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도약 (4)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
세인테아 소속의 대마법사 중 일인이자, 오성과 동등한 급의 강자.
이들이 어쩌다 그런 강자와 충돌을 빚게 됐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 추측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종족 사냥?'
세인테아 황실에서는 은밀하게 인간 외 종족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셸의 백월족이 몰살을 당했던 것처럼.
그것은 황제의 비틀린 신념이자, 라사의 메인 스토리에서도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해린족이라면 분명······.'
해린족에 대한 설정도 하나 떠올랐다.
이들이 특별한 종족인 이유는 그 모습을 아주 보기가 힘들다는 것도 있지만,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마결정.'
아마 그런 명칭으로 불렸을 것이다.
해린족은 정해진 수명을 거의 채우고 죽으면 죽기 직전에 '마결정'이라는 것을 생성한다고 한다.
여느 무협지에 나오는 영물의 내단과도 같은 것이었다.
평범한 마석과 비교해 순도가 극도로 높은 마석, 그것은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천고의 보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 대충 이해가 되는군.'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마결정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건 이들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예민한 문제일 테니 외부자인 내가 언급해서 좋을 건 없을 것이었다.
"어쩌다 그런 자와 마주치게 된 것이오?"
내 물음에 족장이 찻물을 마시고는 대답했다.
"본고장인 바다를 향해 돌아가는 중에 어쩌다 보니 마주하게 됐소."
"그자는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 부족을 공격한 것이오?"
"그건 아니고······ 그저 탐욕이 부른 결과지, 허허.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다오."
맥없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자세히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탐욕이 부른 결과.
역시 마결정과 관련된 문제가 맞음을 나는 확신했다.
"야, 그만 꼬치꼬치 캐물어."
계속 못마땅한 눈으로 대화를 듣고 있던 여인이 껴들었다.
"할아범은 뭘 그리 쓸데없이 다 말해주고 있어? 저놈이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면 어쩌려고."
"쯧쯧, 그걸 걱정하는 놈이 인간한테 모습을 드러내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
"······아니, 내가 언제 데리고 왔어! 쟤가 그냥 멋대로 쫓아온 거지!"
추적당할 거 하나 염두에 두지 못했냐고 껴들어 놀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쉬운 건 내 쪽이니 신경을 긁어서 좋을 건 없었다.
족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여튼 그런 연유로 이런 상처를 입게 된 것이오. 부족들 모두 물로 도망쳐서 목숨만 겨우 건질 수 있었지."
대충 상황이 연상되었다.
족장이 나서서 다른 부족원들이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주다가 결국 공격에 당하는 상황이.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이라면 그의 레벨쯤이나 되야 그나마 겨우 상대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뭐, 나야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부족원들이 모두 살아남은 것만으로 다행이지만······."
"할아범!"
갑자기 여인이 빽 소리를 내지르며 족장을 노려봤다.
"······그딴 말 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뭐가 얼마 안 남았다는 거야?"
"욘석아, 귀 아프게 소리 지르지 마라."
족장은 혀를 차고는 태평하게 차를 들이킬 뿐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손에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처가 굉장히 심각한 모양이오."
"솔직히 그렇소. 아무리 몸이 늙었다고 해도 영 나을 기미가 없으니."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치료약이 하나 있소."
그 말에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치, 치료약?"
족장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내게 물었다.
"치료약이라면······ 혹시 힐링 포션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알고 있네?
야생에서 사는 이들이기에 포션에 대해서는 모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나는 곧바로 품에 늘 상비하고 다니는 스칼릿을 꺼내들었다.
지금까지 꽤 사용해서 이제 절반도 안되게 남았지만 충분히 많은 양이었다.
포션에 시선이 완전히 고정된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세간에 돌아다니는 포션 중에는 효과가 가장 좋은 축에 속하는 최상품의 포션이다."
"······."
"내가 찾고 있는 장소가 어딨는지 알려준다면 이걸 주겠다."
나는 신비가 있는 장소를 찾고, 족장은 상처를 회복하고.
서로에게 무엇 하나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이, 인간이 주는 걸 어떻게 믿고······."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도로 입을 다물더니, 슬쩍 족장을 쳐다보고는 다급히 말을 바꿨다.
"아, 아니야. 믿을 테니까 줘."
"그 장소가 어디인지 알려줄 건가?"
"그래! 알려줄 테니까 빨리 달라고!"
간절하기 그지없는 외침이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격한 반응이었기에 나는 속으로 조금 당황하면서도, 할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일단 약속해라."
"또 뭘?!"
"이 포션이 족장의 상처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러니 효과가 미미하거나 없더라도 너는 날 그 장소로 안내해줘야만 한다."
스칼릿은 분명히 훌륭한 포션이다.
하지만 족장이 입은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완전한 확신이 없었다.
왜냐면 일단 보통 종족이 아닌 해린족이고, 대마법사에게 당한 상처라면 무언가 다를 수도 있었으니까.
솔직히 다친 이를 치료하는 일로 조건 같은 걸 걸기는 내키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여인도 말없이 그런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날 노려보다가 대답했다.
"······알겠으니까 줘. 그딴 장소 따위 100번도 더 안내해줄 테니까."
원래는 일단 장소부터 안내받은 뒤에 포션을 건네줄 생각이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순서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혹시나 그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
'뭐, 설마 그러겠어.'
나는 순순히 그녀에게 스칼릿을 건네주었다.
받아든 그녀가 가만히 서있다가 족장을 돌아봤다.
그가 손짓을 했다.
"이리 줘보거라."
족장이 포션 병을 열어서 내용물을 슥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의 향이 이토록 강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확실히 보통 물건은 아니구려. 정말 이런 걸 받아도 되겠소?"
"나도 얻는 게 있으니 그냥 주는 게 아니오."
"음, 찾고 있다는 장소가 당신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곳인가 보오. 아무튼 감사히 잘 쓰겠소."
여인이 그에게서 다시 포션을 낚아챘다.
"빨리 등이나 보여줘봐, 할아범. 지금 당장 치료하게."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알고?"
"······그, 그냥 상처에 부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눈치를 봤다.
"그냥 내가 할 테니 줘라."
그래도 몇 번이라도 써본 내가 사용법은 더 잘 안다.
족장을 자리에 눕힌 뒤 그의 등에 난 상처를 살펴봤다.
사선으로 길게 찢어진 상처, 그리고 그 주위에는 시퍼런 자국이 나있다. 색은 멍이 든 것과 비슷했지만, 정도는 그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했다.
꼴꼴꼴.
나는 상처 부위를 따라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포션을 조금씩 부었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효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조금 더디긴 하지만 상처가 서서히 아물며 서서히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
그 광경에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탄성을 내뱉었다.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족장이 도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얼떨떨한 눈으로 날 돌아봤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떻소?"
"······내상은 아직 좀 남았지만, 외상은 완전히 치유된 것 같소. 이거 정말 대단한 물건이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마 남지 않은 포션을 그에게 전부 주었다.
"남은 건 전부 마시시오. 내상도 어느 정도 회복될 테니."
족장이 남은 포션을 전부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좀 전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얼굴로 씩 웃더니, 여인을 돌아봤다.
"녀석아, 뭘 그리 울먹거리고 있느냐?"
그 말대로 여인은 금방이라도 울 듯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다 나은 거야, 할아범?"
"그래. 이제야 다시 바다로 향할 수 있겠구나.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말이다."
"흐읍, 끅······!"
그녀가 족장의 품으로 달려들어 안기더니 아이처럼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족장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이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자세히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어색하게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
동굴에서 나온 뒤 다시 마차로 돌아왔다.
나는 무호흡 마법 인챈트를 받고 바로 정해둔 장소로 혼자서 향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곧 숲 안쪽에서 여인이 나타났다.
"······뭘 봐."
그녀의 눈가가 아직도 붉었기에 빤히 쳐다보니 퉁명스러운 말이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출발하지."
"말 안 해도 그럴 거거든?"
여인이 옷가지를 훌렁훌렁 내던지고는 호수를 향해서 다가갔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이제 공간 도약의 신비를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수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그녀가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물었다.
"근데 넌 인간이잖아. 물속에 오래 못 있는 거 아니야?"
"마법을 걸어뒀으니 상관없다."
"아, 그래······."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
"고맙다고, 우리 할아범 치료해줘서. 진짜로 고마워."
"그래."
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도 원하는 게 있어서 치료해준 거니 굳이 감사를 받을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가 말하고서 쪽팔린 기색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됐지? 이걸로 감사 인사는 한 거다? 난 너처럼 뻔뻔하지 않으니까!"
이건 싸우자는 걸까, 감사 인사를 하는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내가 찾는 장소에 대해서 설명이나 해봐라. 호수 어디쯤에 있는지."
그녀가 호수를 슥 둘러보며 한 방향을 가리키더니 말했다.
"저기 보이지? 저쪽까지 이동해서 거의 바닥이 보이는 곳까지 내려가야 돼. 꽤 깊은 곳에 있어."
나도 그녀가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어차피 위에서 봐야 잘 몰랐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좀 걱정되는 건 그 정도 깊이까지 들어가면 그 빌어먹을 가시 물고기들을 마주칠 수도 있다는 건데······."
"가시 물고기?"
"있어, 코는 더럽게 길고 뾰족하고 덩치도 너보다 배는 큰 놈."
코가 더럽게 길고 뾰족만 물고기 몬스터라면······.
'차징 피쉬 말하는 거군.'
레벨은 성체 기준 30대로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많게는 수백 마리씩 몰려다니며 몰이 사냥을 하는 놈들.
온몸이 단단한 비늘로 덮여있고, 앞쪽에 돌출된 뾰족한 가시를 무기 삼아 이름대로 돌진 공격을 하는 놈들이기에, 그 수가 많을수록 굉장히 치명적이다.
이놈들은 내가 초보 시절에 멋모르고 잡겠다고 나섰다가 제대로 역관광을 당한 적 있던 몬스터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뭐, 그래도 괜찮아. 몇 마리 쯤이야 내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넌 그냥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그녀가 으슥거리며 말했다.
나는 머리 위의 레벨을 쳐다봤다.
39가 그렇게까지 자신감을 가질 레벨은 아니지만, 뭐······ 안내만 잘 해주면 그만이니까.
말을 잇던 그녀가 그제야 궁금하다는 듯 물어봤다.
"근데 그 장소는 왜 찾는 거냐? 거기에 뭐 금은보화라도 숨겨져있어?"
금은보화라.
그딴 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보물이 숨겨져있지.
"알 것 없다."
"아하, 알겠다. 너 보물선 찾으려는 거구나? 바닷가에서 살 때도 그런 인간들 많이 봤거든······ 잠깐, 근데 여긴 호수잖아. 너 설마 호수에서 보물선을 찾겠다고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아니지?"
"그만 떠들고 이제 안내나 해."
그 말에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뒤따라서 뛰어들었다.
첨벙!
물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자 순식간에 비늘이 뒤덮인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지금 자세히 보니 옆구리에는 아가미 같은 것도 생겨있었다. 신기하긴 하네.
그녀가 나를 향해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이고 먼저 헤엄쳐서 이동했다.
'너무 빠르잖아.'
열심히 그녀를 쫓아 이동했지만 당연히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물에서 사는 종족을 인간인 내가 어떻게 따라잡겠나.
내가 뒤쳐지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소리쳤다.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그녀의 음성이 선명하게 꽂혔다.
- 뭐 그렇게 느려터졌어! 빨리 와! 그냥 두고 간다?!
······해린족은 수중에서도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했던가?
어쨌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내게 속도를 맞춰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가자 슬슬 큼직큼직한 물고기들이 나타나며 곁을 지나쳐갔다.
- 괜찮아, 이것들은 다 먼저 공격하는 놈들은 아니······.
여유롭게 말을 잇던 그녀의 안색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아래쪽에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갑옷처럼 단단해 보이는 검은색 비늘에, 앞쪽으로 랜스처럼 뾰족한 가시를 가진 괴어가.
'아이씨.'
나도 놈을 보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물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녀가 언급했던 차징 피쉬였다. 이걸 진짜로 마주치네.
- 조심해!
퍼엉!
이쪽을 향해서 돌진해오는 놈을 그녀가 쏘아지듯 날아들어서 주먹으로 후려쳤다.
물 속에서도 마치 지상에서 뛰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였다.
몸통을 제대로 가격당한 차징 피쉬가 피를 뿜어내며 축 아래로 가라앉았다.
안심하는 그녀와 달리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놈들은 단일 개체로 다니는 경우보다 떼로 몰려다니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곧 주위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엄청난 양의 기척들이 느껴졌다.
- 어, 어?
그녀도 당혹스런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순식간에 몰려든 차징 피쉬들이 우리 주위를 포위하고서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 수는 점점 늘어나더니 이내 수백을 가볍게 넘겼다. 마치 검은 파도와도 같았다.
'어우······.'
나는 질렸다는 듯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게 바로 놈들의 사냥 방식이었다.
사냥감을 포위하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빙글빙글 돌다가, 일시에 사방에서 찔러오는.
어차피 자기들끼리는 단단한 비늘 때문에 다치지 않기에 행할 수 있는 방식의 사냥이다.
- 저, 정신 바짝 차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쳐다보니 그녀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있었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정신을 차리라는 건지.
- 내 몸을 꽉 붙잡고 있어. 내가 어떻게든 위쪽을 뚫어볼 테니까······.
나는 괜히 장난기가 도져서 말했다.
- 난 틀린 것 같다. 너라도 빠져나가.
- 뭔 개소리야! 그딴 소리 말고 빨리······!
그래도 버리려고는 안 하는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서 스며나온 피가 구체의 형태로 뭉쳐졌다.
막 다시 소리치려던 그녀가 내 손바닥 위에 떠있는 혈구를 보고서 멈칫했다.
'어디 한번······.'
혈술 성능 좀 제대로 시험해볼까?
주위를 회전하던 차징 피쉬 떼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옴과 동시에, 혈구가 폭발하듯 터졌다.
퍼어엉!
사방으로 터져나간 핏방울들이 물살을 헤치고 놈들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숨 막힐듯 몰려들던 검은 파도가 일시에 힘을 잃고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전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