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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50화 (50/189)

해린족의 보물 (2)

고요한 정적 속에 마법사장이 광랑과 나를 번갈아 봤다.

그 모습에서 좀 전까지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어째서 5군주가 이곳에 있는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기는 놈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얼굴에 비친 의문과 긴장, 그리고 낭패감이 여실히 보였다.

'진짜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나는 속으로 한숨을 돌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몰라도 당장의 위기는 넘긴 듯했으니까.

생판 남과 다름없더라도 일단 광랑은 같은 진영의 아군이다. 이제 궁지에 몰린 건 내가 아닌 마법사장이었다.

"싸울 생각이오, 5군주?"

놈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고나 위협이 아닌 체념에 가깝게 느껴지는 어투였다.

아무리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쯤 되는 강자라고 한들, 칼데릭의 군주는 그보다 한층 더 격이 높은 존재. 단순한 레벨 차이만 해도 무려 4레벨의 차이다.

광랑이 마법사장을 죽일 생각이라면 놈이 이곳에서 살아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반대다, 멍청한 놈아. 기껏 말려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게 무슨?"

"지금 너랑 마주보고 있는 인간이 누구인지나 아냐?"

광랑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1군주령에서 뭘 하고 있던 건지 모르겠네, 7군주. 낚시라도 하려고 여기에 왔나?"

그 말에 마법사장이 경악한 눈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광랑과 눈을 마주쳤다.

"······새로운 7군주? 권성을 죽인?"

놈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었나?

하긴, 오성의 일인이 사망한 건 세인테아에서는 엄청난 대사건이었을 터.

애초에 난 호송선의 죄수 신분이었고, 호송선이 습격받은 때와 시기도 공교롭게 칼데릭에선 새로운 군주가 탄생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세인테아 측에서도 권성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는 돌아가는 상황과 조사로 대충 파악했을 터였다.

물론 들켰다고 해도 의미는 없었다.

세인테아와 칼데릭이 마족이라는 거대한 적에 대항해 아직 임시적인 동맹 사이를 맺고 있더라도, 그건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 뒷면에선 현재도 무력적인 충돌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정말 대놓고 죽인 게 아닌 이상에야 물증과 심증이 있어도 정치적인 문제로 끌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애초에 지금 놈이 신경 써야 할 건 그딴 게 아니라 스스로의 안위고.

'······그나저나 말린 거라고?'

나는 광랑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말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마법사장과 싸울 생각이 없는 듯한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칼데릭의 영역에서 세인테아 측의 큰 전력을 마주쳤다.

특히나 전투를 즐기는 그녀라면 더욱이 순순히 보내줄 이유가 없지 않나?

"저놈은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이다, 7군주. 죽일 건가?"

광랑이 내게 물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되나 고민했다.

그녀는 전투에 개입할 마음이 없는 듯했기에 긍정하기가 애매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답하기도 애매하고.

이런 때는 그냥 무게나 잡으며 침묵하는 게 답이다. 그러면 그냥 상대가 알아서 해석할 테니까.

광랑은 그런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듯했다.

그녀가 머리칼을 긁적이다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 7군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한 번만 넘어가면 안 되나?"

이어진 말에 나는 그녀가 어째서 마법사장과 싸우지 않으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저 마법사 놈한테 예전에 진 빛이 하나 있거든. 그래서 죽이겠다면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네."

······빚이라고?

어쩐지 서로 안면이 있는 듯하더니, 광랑과 마법사장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었나?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정보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보내주지 않겠다면?"

그에 광랑이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말했잖냐?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고."

"······."

나는 다시 슬쩍 뒤를 돌아봤다.

창백한 안색으로 바닥에 누워있는 족장과, 그를 붙잡고 울고 있는 안느의 모습이 보였다.

초감각으로 느껴지는 그의 맥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했다.

"정신 좀 차려보라고, 제발······!"

솔직히 잘 풀린 상황이었다.

그냥 그녀의 말대로 가만히 놈이 도망가게 두면 된다.

그러면 내가 감당할 위험도 없고, 해린족도 무사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거슬리지.'

족장은 안타깝게 됐지만 별 수 없는 것 아닌가.

여기서 내가 굳이 더 마법사장을 물고 늘어지는 건 아무 의미도 없고, 상황만 악화시키는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제왕의 혼 때문인지 이 몸에 빙의한 뒤 가끔씩 이성과 입이 따로 놀 때가 있었다.

지금 또 그 입이 사고를 쳤다.

"너도 함께 죽겠다는 건가, 5군주?"

"······."

그 말에 광랑의 동공이 맹수의 그것처럼 세로로 쭉 갈라졌다.

이내 그녀가 입꼬리를 비틀더니, 천천히 등에 멘 대검의 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지 않아도 되오."

그때 족장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선 분위기를 뭉그러뜨렸다.

숨소리까지 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부족원들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족장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하, 할아버지······."

나는 빤히 광랑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족장이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론, 미안하지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소?"

끝을 예감했는지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려는 듯했다.

"저 인간 마법사가 부족을 해하지 못하도록······ 모두가 호수로 들어갈 때까지만 지켜주셨으면 좋겠소. 그것뿐이오."

어차피 마법사장은 이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기에 알아서 지켜질 약속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걱정 마시오."

"······고맙소이다. 그리고 안느."

훌쩍이고 있던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이곳이 내 무덤이 되었구나."

"······."

"혹여나 복수를 생각하진 말거라.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생이었다. 끝내 고향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 또한 괜찮다. 모두들 분노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

"으, 으흑······."

"내가 죽으면 육신은 땅에 묻고, 결정은 호수에 풀어주거라. 강물을 타고 저 바다까지 흘러갈 수 있도록······."

풀린 눈으로 띄엄띄엄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유언을 경청하던 부족원들이 그의 죽음을 묵념하듯 하나둘씩 눈을 감았다. 안느는 허망한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쩌적.

얼마 지나지 않아 족장의 가슴팍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푸른빛을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느가 손을 뻗어 천천히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장이 두 눈을 부릅 떴다.

"마결정······."

평생을 쌓아온 마력이 뭉쳐져 만들어진 결정. 순수한 마력의 정수.

마법사들에게 있어선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천고의 보물.

고개를 홱 돌린 안느가 그를 죽일 듯 노려봤다.

"고작 이딴 돌 하나 때문에!"

찢어지는 목소리로 처절하게 소리쳤다.

"이미 지상의 절반이 너희 인간들 거잖아! 땅도, 자원도, 전부 다 넘치도록 정복하고 차지했잖아!"

"······."

"그런데 대체 언제쯤 만족하는 건데?! 뭘 얼마나 더 가져가야 만족하는 거냐고!"

"그것은 너희들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는 보물이다."

마법사장이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그리고 참으로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해린족. 길고 길었던 전쟁에서 이 대륙을 끝내 지켜낸 건 우리 인간이다. 용사께서 마왕의 목을 베셨고, 사악한 마족들의 침공을 끝내 막아냈다. 지금껏 이 땅의 평화가 멀쩡히 유지되고 있는 게 누구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한데도 그런······."

"마법사장."

나는 껴들어서 말을 끊었다.

"살 기회를 줄 때 닥치고 꺼지도록."

놈이 침음을 흘리며 날 바라봤다.

나는 기분이 더러워서 더 비꼬았다.

"그리고 마족의 침공을 막아낸 건 인간들만의 공이 아니지. 무슨 뻔뻔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결국 마왕을 봉인시킨 건."

"그래, 용사지. 하지만 그게 너희들이 해낸 일인가? 그건 인간의, 제국의 공도 아닌 용사가 홀로 해낸 업적일 뿐이다."

"그 용사가 바로 우리 세인테아의 수호자요."

"무고한 종족들을 이리 사냥하고 학살하는 제국의 수호자 말이지. 네놈도 알고 있지 않나? 용사는 너희 황제와 황실을 경멸한다는 걸."

용사가 황실의 이런 은밀한 악행을 지금까지 가만히 놔두고 있는, 아니, 놔두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륙의 평화만을 생각하는 영웅이기 때문에.

그리고 쥐새끼 같은 황제가 제 자식들을 방패 삼아 아슬아슬하게 선을 잘 타고 있기도 했고.

욱한 기색으로 반발하려는 놈의 말을 막고서 말했다.

"이제 그만 꺼져라. 다시 나와 마주치면 그때는 상황이 어떻든 죽일 것이다."

시큰둥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광랑이 턱짓을 했다.

"가라. 이걸로 그때 빚은 갚은 거니까 또 칼데릭에서 얼쩡거리면 죽인다."

놈이 입술을 짓씹으며 공중에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러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광랑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자기 목을 그으며 물었다.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이었냐?"

"······."

"군주끼리 죽였다간 대군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건 아니지? 뭐, 너도 나처럼 그딴 건 신경도 안 쓰는 놈 같다만······."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내 물음에 그녀가 자신의 검을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뭘 하고 있던 게 아니라, 아고르 영감한테 검 좀 맡겼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1군주 신퇴 말인가?

아무래도 그녀가 이곳에 등장한 건 완전한 우연인 듯했다.

"그래서, 너야말로 이 호수에서 뭘 하고 있던 건데. 저것들은 또 뭐고?"

"알 거 없다."

광랑이 킥 웃으며 몸을 돌렸다.

"더럽게 쌀쌀맞네. 더 볼일은 없으니까 간다. 다음 회의 때 보자고."

다시 수풀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괜히 진이 빠져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론."

멍하니 결정을 들고 있던 안느가 날 쳐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딱히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몇몇 부족원들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나는 족장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짧게 명복을 빌어주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남은 모두가 살아남았으니, 그 죽음이 의미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

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그들의 곁에 머물렀다.

그들은 족장을 그들이 머물던 동굴 뒷편에 묻고서 한참이나 의식 같은 걸 치뤘다. 부족의 장례인 듯했다.

동이 트고 나서야 동굴을 떠난 그들은 호수 앞에 나란히 늘어섰다.

안느가 앞으로 나와서 손에 들고 있던 결정을 호수에 풀어놓았다.

그러자 결정은 밝은 빛을 뿜어내더니 천천히 물에 녹아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해린족의 마결정은 특이하게도 물에 닿으면 녹아 사라진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보고있는 것처럼, 그것은 해린족들이 죽은 자를 기리는 방식이기도 했다.

결정이 모두 물에 녹아내리자 안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할아범이 그러더라고. 이 결정은 우리가 평생을 물에서 흡수한 마력으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그걸 다시 물에 풀어줘서 순환을 이어가는 거라고."

"······."

"고마워, 론. 덕분에 적어도 마지막 장례만큼은 제대로 치뤄줬네."

조금 멍한 눈으로 호수를 쳐다보는 그녀에게 물었다.

"바로 떠날 생각인가?"

"어, 그래야지. 이제 쉬지 않고 바다까지 향할 거야."

가이탄 호에서 발원하여 대륙의 북해까지 이어지는 강.

이들은 그걸 타고 곧장 고향으로 향할 생각인 듯했다.

첨벙!

내게 감사와 작별을 건넨 그들은 하나둘씩 호수를 향해서 뛰어들기 시작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안느에게 말했다.

"언젠가, 할 일을 전부 마치고 나면 너희들의 고향으로 찾아가보겠다."

"······어?"

"다시 만날 때는 웃으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잘 가라."

멍하니 날 쳐다보던 그녀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는, 곧바로 호수로 뛰어들었다.

나는 한참을 가만히 서서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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