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린족의 보물 (1)
······분명히 저녁 한 끼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어 하는 사이 주위에 다른 해린족 부족원들도 하나둘씩 모여들고 모닥불의 갯수가 늘더니, 금세 축제라도 열린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자네가 족장님의 부상을 치료해줬다는 그 인간인가? 정말로 고맙네, 고마워! 하하!"
"아까 전에 거칠게 맞이했던 건 미안했어요. 그리고 족장님을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정말로 좋은 인간이에요."
내 주위를 지나치는 부족원들이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갔다. 대체로 감사 인사였다.
아까까지 침입자 대하듯 경계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뒤바뀐 태도.
족장의 상처를 치료해준 걸 다들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긴 하지만.
"자, 다 됐다. 이거 먹어봐."
안느가 갓 구운 생선 살점을 꼬챙이에 큼직하게 꽂아서 내밀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입으로 후후 불어 식힌 뒤 한입 작게 뜯어먹었다.
타오르는 모닥불에 그녀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비쳤다.
"어때, 끝내주지?"
"그래."
자신했던 대로 맛은 있었다.
과일이며, 훈제 고기며, 안느가 잡아온 물고기뿐 아니라 다른 식량들도 나와서 내가 앉은 자리는 완전히 진수성찬이었다.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오."
족장도 기분 좋게 껄껄 웃으며 물고기를 뼈째로 으적으적 씹었다.
"그나저나 술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잠깐 머무르는 장소일 뿐이라 아쉽게도 담가놓은 것이 없군."
술이라.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빙의한 뒤로 아직까지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럴 처지도 아니었고.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자리마다 적당히 나눠 둘러앉아서 식사를 즐기고 있는 해린족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고기를 굽는 이들, 목소리를 높여 떠드는 이들, 고기가 언제 다 익는 거냐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
그리고 한쪽에선 아예 지금 물고기를 더 잡아올 심산인지 창을 들고 숲 저편으로 걸어가는 남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한눈에 그런 느낌이 드는 풍경이었다.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모여서 식사를 한다오. 참으로 즐겁고 풍요로운 시간이지."
족장도 부족원들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상처를 회복했으니 이곳에서 곧바로 떠날 것이오?"
"그럴 생각이오. 그렇지 않아도 이동이 계속 지체되고 있었으니 되도록 빨리 떠나야겠지."
이번엔 족장이 내게 물었다.
"당신이야말로 원하던 걸 찾았는지 궁금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덕분에 찾았소."
그때 열심히 고기를 먹고 있던 안느가 입에 든 내용물을 튀기며 말했다.
"맞아, 할아범! 아까 물속에서 하마터면 물고기 떼한테 갇혀서 죽을 뻔했거든? 그런데 얘가 피를 뿜어내더니 한 번에 다 죽여버렸다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아니 그러니까, 손에 이렇게 피가 뭉쳐졌는데 그걸 펑 터뜨리니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족장은 그저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 뿐이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던데, 맞소?"
"그렇소."
"그것도 해린족의 능력이오?"
기억하기로 해린족이 특별히 그런 쪽으로 특화된 능력은 없었을 터인데. 그냥 족장의 육감이 특히 뛰어난 건가?
그가 허허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능력이라고 할 것까지야. 그저 죽을 때가 가까이 오니 지금껏 안 보이던 것들이 조금 보이게 된 것뿐이오. 당신의 영혼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그 지고한 격도 그렇고."
아, 제왕의 혼······.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안느가 정색하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뭘 또 죽을 때 타령이야, 할아범. 자꾸 그딴 소리 하지 말라니까? 상처도 다 나았는데 죽기는 왜 죽어?"
족장이 끌끌 웃음을 흘렸다.
"녀석아, 네가 부정한다고 정해진 순리를 거스를 수 있겠느냐? 이미 몇 번을 말한 거 자꾸 말하게 하지 말거라."
"······그러니까!"
그러고 보니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쩌니 그런 말을 했었지.
족장은 아무래도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우리 부족의 고향은 대륙의 북쪽에 있는 폴루브 해역이오."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 오래 전에 그곳을 떠나 강줄기를 타며, 때로는 대지 위를 걸으며 지금껏 대륙의 북쪽에서 서쪽까지 이어진 바다들을 돌아다녔소. 선조들이 그랬듯, 그리고 후손들이 그럴 것이듯 평생을 머물지 않고 떠도는 것이 우리 해린족이 살아가는 방식이오. 그렇게 순환하는 것이지."
마치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듯 읆조리는 어투였다.
나는 가만히 족장의 말을 경청했다.
"어린 시절에 부족의 큰어른들이 말씀하시곤 했었소. 자연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고향이 그리워질 거라고, 모든 해린족들이 그러하다고. 이제 내 차례가 오니 남에겐 설명할 수 없어도 확실히 느낄 수 있소. 기이하게도 고향 바다가 그리워지더군."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였나?
자신이 난 장소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래서 당신에겐 정말로 감사하고 있소. 아니었다면 끝내 고향에 도착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몸을 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족장이 초연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안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그녀는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눈으로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족장.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
그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때 그녀가 그리도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었는지.
부족원들에게 있어서, 특히 손녀인 그녀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족장의 마지막 바람을 이뤄주고 싶을 테니까.
식사가 끝나고 그만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는 족장과 안느, 그리고 다른 해린족들의 배웅을 받았다.
"론, 당신이 나아가는 길에 바라는 행복만이 있길 바라겠소."
나도 족장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무사히 고향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라겠소."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족장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내일 또 와서 아침도 먹고 가도 돼."
안느가 콧등을 긁적이며 그렇게 말했다.
물론 올 생각은 없었기에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나는 동굴을 떠나 마차로 돌아가며 괜히 뒤를 돌아봤다. 고요했다.
어쩌면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왠지 모를 묘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몸을 돌려 숲길을 걸었다.
***
식사 자리 뒷정리를 마치고, 안느는 동굴 앞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곁을 지나 동굴로 들어가는 또래 부족원 하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뭐 하냐, 안느?"
안느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그가 짖궂게 웃으며 말했다.
"너 설마 그 인간 생각하냐?"
"······뭐?"
"아니, 그렇잖아. 아까부터 보니까 아주 시선을 못 떼고 있더만. 와, 설마 진짜 그런 거야? 네가 그런 취향일 줄은 몰랐······ 억."
그녀의 주먹이 묵직하게 남자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그가 비틀비틀 물러서며 울먹거렸다.
"농담인데 때릴 것까진 없잖아······."
"닥치고 들어가서 잠이나 처자."
부족원들이 모두 들어가고, 혼자 남은 안느는 숲 저편을 슬쩍 바라봤다. 그러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얼굴은 좀 내 취향이긴 했는데."
내일 아침에 또 오지는 않겠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만 동굴로 들어가려고 했다.
"······?"
그때 수풀을 헤치고서 인형 하나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에 안느의 얼굴에 화색이 띠었다. 설마 론인가 싶었던 것이다.
"야, 왜 다시 왔······."
조금 들뜬 목소리로 그를 부르려던 안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리고 이내 창백하게 물들었다.
수풀을 헤치고 나온 건 로브를 입은 중년의 인간 남성이었다.
남자가 그녀에게 태연히 말을 건넸다.
"족장은 안에 있나?"
"······."
안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끼며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세인테아의 영역을 지나던 부족을 공격한,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중상을 입힌 괴물 같은 인간.
어째서 그가 이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이······!"
그녀가 동굴 안으로 목소리를 쥐어짜내 소리치려던 순간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미 족장은 동굴 안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하, 할아범."
남자를 발견한 족장이 굳은 얼굴로 침음을 흘리다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쫓아온 것이오?"
남자가 물음을 무시하고 말했다.
"족장, 마결정을 넘겨라. 그러면 적어도 모두 고통 없이 보내줄 테니."
"······."
"이번에는 물이 가깝지 않아. 그때처럼 운 좋게 도망칠 수는 없다."
콰아아앙!
남자가 손을 휘젓자 거대한 마력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족장을 강타했다.
제자리에서 양팔을 들어 공격을 막은 그는 한 걸음 뒤로 비틀 물러섰다.
그 소란에 동굴 안에 있던 부족원들이 몰려나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 저 인간은!"
남자를 발견한 그들이 기겁했다.
족장이 숨을 한 차례 깊게 내쉬고서는 쩌렁쩌렁 소리쳤다.
"모두 도망쳐라! 아직 안에 있는 부족원들을 챙겨서 뒤돌아보지 말고 호수로 뛰어라!"
남자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좀 전의 일격은 그저 인사에 불과했다는 듯, 그의 주위로 더욱 거대한 마력이 유동했다.
전력을 다해 마력을 끌어올린 족장도 주먹을 휘둘렀다.
섬전처럼 쏘아진 권기가 남자를 노렸지만 어느새 펼쳐진 방어막에 막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동시에 족장이 몸을 날렸다. 그는 쉴 틈 없이 주먹을 휘두르며 남자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두 거대한 기운의 충돌에 주변의 땅이 뒤집어지고 수풀들이 뜯겨나갔다.
머뭇거리던 부족원들도 어쩔 수 없이 그의 명령에 따라 호수를 향해 달렸다.
"······안 돼! 안 된다고! 할아버지!"
처절하게 외치는 안느를 다른 부족원들이 억지로 붙잡아 끌었다.
족장은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씨를 모조리 불태우듯 남자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고작이었다.
"읍······!"
거칠게 몸을 움직이던 족장이 한순간 멈칫하더니,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아직 내상이 남은 상태에서 격하게 움직인 반작용이 금세 찾아온 것이었다.
"발악은 끝인가?"
여전히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방어막을 펼치고 서있던 남자가 감흥 없다는 듯 말했다.
"······야, 안느! 안돼!"
안느가 부족원들을 쳐내고 족장을 향해서 달려갔다.
"이 녀석아, 어서 도망을 가래도······."
"시끄러워! 이게 대체 뭐냐고! 왜 자꾸 할아버지 혼자서만!"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정신을 못 차리는 족장을 부축하기 위해 애썼다.
그 발버둥을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던 남자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허공에 피어오른 거대한 불꽃이 두 사람을 파도처럼 휩쓸었다.
화아아악!
도망가던 다른 부족원들이 그 광경을 허망하게 지켜봤다.
남자는 몸을 돌렸다. 일단 다른 해린족들도 모두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
그러나 곧 미간을 좁히며 도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불꽃과 연기가 가시고 난 자리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불꽃은 무엇에 막힌 것인지 그와 다른 두 해린족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주저앉아있던 안느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론······."
흑발에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젊은 인간 남성.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사실에 남자는 섬짓함을 느끼며 물었다.
"웬 놈이냐?"
***
······아슬아슬했다.
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로 이동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거대한 마력이 느껴지길래 서둘러 돌아와봤더니, 이게 대체 뭔 꼴이란 말인가.
한참 멀리 떨어져있던 걸 공간 도약을 연속으로 사용해서 일단 겨우 공격을 막아주기는 했지만······.
【Lv. 91】
상황은 완전히 최악이었다.
나는 놈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저 미친 레벨, 그리고 족장이 내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면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 라키울.'
이곳까지 해린족들을 추적해온 건가?
침묵한 채 나를 응시하고 있던 놈이 입을 열였다.
"웬 놈이냐?"
나는 대답하는 대신 뒤쪽에 쓰러져있는 안느와 족장을 슬쩍 쳐다봤다.
아······ 진짜 미치겠네.
일단 죽게 놔둘 순 없어서 반사적으로 나서긴 했는데, 이제 놈과 내가 대치한 꼴이 되었다.
나는 놈의 주위에 펼쳐진 방어막을 바라보며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씨발.'
저렇게 방어막을 펼치고 있으면 어떻게 즉살에 기대어볼 건덕지도 없다. 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대로 전투가 벌어지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방어와 도망뿐이었다.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다면······."
놈이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일단 계속 방어를? 아니면 도망? 그러면 남은 해린족들은? 내가 군주라고 밝혀야 하나? 그러면 놈이 믿을까?
숲 한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와······ 이건 대체 뭔 상황이야?"
수풀을 헤치고 걸어나온 것은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경악했고, 마법사장의 안색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광랑?"
5군주 광랑.
그렇지 않아도 혼란한 상황에 그녀의 뜬금없는 등장은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광랑이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마법사장을 보며 킥킥 웃으며 말했다.
"아서라, 마법쟁이야. 너 그러다 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