니 물러나라."

그리곤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불칸티어에게 몸을 날린 그가 가까이 붙어서 검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놈의 질긴 가죽을 찢어내지 못하고 전부 생채기에서 그쳤다.

곧 다시 정신을 차린 놈이 성난 포효를 터뜨리며 거대한 앞발을 우악스레 휘둘렀다.

공격을 피하고 뒤로 간신히 물러난 남자가 굳은 얼굴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이어서 내게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마법을 준비하며 다시 내게 소리쳤다.

【Lv. 59】

"이런 곳에서 혼자 뭘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상대할 테니 빨리 도망쳐요!"

"아니······."

말을 하려 했지만 그녀 역시도 내 말을 무시하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뭐야, 이것들은?

***

콰아앙!

고전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껏 마주쳤던 몬스터들이 전부 새끼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곰.

예전에 동료들과 마경을 한창 돌아다닐 때도 이런 터무니없는 괴물을 마주쳤던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손쉽게 몬스터들을 처지했던 남자도 겨우겨우 공격만 피하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치켜세우고 마력을 끌어올려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순간 곰이 기습적으로 방향을 틀어 그녀를 노렸다.

"······!"

간발의 차로 몸을 날린 남자가 그녀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미 곰은 지척이었다. 덩치에 맞지 않는 가공할 속도였다.

'······아.'

이렇게 허무하게?

차마 방어 마법을 펼칠 틈도 없었다. 아니, 펼친다고 해도 산산히 부서질 것이었다.

온몸을 내리찍어오는 거대한 앞발을 보며 두 사람이 죽음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앞쪽에 무언가가 나타남과 동시에 충격파에 주위의 지면이 터져나갔다.

"······?"

두 사람이 얼떨떨한 얼구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바로 앞에 방금 전 마주친 남자가 서있었다.

그리고 곰의 앞발은 허공에서 우뚝 멈춰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막힌 것처럼.

곰이 당황한 기색으로 끙끙거리다가 뒤로 물러났다.

'이게 무슨······?'

남자의 모습이 다시금 눈앞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굉음이 울리며 곰의 거체가 무너진 건 그와 동시였다.

쿠우웅!

두 사람은 어느새 쓰러진 곰의 등 위에 서있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둘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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