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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51화 (51/189)

할루멘타 (1)

한 신형이 산맥의 봉우리들을 훌쩍훌쩍 넘으며 뛰어가고 있다.

그것이 한 번 도약할 때마다 땅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파공음이 울렸다. 누군가 본다면 두 눈을 의심했을 광경이었다.

5군주 광랑은 어느새 가이탄 호수를 벗어나 남동쪽으로 이어진 산맥을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한 봉우리의 앞에 멈춰선 그녀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흐."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던 광랑이 난데없이 웃음을 흘렸다.

아까 전에 느꼈던 전율이 아직도 채 완전히 가시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너도 함께 죽여야겠군.'

미약하기 그지없지만, 한순간 등골에 소름이 일었을 정도로 섬뜩하기 그지없던 살기.

그 말을 꺼낸 순간의 7군주는 정말로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바로 다 죽어가던 잡놈 하나가 끼어들어서 흐지부지 넘어가게 됐지만.

"다 집어치우고 한 판 붙었어야 됐나."

그녀는 크나큰 아쉬움을 느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투만이 그녀가 삶에서 느끼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강렬한 희열이었다.

철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제대로 전투를 벌였다면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까?

대군주를 제외하면 다른 군주들은 모두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녀였지만, 어째서인지 7군주 그 인간에게는 그런 확신이 들지가 않았다.

7군주는 결코 자신의 밑이 아니다. 잠깐의 마찰만으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직감했다.

"하, 씨. 흥분이 안 가라앉네."

콰아아앙!

손을 쥐었다 펴던 광랑이 주먹을 내질렀다. 앞쪽에 있던 거대한 봉우리가 통째로 무너져내렸다.

그녀는 땅을 박차고 다시 허공으로 높이 날아올라 이동을 계속했다.

마수 사냥은 슬슬 또 질려가고, 간만에 동쪽의 경계로 가서 마족들이나 사냥해야겠다.

***

공간 도약의 신비를 찾았고, 해린족은 고향으로 떠나갔다.

가이탄 호에서의 할 일은 모두 마쳤다.

호수에서 머무는 동안 무호흡 마법을 인챈트해준 헤이블에게 약속했던 의뢰금을 지불하고 헤어진 뒤, 곧장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 말입니까?"

아셸의 표정이 굳었다.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더니 보인 반응이었다.

워낙에 거대한 충돌이었는지라 그녀도 멀리서 기척을 느꼈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 때문에 어째야 되나 고민하다가 결국 마차에 계속 있었다고 했다. 어차피 와봐야 별 도움은 안 됐을 테니 잘한 일이었다.

"족장은 전투 중에 죽었고, 나머지 해린족들은 모두 무사히 고향으로 떠나갔다."

"······그렇군요."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셸은 안타까움과 분노가 섞인 듯한 기색이었다.

아마 자신의 과거가 겹쳐보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 역시 세인테아의 군세에, 오성 중 일인인 창성에게 일족이 절멸당했으니까.

"······."

나는 아셸을 가라앉은 눈으로 빤히 바라봤다.

······솔직히 그녀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면, 게임을 플레이한 나는 살아남은 백월족이 그녀 외에 아무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사실을 말한다고 그녀가 순순히 믿을리도 없고,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 증명할 방법도 없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난 진실을 알면서도 그녀가 필요하기에 그걸 미끼 삼아서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살아가는 목적은 일족의 생존자를 찾는 것. 그리고 세인테아에 복수를 하는 것.

일족의 생존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 그녀에게 남은 삶의 의미는 복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임에서는 그 사실을 알기 전에 이미 소중한 동료들이 생겼기에, 더 이상 복수에 연연하지 않게 됐었으나······ 여기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족장의 시체 앞에서 처절하게 소리치던 안느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진실을 안 뒤에도 아셸이 엇나가지 않도록 붙잡아주고 싶었지만, 이건 게임 지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 감정의 문제였다.

지금까지의 여정으로 벽을 꽤 허물었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그녀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친밀감이 그렇게까지 깊진 않겠지.

"세인테아에 반드시 복수를 할 생각인가?"

내 물음에 아셸이 움찔 놀라며 날 쳐다봤다.

이내 그녀가 복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일족을 찾는 일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라면 최대한 시기를 끌 생각이었으나, 마음을 조금 고처먹기로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기회가 되면 최대한 빨리 아셸을 '그녀'에게로 데려가야겠다고.

'어쨌든 이제 한 곳 남았나.'

신비를 찾는 것도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로 끝이었다.

그러나 이번 신비를 찾는 게 지금까지의 여정 중 가장 험난한 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왜냐면 숨겨져있는 장소가 다름이 아닌 마경이었으니까. 애초에 그래서 가장 마지막으로 정한 거였고.

만약에 혈술이나 부동 장막 중 하나라도 얻지 못했다면 이번 신비를 찾는 건 아예 다음으로 미뤘을지도 모르겠다.

'마경 할루멘타.'

마경이란 이름 그대로 평범한 생물은 도저히 살 수 없는 지역을 말한다.

온갖 괴이한 지형과 환경, 기상현상, 그리고 상식을 벗어난 괴물들이 존재하는 죽음의 땅.

이 대륙에는 총 다섯 곳의 마경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찾아갈 곳은 그중에 칼데릭과 아주 인접해있는,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한참 이동하면 나오는 할루멘타라는 곳이었다.

'몬스터야 넘치도록 많지만, 환경적으로 조심할 건 딱히 없는 지역이니까······.'

어차피 혈술과 부동 장막이 있는 이상 얼마나 강력한 몬스터와 마주하든 크게 위험할 건 없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공간 도약까지 얻었으니 굳이 아셸이 없더라도 장애물이 많은 지형도 걱정할 건 없었고. 그래도 데려가긴 할 거지만.

아무리 마경이라도 네임드 보스가 아닌 이상 웬만한 몬스터들은 아셸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마경에 가본 적이 있나?"

아셸이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러면 이번에 처음으로 경험해볼 수 있겠군."

"······예?"

"다음 목적지는 마경 할루멘타다."

내 말에 아셸이 두 눈을 깜박거렸다.

***

마차는 한참을 이동해서 1군주령의 서쪽 변경에 위치한 도시에 다다랐다.

그곳에서부터는 바로스는 그냥 도시에서 머무르고 있게 하기로 했다.

그도 낮은 레벨은 아니지만 마경에서 함께 다니기에는 솔직히 짐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간에 혼자 내버려두고 마차 지키며 마냥 기다리라 하고 있기도 좀 그랬고.

마경은 더럽게 넓었기에 이번 신비는 찾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바로스의 성격상 가능한 곳까지라도 따라가서 모시겠다고 고집을 부리긴 했지만, 권위로 간단히 꺾어버렸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바로스가 도시 성문 입구에서 우리를 배웅했다.

나는 아셸과 함께 말을 타고 도시를 떠났다.

말을 타는 건 도시에서 며칠 머물고 있을 때 연습했다.

평생에 처음 타본 말이었지만 초감각 덕분인지 금세 쉽게 익힐 수 있었다.

감각이 발달하니 기본적으로 운동 신경도 그만큼 더 향상된 듯했다.

며칠 이동했을 때는 어느새 고삐도 잡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나는 말을 타는 채로 지도를 펼쳐서 길을 살폈다.

비싼 값에 구한 칼데릭 북서부와, 그리고 마경의 지형까지 대략적으로 표시된 지도였다.

마경은 안내해줄 길잡이도 구할 수 없었기에 이번 신비 찾기는 철저히 자력으로 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음······.'

솔직히 지도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마경들은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밥 먹듯 드나들긴 했던 지역이긴 하다.

하지만 이미 지금까지의 여정으로 충분히 체감했다시피, 게임과 이 실제 세계는 규격 자체가 달랐기에 게임에서의 지리적 지식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냥 애초에 편하게 갈 기대는 집어치우고 제대로 굴러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말을 타고 달리며 긴 시간이 흘렀다.

슬슬 마경이 가까워지자 주변 환경과 지형에 변화가 생겼다.

하늘에 낀 검은 구름들이 낮에도 햇빛을 가렸고, 수풀들 또한 점점 사라지며 초록빛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대신 삭막하게 펼쳐진 대지와 검붉은 빛이 감도는 바위들이 종종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말들도 대기 중에 떠도는 불길한 기운을 느낀 건지 이동할수록 투레질을 하며 멈춰서는 일이 잦아졌다.

"잠시 쉬었다 가지."

"예."

우리는 자리를 잡고 점심 식사를 했다.

참 밥 먹을 맛이 안 나는 풍경이었지만 배는 채워야지.

식사 준비는 항상 바로스의 몫이었지만 없으니 지금은 아셸이 대신하고 있었다.

의외였던 건 바로스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요리 솜씨가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산맥에서 살았었고, 대군주성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한참 동안 떠돌이 신세였으니 생각하면 당연한 거긴 했지만.

쿠구구.

한창 식사 중에 평야 저편에서 한 몬스터 무리가 몰려왔다.

거대한 타조처럼 생겨먹은 이족보행 조류형 몬스터였다. 평원 지대에 서식하는 매드 버드다.

아셸이 말없이 일어나서 처리하려는데, 다시 보니까 놈들의 뒤쪽에 거대한 무언가가 하나 더 보였다.

【Lv. 61】

목이 2개가 달린 거대한 도마뱀.

나는 초감각을 끌어올려 놈을 확대해서 살폈다.

'······트윈 헤드 리자드네?'

마경에서 기괴한 몬스터를 뽑으라고 하면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머리가 여럿 달린 몬스터들이다.

트윈 헤드 리자드도 그중 하나였다.

이제 보니 우리를 공격하려고 달려오는 게 아니라 놈에게 쫓기고 있었던 듯했다.

마경이 가까워지니 이제 슬슬 경계를 넘어서 밖까지 나온 놈들이 출몰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셸의 손속에 자비는 없었다.

아셸이 쏘아낸 거대한 검기가 몰려오는 놈들을 향해 쇄도했다.

검기는 매드 버드들을 모조리 토막내고 가장 뒤에 있는 놈까지 베어버렸다. 그러나······.

키에엑!

놈은 놀랍게도 아셸의 공격을 버텨냈다.

바닥에 피를 철철 쏟아내면서도 두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 괴성과 함께 돌진해왔다.

아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시 한 번 검기를 날렸다. 방금 전보다 훨씬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기였다.

한 번 더 검기에 적중당한 놈은 끝내 몸이 세로로 반토막이 나서 널브러졌다.

아셸이 어딘가 조금 꺼림칙한 기색으로 검을 거두었다.

나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마경의 몬스터들이 원래 저렇지.'

강함도 강함이지만, 보통 몬스터와는 그 공격성과 흉포함부터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방금도 보통 몬스터라면 첫 공격을 적중당한 순간부터 냅다 튀었어도 안 이상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물론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영악하기 그지없는 몬스터들도 천지였고. 한마디로 이래저래 성가신 놈들이 많았다.

게임에서도 웬만한 레벨의 고인물이 아니고서야 마경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었다.

"아."

다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려던 아셸이 자신의 수프 그릇이 엎질러진 걸 보고 짧게 탄식했다.

방금 전에 기운을 강하게 일으켰다가 그 여파에 엎어진 것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자신의 그릇에 수프를 떴다.

"많이 먹어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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