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52화 (52/189)

할루멘타 (2)

대륙에 존재하는 마경들은 환경적인 특징 또한 제각각이었다.

대지에서 용암 기둥이 뿜어져나오는 곳도 있고, 마른 하늘에 벼락이 몰아치는 곳도 있으며, 극한의 추위에 쏟아지는 물마저 즉시 얼려버리는 곳도 있었다.

그런 다른 마경들에 비하면 할루멘타는 환경이나 지형이 그나마 평범한 축에 속했다.

본격적으로 초입에 들어서고도 나와 아셸이 아직까지 멀쩡히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태양은 이제 아예 안 보이네.'

거의 흑색에 가까운 먹구름들로 가득찬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것들 때문에 대낮에도 거의 밤과 다름없이 어두웠다.

세상에 종말이라고 하면 바로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를 법한, 그런 분위기의 풍경이었다.

키에엑!

그리고 쉬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은 덤이었다.

절벽에서부터 곡선으로 낙하해 돌진해오던 괴조 한 마리가 아셸의 검기에 반으로 토막났다.

아직 그렇게까지 강한 놈은 튀어나오지 않았기에 마주칠 때마다 아셸이 알아서 처리하고는 있었으나······.

'진짜 더럽게 많기는 많네.'

평소 숲이나 산맥을 지날 때 마주쳤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마주치는 횟수가 잦았다. 애초에 그래서 마경이라 불리는 거긴 하지만.

처리야 별 문제가 아니지만 밤에 잘 때도 들이닥쳐서 귀찮게 굴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피곤했다.

나는 다시 지도를 살피며 신비가 숨겨진 장소에 대해 생각했다.

'마경 중앙부에 위치한 탑 형태의 거대한 바위.'

그리고 그 어딘가에 있는 동굴.

게임에서 '놈의' 회상을 통해 나왔던 장소였다.

그래도 이번 신비는 마경 중앙 지역까지 이동해서 그 바위를 찾기만 하면 됐기에, 그나마 장소를 정확히 특정할 수 있었다.

며칠 이동하니 우리는 한 수림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다만 초록색으로 창창한 게 아닌, 잎사귀에까지 검은 빛깔만 감도는 썩은 고목 같은 나무들이었다. 마경답게.

으스스한 분위기의 숲길을 걸으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나무들에는 마찬가지로 어두운 색의 열매들이 종종 열려있는 게 보였는데, 나는 그것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할루멘타가 사뭇 평범하기는 해도 다른 마경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점은 있었다. 바로 식물이었다.

겉보기에 영 맥아리는 없어도 이렇게나마 자라나는 식물들이 있었다.

어떤 건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어떤 건 굉장한 약효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저건······.'

그중에 나는 하나의 열매를 발견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검은색 껍질에 붉은 빛깔로 쩍쩍 갈라진 결이 보이는, 메론만 한 크기의 동그란 열매.

포도처럼 알알이 주렁주렁 달려서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기다랬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닥에 떨어진 열매 한 알을 파먹고 있던 커다란 벌레들이 날아서 흩어졌다.

나는 상태가 멀쩡한 열매를 손으로 하나 따냈다.

게임에서도 업적 때문에 할루멘타에서 약초나 과일 채집을 질리도록 해본 적이 있었기에, 이게 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몽스테슈 열매.'

이건 딱히 몸에 좋은 약효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긴 것과 달리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천상의 맛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의 열매였다.

게임에서도 발견하기 꽤 힘들었던 건데 운 좋게 마주쳤네.

맛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나는 그것을 한입 작게 베어물었다. 과육은 아삭한 식감에, 오렌지처럼 주황색이었다.

'와······.'

먹자마자 입안에 확 퍼지는 강렬한 달콤함에 속으로 감탄했다.

왜 게임에서 왜 천상의 맛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한입 먹자마자 바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나는 그 달콤함을 음미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아셸이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날 보고 있었다.

뭔 식은 용암 덩어리마냥 괴상하게 생겨먹은 갑자기 열매를 따서 먹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너도 먹어봐라."

하나 더 따서 내밀자 아셸이 작게 침음을 흘리곤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강요는 안 하지만 안 먹으면 후회할 텐데."

이 맛있는 걸 혼자서만 맛보긴 아깝잖아.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녀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머뭇머뭇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입 자그맣게 베어물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먹고 있던 열매를 마저 순식간에 해치웠다. 크기가 워낙 커서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계속 가지."

다시 앞장서서 이동하려는데 뒤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아셸이 열매를 하나 더 따서 입에 넣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서리라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표정으로 우물우물 씹고 있던 열매를 꿀꺽 삼켰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더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뭘 사과를.

***

마경에 들어선 지도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시야에 펼쳐진 풍경은 끝없이 펼쳐진 검은 대지와 수풀들의 반복이었고, 뭔가 특별한 건 없었다.

다만 달라진 건, 점점 마경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강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Lv. 64】

【Lv. 68】

【Lv. 71】

.

.

.

이번에 마주친 놈들은 떼로 몰려다니던 것들이었다.

원숭이 괴물도 있었고, 사자와 코뿔소를 섞은 것처럼 생겨먹은 놈도 있었고, 그리고 무수한 눈이 징그럽게 박혀있는 거대 거미들도 있었다.

'뭐지, 이것들은?'

그 이질적인 광경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종끼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몬스터 무리였으니까.

그워어!

일단 처리가 우선이었기에 생각은 나중으로 하고 아셸에게 말했다.

"저 원숭이를 맡아라."

"예."

따로 떨어져있던 레벨이 가장 높은 원숭이 괴물을 향해서 아셸이 곧장 돌진했다.

나머지 몰려있던 놈들은 이쪽을 향해서 사나운 기세로 돌진해왔다.

나는 손을 뻗고 핏방울들을 터뜨려 쏘아냈다.

개체 하나하나가 작은 도시 하나쯤은 혼자서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의 몬스터들이었지만, 즉살 능력에 레벨은 아무 의미가 없다. 놈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했다.

촤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셸도 원숭이 놈을 어렵지 않게 처치했다.

내 쪽을 돌아본 그녀가 모조리 죽어있는 다른 몬스터들을 보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거두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 이질적인 조합의 몬스터 무리들을 종종 마주쳤다.

그것들을 계속 처치하고 나아가며 나는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아, 설마 그건가?'

마경에는 온갖 까다롭고 괴상한 능력을 가진 몬스터들이 많았다.

피어부터 시작해서 강력한 마력포를 쏘아낸다거나, 불이나 전기를 뿜어낸다거나, 아니면 환각을 유발시키는 놈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대부분 네임드 보스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주 희귀하게 다른 몬스터들을 지배하고 부리는 능력을 지닌 몬스터 또한 존재했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흉포한 마경의 몬스터들끼리 이리 사이좋게 붙어디나는 걸 보니······ 어쩌면 그 지배의 능력을 가진 놈이 지금 이 마경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하기로 할루멘타에 지배 계열의 능력을 가진 보스는 없었는데······.'

뭐, 지금은 플레이했던 배경에서 과거 시점이니 내가 모르는 보스몹들이 있을수도 있는 거니까.

나는 그닥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지배 능력을 가진 놈이 있다고 해도 큰 위협이 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시체로 만들고 나아가며 또 며칠이 흘렀다.

대기 중에 희미하게 퍼진 검붉은 안개를 보니 슬슬 진짜 마경의 중심부까지 들어오지 않았나 싶었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선 확실히 대비했다.

전에 엘로드 숲에서 사용했던 상호 위치 표시 나침반의 하나는 마경 입구에 묻어두었고, 또 챙겨온 길잡이용 가루도 지나온 길에 틈틈히 뿌려두었으니까.

나는 초감각으로 시야를 최대까지 확장하여 바위를 찾기 위해 애썼다.

탑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라 멀리서도 발견하기 쉬울 텐데······.

그리고 그 생각대로, 일대를 한나절 정도 돌아다닌 끝에 끝내 바위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저거다.'

안개 너머, 한눈에 봐도 탑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바위를 향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근처에 몬스터는 없었다.

바로 앞까지 도착한 나는 바위 주위를 돌며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았다.

그리고 곧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바위의 한가운데에 대놓고 뚫려있는 넓은 통로 하나를.

이곳이 바로 내가 찾는 마지막 신비가 숨겨져있는 장소.

"들어갔다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아셸에게 그렇게 말하고 어두운 동굴 안으로 홀로 걸음을 옮겼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아무것도 없이 고요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안쪽으로 이동했다.

일자로 이어져있는 통로는 생각보다 훨씬 길어서, 벌써 몇십 분은 걸었는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 끝나는 거야?'

슬슬 걷는 게 지겨워져서 그냥 뛰었다. 어차피 잘 지치지도 않는데 왜 걷고 있었지.

그렇게 몇 분은 더 뛰었을까.

드디어 일자 통로가 끝나고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나는 공동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이제 안으로 나아가는 통로는 더 없는 듯했다.

그럼 여기가 끝이라는 건데······ 공동에는 아무것도 없이 어둡기만 했다. 밝게 빛나는 신비의 문양 따위는 없었다.

잘못 찾아왔나 싶었지만 이곳이 분명히 맞았다.

탑처럼 생긴 바위에 난 굴이 여기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는 건, 즉······.

"······."

나는 굳은 얼굴로 공동의 중앙으로 다가갔다.

그곳의 바닥에 말라붙은 희미한 핏자국이 보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듯한, 나보다 먼저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다녀갔다는 흔적.

이곳에 신비의 문양이 왜 없는지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흔적이었다.

"······이미 챙겨갔나."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놈'은 이곳을 이미 오래 전에 발견해서, 결국 그 신비를 흡수한 모양이었다.

마지막 신비를 선점하는 것은 실패였다.

***

아셸은 7군주의 명령대로 동굴 앞에서 주위를 경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선 채 동굴 안쪽을 빤히 바라봤다.

매번 7군주는 어떻게 이런 장소들을 알고 찾아오는 걸까? 그리고 안에 들어가서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고?

'······쓸데없는 생각을.'

그녀는 호기심을 털어내고 다시 경계에 집중했다.

명색이 호위인데 지금까지 만난 강적들과의 전투에선 항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적어도 그분이 하시는 일에 방해는 되지 않도록, 몬스터가 동굴로 들어가는 걸 막는 일만큼은 제대로 해내야 할 터였다.

"······?"

그렇게 한참을 석상처럼 서있던 아셸은 문득 이질감을 인지했다.

주위에 껴있던 안개가 왠지 좀 더 짙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본능적인 불쾌감.

미간을 좁힌 채 검을 뽑아들려던 그녀의 손이 굳었다.

그리곤 서서히 눈이 감기더니, 몸을 위태롭게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스스스.

그녀가 쓰러진 자리에 이내 징그럽게 얽힌 식물의 줄기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녀의 몸을 휘감은 줄기가 땅바닥을 기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

"······?"

생각에 잠긴 채 동굴 밖으로 나온 나는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째서인지 아셸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급하게 볼일이라도 보러 갔나 싶어 팔짱을 끼고 서서 기다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

나는 굳은 얼굴로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뭐지?

얜 또 갑자기 어디로 증발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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