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48화 (48/189)

공간 도약 (5)

'개쩌네.'

처음으로 제대로 펼쳐본 혈술에 대한 짧은 감상이었다.

딱 상상한 대로의 그림이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또 달랐다.

혈술과 즉살의 시너지.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대다수의, 특히나 뭉쳐있는 적들을 상대할 때는 그야말로 무적에 가까운 광역기나 다름없었다.

- ······뭐야?

그녀가 떼죽음을 당해 아래로 가라앉은 랜스 피쉬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 네, 네가 한 거야? 뭘 어떻게······ 피에 무슨 맹독이라도 들어있어?

그렇게 말하던 그녀가 물과 섞여 주위에 떠다니는 핏물에 기겁하며 파닥거렸다.

- 으, 흐악!

꼴갑을 떨고 있네.

곧 자신에게는 이상이 없다는 걸 인지한 그녀가 얼떨떨하게 다시 물었다.

- 이거 나는 괜찮은 거 맞지? 응? 나도 죽는 건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 아니라고.

그제야 그녀는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 근데 대체 뭔 마법을 부린 거냐? 너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은 안 했잖아, 씨······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걸 내가 왜 굳이 너한테 말해.

나는 계속 이동이나 하라는 의미로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장서서 헤엄쳤다.

귓가에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스치듯 들려왔다.

- ······그럼 그때 진짜 위험하지도 않았던 거 나 혼자서 생쇼 떤 거였어? 아으씨, 쪽팔리게······.

어느새 또 나타난 괴어 몇 마리가 쏟아지는 랜스 피쉬 사체들을 꿀꺽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저놈들은 오늘 제대로 포식했네.

그것들을 지나쳐 그녀를 따라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얼마나 내려왔지?'

슬슬 빛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왔다.

나 혼자서 탐사할 때는 이 정도까지 땅에서 멀리 나온 적도, 깊이 잠수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초감각 때문에 시야는 아직 별 문제가 없었지만 몸에 느껴지는 압력이 문제였다.

어디 한두 군데 문제가 생기더라도 초재생이 알아서 회복시킬 거라고 믿지만······.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야.'

앞장서서 이동하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멈출 기미가 없었다.

슬슬 한계라고 느껴질 즈음에 땅바닥이 보였다.

호수의 바닥이 아니라, 수직 벽면에서 한 번 완만하게 꺾여서 만들어진 지형이었다.

'······!'

그리고 그 주위에 마치 석순처럼 무성히 뻗어있는 뾰족한 바위들.

일부는 옆으로 휘기도 해서 죽순이나 거대한 이빨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나는 벽면을 짚고 몸을 멈췄다.

바닥에 먼저 내려선 그녀가 다 도착했다는 듯 바위들을 가리켰다.

- 네가 말한 게 이거 맞지? 뾰족한 바위들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건 이 일대에 여기밖에 없는데.

아마 맞을 것이다.

플레이 영상에서 봤던 그 장소도 분명 이런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특이한 자연 지형이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근처에 동굴도 있어야 되는데······.'

거기가 바로 공간 도약의 신비가 숨겨져있는 장소다.

나는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입을 동굴 모양으로 뻐끔거리자 그녀는 바로 알아들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 동굴? 잘 모르겠는데. 근데 찾아보면 있을 것처럼 생기긴 했네.

그 말대로 뾰족 바위가 펼쳐진 지대는 매우 넓고 울퉁불퉁해서, 찾아보면 숨은 입구가 있을 만도 했다.

나는 흩어져서 찾아보자는 수신호를 보내려다가 말았다.

그녀가 먼저 동굴을 발견하면 멋대로 안으로 들어갔다가 신비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제자리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펴보였다.

- 뭐? 기다리고 있으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니, 왜? 동굴 입구 찾으려는 거 아니야? 나도 같이 찾으면 되잖······.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부탁이니까 그냥 좀 가만히 있어라.

그녀는 어딘가 뚱해진 기색으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 보물 따위 관심도 없구만, 누가 탐내기라도 할 줄 아나. 하여튼 인간들 탐욕은······.

뭔가 오해한 것 같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기에 그러게 냅뒀다.

나는 몸을 움직여 바위 지대를 돌아다니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람 한 명이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입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지 쪽부터 전부 살펴보고, 옆쪽으로 돌아서 아래로 급하게 경사진 부분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오.'

······찾았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바위들 틈에 절묘하게 숨어있던 입구를 들여다봤다.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허리춤에 묶어뒀던 발광석을 입에 물고, 천천히 안쪽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통로가 좁았기에 들어가기가 상당히 힘들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물이 있어서 훨씬 수월했다.

뻗은 팔로 번갈아 벽면을 집고 당기며 얼마나 이동했을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통로는 점점 넓어져서 팔다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쯤에 정면이 아니라 옆으로 갈라진 작은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아까 들어올 때 입구 정도 크기의.

'······?'

갈림길인가 싶어서 멈춰섰다가, 곧바로 부동 장막을 펼쳤다.

구멍에서 섬전처럼 튀어나온 거대한 뱀이 장막에 쩍 벌린 아가리를 부딪혔다.

【Lv. 35】

······갈림길이 아니라 이 물뱀 새끼 집이었구만. 아니, 사냥터인가?

장막과 부딪힌 놈은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며 꿈틀꿈틀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런 놈에게 핏방울을 쏘아내서 그대로 숨을 끊어버렸다. 어딜 기습만 하고 튀려고.

'별 게 다 있네.'

마저 가던 길을 계속했다.

이 안쪽으로도 계속 들어가면 방금 놈보다 더한 괴물이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큰 놈이 튀어나오든 죽이는 건 간단했으니까.

첫 신비를 찾을 때까지만 해도 뭐 하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여전히 육체 능력은 형편없어도 나도 이제 많이 강해지기는 했다.

통로는 도중에 꺾여서 한참을 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르자 나타난 건 괴물이 아니라, 내가 이 호수에서 일주일간 애타게도 찾았던 그것이었다.

작은 방 한 칸 크기의 공간.

그 한가운데의 바닥에서 신비의 문양이 보랏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

나는 씩 미소를 지으며 문양을 향해서 헤엄쳐 나아갔다.

화아악!

손을 대자 문양이 언제나 그랬듯 밝게 빛나며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나는 머릿속에 밀려오기 시작한 신비에 대한 정보를 더듬다가, 바로 한번 사용해봤다.

'오.'

공간 도약을 사용하자마자 내 위치는 얼마 떨어진 앞쪽으로 순간이동한 채였다.

딱히 이펙트는 없었고, 부동 장막처럼 시전 딜레이 또한 아예 없었다.

여긴 너무 좁아서 제대로 공간 도약을 시험해보기가 힘들었기에 일단 나가기로 했다.

지나온 통로를 그대로 되돌아가 밖으로 나오자, 멀리 떨어진 위쪽에서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서 순간이동했다.

- ······으헉!

갑자기 앞쪽에 나타난 내 모습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서는 정지했다.

- 뭐, 뭐야?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나는 위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가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 ······올라가자고? 뭘 찾기는 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공간 도약의 신비도 무사히 손에 넣었다.

***

지상으로 올라온 뒤, 나는 공간 도약의 신비를 펼치며 능력에 대해 자세히 시험해봤다.

일단 최대 이동 거리는 걸음으로 따졌을 때 100보가 조금 넘었다. 정확히는 잴 수 없지만 100미터 정도 되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능력은 횟수 저장이 가능한 충전식이었다.

'최대 3회에, 쿨타임은 10초.'

한마디로 저장치가 최대라면 5번까지는 쿨타임 없이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고, 10초가 지날 때마다 1회씩 차는 것이었다.

게임에서도 공간 도약의 신비는 이런 류의 스킬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게임에서는 하루에 총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10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그 제약까지는 없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다시 능력을 사용했다.

이번엔 위쪽으로 순간이동을 하자 한순간 내 몸은 높은 공중에 붕 떴다.

그 상태로 부동 장막을 사용하자 몸이 허공에 그대로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아서, 완전히 공중부양을 한 모양새가 됐다.

부동 장막은 몸을 아예 해당 위치에 고정시키는 능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네.'

이걸 뭐 사용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새로운 활용법을 익혀둬서 나쁠 건 없었다.

나는 몸이 떨어지기 전에 바닥으로 도로 순간이동해서 착지했다.

공간 도약의 신비 역시 부동 장막처럼 능력을 사용하면 몸에 작용하고 있던 힘이 아예 사라진다. 떨어지는 도중에 사용해도 낙하하던 힘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이 두 능력만 있으면 앞으로 적어도 낙사로 죽을 일만큼은 없을 듯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선 채 다른 능력들과의 시너지나, 능력의 더 효율적인 사용법을 생각해봤다.

첨벙!

그때 호수에서 여인이 나왔다.

그 손에는 큼직한 물고기 몇 마리가 잡혀있었다.

그녀가 물기를 털며 나한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 가자."

잠깐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도로 호수로 뛰어들길래 기다리고 있었더니, 뜬금없이 어딜 가자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그녀가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뭐······ 이제 해도 지는데 돌아가서 저녁 식사나 같이 하자고. 어차피 바로 떠나려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러려던 참이었는데."

신비도 찾았는데 이 호수에서 더 머물고 있을 이유가 있나.

마차로 돌아가서 낡이 밝으면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

내 말에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매정하게 그러기냐? 그 뭐냐, 우리 할아범 치료해준 것도 있고, 아까 나 구해준 것도 있고······ 어? 그래서 고마우니까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겠다는 거잖아."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이만 헤어지지."

"야, 좀!"

그녀가 성질을 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갑자기 진지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냥 잠깐 좀 오면 안 되냐? 우리 할아범이 너한테 할 아주 중요한 이야기도 있다 했다고."

······중요한 이야기?

그건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혹시 세인테아의 마법사장에 대한 이야기인가?'

짚이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 정도 되는 인물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닐 터.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함께 가지."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진작 그럴 것이지. 배고파 죽겠으니까 빨리 가자고. 이 물고기가 살도 야들야들한 게 진짜 기가 막히거든."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그녀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야, 근데 너는 이름이 뭐냐?"

"론."

"내 이름은 안느야, 론. 잘 기억해두라고."

다른 해린족과 족장이 부르는 걸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계속 흥얼거리며 걷는 그녀, 안느와 함께 동굴을 향해서 이동했다.

***

"어, 안느. 왔느냐."

동굴에 도착하자 동굴 입구에 뒷짐을 지고 서있던 족장이 우리를 반겼다.

"당신도 또 오셨구려.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 전에 뭐라도 약소하게나마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소."

그에 족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 그런 건 없소만."

······?

나는 안느를 돌아봤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미안, 뻥이었어."

"······."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그냥 저녁 한 끼 편히 즐기고 가면 되잖아? 내가 금방 고기 맛있게 구워줄 테니까!"

이걸 이렇게 낚는다고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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