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46화 (46/189)

공간 도약 (3)

해린족.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희소 종족들 중 하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은 분명히 해인족이 맞았다.

지상에서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물에서는 전신이 비늘로 덮인 모습을 하고 있는 종족은 해린족밖에 없었으니까.

설마 이런 곳에서 이 희귀하기 그지없는 종족을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좀 놀랐다.

"뭘 빤히 쳐다보고 자빠졌어. 신기하냐?"

"······."

어째 입은 좀 험한 녀석이네.

이내 피부에 돋아났던 비늘들이 거의 자취를 감춰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아서 완전히 나신이 되어버렸기에 나는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얘네는 인간처럼 맨몸을 드러내는 걸 그닥 수치스러워하는 종족이 아니었지.

여인이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거야? 기껏 물고기 밥 될 거 구해줬더니 고맙다는 말도 없냐?"

나도 머리를 탈탈 털며 몸을 일으켰다.

"구해줄 필요 없었다."

"······뭐?"

"위험하지도 않았는데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다는 소리다."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넘어가도 됐지만 괜히 말투가 거슬렸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지.

"와, 허!"

그에 여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그게 위험한 게 아니었다고?"

"그래."

"진짜 뻔뻔하네. 감사 인사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내가 너희 인간처럼 구해줬다고 뭐 대가라도 요구할 줄 알았냐?"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됐다, 됐어. 아이씨, 하여튼 이래서 인간 놈들은······."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해린족이 가이탄 호에도 살았던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애초에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한 번밖에 못 봤을 정도로 희귀한 종족이었으니까.

그리고 해린족은 분명 해안에서 서식하는 종족으로 알고 있었는데······ 대체 왜 이런 호수에 있는 거지?

정말 뜻밖의 마주침이었는지라 기분이 조금 묘하던 와중, 생각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그럼 여기 호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즉, 내가 찾고 있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있을 거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곧장 여인을 불러세웠다.

"이봐, 해린족."

내 외침에 걸음을 멈춘 그녀가 도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너 뭐냐? 우리 종족에 대해서 알아?"

"그래."

"어떻게?"

"책에서 본 적 있으니까. 지상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물에서는 물고기처럼 비늘을 덮고 있는 전설의 종족."

"······저, 전설?"

왜인지 그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흐음, 흠. 전설이란 말이지. 너희 인간들한테는 우리 종족이 그렇게 소문나있구나?"

"······."

저거 설마 지금 전설이라는 말 듣고 좋아하는 건가?

'그냥 굉장히 보기 힘들다는 뜻으로 말한 건데.'

조금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닌데? 나 해린족 아닌데? 네가 잘못 본 거야, 인간."

갑자기 또 왜 이래?

"맞잖아."

"아이씨, 아니라고. 너 어디서 우리 봤다고 소문내고 다니지 마라, 응?"

역시 괜히 구해줬다며 그녀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들처럼 자신들의 터전이 노출될까 염려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죽이려 들지도 않고 오히려 구해주려고 했으니······ 입만 좀 거칠지 성격은 반대인 듯했다.

"그래서 뭐? 왜 부르는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호수 안에 바위들이 뾰족하게 솟은 지형을 알고 있나? 아니면 동굴이 있는 곳이라거나."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몰라. 그건 왜 물어?"

나는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초감각을 얻은 뒤로 상대의 표정을 더 잘 읽을 수 있게 됐는데, 그녀는 특히나 감정을 못 숨겼다.

그래서 반쯤 확신했다. 내가 방금 말한 장소를 그녀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군."

다시 한 번 떠보듯 말하자 그녀가 약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역시 알고 있네.

"부탁하지.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줬으면 한다."

"아니, 모른다고."

"원하는 게 있다면 가능한 선에서 보답하겠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도로 몸을 돌렸다.

"뭐래, 쓸데없는 말로 더 붙잡지 마. 쫓아오면 다시 호수에 던져버릴 테니까 쫓아오지도 말고."

그리고는 훌쩍훌쩍 뛰어 순식간에 숲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머리를 다시 한 번 털며 숲을 응시했다.

놓친 걸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여기 호수 인근에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으니까.

'저걸 어떻게 구슬리지.'

일단 돌아갔다가 이따가 다시 찾아가봐야겠다.

***

마차로 돌아가서 몸을 말리고 식사를 마친 뒤, 나는 곧장 아셸을 데리고 여인을 만났던 장소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가 남긴 자취를 쫓았다.

바닥에 새겨진 발자국이라거나 풀이 밟힌 자국 등등, 그거면 그녀가 어디로 향했는지 파악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보통이라면 발견하기도 힘든 흔적들이었지만 초감각을 끌어올리니 그닥 어렵지도 않았다. 이거 추적에도 굉장히 유용하네.

그렇게 흔적을 쫓아서 도달한 곳은 숲 깊은 곳에 위치한 한 동굴이었다.

동굴의 입구에 서서 잡담을 떨고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아마 경비를 서고 있는 걸로 보이는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싹 표정을 굳혔다.

"······인간?"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한 명이 동굴 안으로 황급히 들어가고, 남은 한 명이 동굴에 가까이 접근한 우리에게 소리쳤다.

"멈춰라, 인간!"

나는 순순히 멈춰섰다.

안에서 다른 이들이 몰려나오는 기척이 느껴졌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이내 수십에 가까운 해린족들이 동굴에서 나왔다. 다행히도 이번엔 다 옷들을 입고 있었기에 눈 둘 곳이 없지는 않았다.

"······야, 너!"

그중에 낯익은 얼굴의 여인 하나가 나를 보고는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너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흔적을 쫓아왔다."

"그러니까 왜 쫓아왔냐고! 이게 기껏 구해줬더니 진짜······!"

"그게 무슨 소리냐, 안느. 인간을 네가 구해줬다고?"

긴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다른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녀가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점점 소란이 커지고 있는데 동굴 안쪽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다들 조용히 하거라!"

그에 단숨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동굴에서 걸어나온 사람은 건장한 체구를 지닌 노인이었다. 푸른 머리칼과 수염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지나치고 앞쪽으로 걸어나온 노인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Lv. 87】

······무려 90에 가까운 레벨.

'이 부족의 족장인가?'

해린족이 상당히 강력한 마력 친화도를 타고나는 종족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대단한 레벨이었다.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숨기며 가만히 시선을 교환했다. 노인의 눈은 마치 바다처럼 깊은 느낌을 주었다.

나를 응시하고 있던 노인이 이내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허허, 이거 참. 보통 분이 아니시구려."

"······."

"이곳에는 왜 찾아온 것인지 연유를 말해주시오. 보아하니 내 손녀와는 이미 면이 있는 듯한데."

그렇게 말한 노인이 여인을 슬쩍 흘겼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 둘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이 부족의 족장 되시오?"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스스로 어색함을 느꼈다.

왜냐면 이 세계에 빙의한 뒤로 처음으로 사용하는 경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지금은 부탁할 일이 있어 다짜고짜 찾아온 게 이쪽이니 차릴 예의는 차려야 했다.

내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당신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저 저 여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오."

내 시선을 받은 그녀가 발끈한 얼굴로 다시 소리치려 했다.

"야이씨, 너 아까 그거······!"

"그만하거라, 안느야."

족장 노인이 그녀를 말리고서 다시 내게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겠소? 대화를 원하는 거라면 차라도 한 잔 내어드리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싱긋 웃으며 따라오라는 듯 동굴 안으로 도로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상처?'

왜냐면 그의 등에 꽤나 커다란 상처가 나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치료 중인지 상처 부위에는 약초 같은 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야, 들어올 거면 빨리 들어와."

못마땅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고 있던 여인이 턱짓을 했다.

뭐, 다행히 손님 취급은 해줄 생각인 듯하니 일단 들어가보자.

***

동굴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소박한 공간이 나타났다.

자리에는 풀들이 깔려있었고, 모닥불 주위에는 물고기 뼈 같은 것들이 모아져서 널부러져있었다.

"그냥 적당한 자리 잡고 앉으시오."

내와 아셸이 어디에 앉아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자 족장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대충 맞은편에 앉자 누군가 차를 내왔다.

족장에게 먼저 주고, 내 앞에도 찻잔을 내려놓은 해인족이 나를 은근히 째려보며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족장이 끌끌 혀를 차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이해해주시오. 최근에 있던 일 때문에 다들 인간에 대한 적의가 적지 않소."

그에 구석 자리에 쭈그려앉아서 마찬가지로 날 째려보고 있던 여인이 말했다.

"나는 원래부터 인간 싫어했거든, 할아범."

"시끄럽다, 녀석아."

"아니, 저 뻔뻔한 것 좀 봐봐. 저놈 내가 아까 호수에서 물고기 밥 될 뻔한 거 구해준 거거든? 그런데 쫓아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이 여기까지 쫓아왔잖아. 은혜도 모르고."

그에 족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네가 저 인간을 구해줬다고?"

"그렇다니까!"

"정말로 내 손녀에게 도움을 받았소?"

그가 시선을 옮겨 내게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쓸데없는 참견이었소."

"그럼 그렇지."

"아니, 와! 저 진짜 뻔뻔한······!"

노인이 무시하고서 말을 이었다.

"손녀가 뭘 오해한 듯하니 그냥 넘어가주시오. 입은 거칠어도 심성은 착한 녀석이니, 나쁜 의도로 한 행동은 아닐 거요."

······이 노인은 나에 대해서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한 걸까?

나는 억울해서 죽겠다는 얼굴로 난리치는 여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말했다시피, 당신의 손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은데······."

"야, 너 아까 나한테 물었던 그 장소 가르쳐달라고 하려는 거지?"

"그래."

그녀가 혀를 배 내밀며 말했다.

"너같이 뻔뻔한 놈한테는 안 가르쳐줄 거거든?"

"아까 구해줬던 건 정말로 고맙다. 감사 인사가 늦었군."

"······누굴 바보로 아냐?! 절대로 안 가르쳐줄 거니까 집어쳐!"

그렇게까지 단순하진 않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족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비도 신비지만 그에게 궁금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해린족은 바닷가에 사는 종족으로 알고 있었는데, 원래부터 이 호수에서 살고 있었소?"

그 물음에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미약하게 어두워졌다.

족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지금은 사정이 있어 잠시 머물고 있는 것뿐이지."

나는 직감적으로 그 사정이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등에 있는 상처 때문이오?"

"그렇소이다. 벌써 꽤 지난 일인데도 회복이 더뎌서 아직도 이 꼴이라오."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소?"

레벨을 생각하면 그가 누구한테 당할 만큼 약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족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대와 같은 인간과 충돌이 있었소."

"인간이라면······."

"아주 강력한 마법사였지. 자신을 세인테아 황실의 마법사장이라고 하더군."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튀어나왔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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