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44화 (44/189)

공간 도약 (1)

숲을 빠져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바로스와 다시 합류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나는 손에 핏물을 띄워 다양한 형태를 만들거나, 아니면 분할하는 법을 연습했다.

아직 컨트롤이 익숙하지 않아서 평소에 이런 식으로 꾸준히 숙련도를 쌓아둘 생각이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남아도는 게 시간이고 할 것도 없었기에 새로운 활력이라면 활력이었다.

굳이 아셸이나 다른 이들에게도 혈술의 존재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왜냐면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언제가 됐든 대놓고 사용하고 다녀야 될 때가 올 텐데 숨길 이유가 없었다.

아셸은 내가 혈술을 사용하는 걸 처음으로 봤기에 반대편에서 계속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뜬금없이 피를 조종하고 앉았으니 갑자기 왜 저러나 싶겠지.

"할 말이 있나?"

말을 걸자 그녀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론 님께서는······ 뱀파이어셨습니까?"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내가 뱀파이어로 보이나?"

"······아뇨, 인간으로 보입니다."

"그래, 인간이 맞다."

그런데 어떻게 피를 조종하는 건데?

내 말에 아셸이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 궁금증을 굳이 해결해줄 생각은 없었다.

혈정에서 혈술을 흡수했다는 사실까지는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꽤 한참 동안 혈술을 연습하던 나는 그만 피를 거두었다.

'이제 다음 목적지는······.'

본래의 계획은 엘로드 숲은 뒤로 미뤄두고 바로 다음 신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었다.

그게 중간에 뱀파이어를 발견하면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고. 결과적으로 혈술도 성공적으로 얻고 전부 다 잘 됐다.

다음 목적지는 예정했던 대로 1군주령.

그곳에서 찾아내야 할 신비는 따지자면 방어 계열 능력에 가까운 신비였다.

'공간 도약.'

명칭대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신비다.

이 세계에서 공간과 관련된 능력은 굉장히 희귀했다.

보통 게임에서야 마법사라면 개나소나 다 사용하는 게 텔레포트지만 라사 세계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공간 계열의 마법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도 극히 드물었고, 또 제약도 굉장히 많았다.

'이번 건 특히 찾기 힘들겠지······.'

벌써부터 가슴에 막막함이 턱 쌓이는 기분이었다.

신비 찾기야 뭐 지금까지 쉬웠던 적이 없지만, 이번 건 특히나 그랬기 때문이다.

1군주령에 위치한 가이탄 호.

공간 도약의 신비는 바로 그 거대한 대호수의 어딘가에 숨겨져있다.

한마디로 수중 탐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다.

'어쨌든 그것까지 얻고 나면 남은 신비는 하나뿐인가.'

공간 도약까지 얻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얻을 신비는 내가 사용하기 위해서 찾으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무엇보다도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신비이기도 했다.

'놈'이 그 신비를 찾게 두는 건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하는 일이니까.

다만, 숨겨진 장소가 이 대륙에 존재하는 마경 중 한 곳이었기에 다른 신비들부터 찾아서 스펙을 올려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미 늦었을 수도 있나.'

사실 놈이 그 신비를 발견한 게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 몰랐기에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이런저런 것들을 따져보면 진작 몇 년도 더 전에 찾고 지금쯤 한창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그래도 아직 모르는 일이니 찾아보기는 해야겠지.'

당장은 공간 도약의 신비부터 찾는 일에 집중해야겠지만 말이다.

게임의 플레이 배경으로부터 5년 전 시점인 현재.

시간이 꽤 흘렀으니 메인 스토리의 본격적인 시작까지는 5년도 채 남지 않았다.

칼데릭을 떠돌기 시작한 지도 이제 대충 반 년 가까이 됐나?

슬슬 여정의 끝이 보인다고 생각하며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아셸은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7군주를 힐끔 쳐다봤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신경 쓸 것 없이 자신이 맡은 호위의 책무만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벌써 칼데릭을 떠돌기 시작한 지도 거의 반 년, 그동안 그가 보여준 수많은 의외의 모습들은 7군주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어떤 때에는 군주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너무도 평범했고, 어떤 때에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호인 같았다.

또 어떤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세상만사 큰 관심이 없는 초월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성향뿐만 아니라 능력 또한 그렇다.

마치 언령처럼 말만으로 상대를 죽이는 능력이라든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라든가.

방금 보여준 피를 다루는 능력 또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뱀파이어들과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몇백 년 전에 그들의 선조와 깊은 연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다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그가 악인에 가까운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 채하지 않았고, 노예로 잡힌 이들도 구해줬으며, 한 부족의 평화가 걸린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그 행동들이 속에는 어떤 의도를 품고 있었을지 몰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호위에 집중하고 있나?"

"예?"

"자꾸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길래."

"······죄송합니다."

아셸은 잠시 엄한 데에 정신이 팔린 스스로를 탓하며 다시 호위에 신경을 집중했다.

***

3군주령에서부터 여러 도시들을 거치며 많은 시간이 흘렀다.

1군주령의 북쪽의 대도시 중 하나인 포이젤트.

가이탄 대호수의 인근에 위치한 그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람을 찾는 일이었다.

호수를 탐험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를 말이다.

숙소를 잡고 언제나 그랬듯이 가장 먼저 모험가 길드를 찾아갔다.

길드 직원들의 주업무 중 하나는 의뢰인과 적절한 모험가를 연결시켜주는 일이고, 그게 가장 큰 존재 이유였다.

그렇기에 조건에 맞는 인재를 구하려면 보통 길드를 찾아가는 것이 가장 빨랐다. 조건이 다소 까다더라도 말이다.

"음, 그러니까······."

내 말을 들은 모험가 길드의 직원이 확인하듯 물었다.

"인챈트 마법과 무호흡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줄 아는 모험가를 찾으신다는 말씀이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이탄 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도 있으면 더 좋지."

직원이 조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곤란함의 감정이 담긴 웃음이었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이해했다.

나도 조건을 요구하면서 정말 여기에 딱 들어맞는 모험가가 있으려나 싶었으니까.

인챈트 마법.

명칭 그대로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마법의 효과를 부여해주는 마법이다.

이 세계에서 마법이 각인된 아이템이라는 건 마법사들이 마법을 보다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한 보조 도구일 뿐이다.

마법의 전개를 담당하는 술식 각인이 복잡할수록 마석에서 금방 지워진다던가 뭐라던가 했던가. 군주성에서 관련 서적을 읽었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난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술식의 중요한 부분만 새겨놓고 그 중간중간만 채워넣는 방식으로 사용하지만, 마법을 모르는 사람은 그게 안 되니까 사용하지 못한다.

고대에는 마법 술식을 장기간 저장하는 기술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대까지 그 기술이 남아있지는 않다고.

그래서 게임에서도 아이템이라고 해봐야 마법사 직업군 외에 액티브 능력이 보유된 아이템은 상당히 희귀하긴 했다. 그만큼 다른 능력치 부분에서 밸런스를 잘 맞추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기에 이 세계에서 인챈트 마법이라는 건 상당히 위상이 높았다.

심지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도 많지가 않기에 더더욱 그랬다.

이 세계에는 반드시 타고나야만 하는 마력의 성질이라는 것도 있어서, 소수의 마법들은 그 성질이 맞지가 않으면 아무리 마법적 경지가 높은들 사용할 수 없기도 했다. 공간 계열의 마법이나 인챈트 마법이 그러했다.

'거기에 무호흡은 익히는 마법사도 거의 없는 마법일 텐데 말이야.'

마법사가 무호흡 마법 같은 걸 익혀서 대체 어디에 쓰겠는가?

물론 익혀서 나쁠 건 없겠지만 그럴 시간에 훨씬 더 유용하고 강력한 마법들을 익히는 게 보통 아닐까.

한마디로 인챈트에 무호흡을 함께 익히고 있는 마법사는 매우 찾기가 힘들 것이었다.

그럼에도 호수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찾아내야만 했기에 나는 진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건에 맞는 모험가가 아예 없나?"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없다고 하면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할 생각이었다.

좀 더 권력을 활용하면 어떻게든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겠지. 이 도시의 시장을 찾아가든가 해서 말이다.

하지만 직원에게선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마침 딱 한 명 생각나는 특급 모험가 분이 있기는 한데, 지금은 이 도시에 안 계시는 걸로 알고 있어서요."

"그럼 어디에 있지?"

"죄송하지만 그것까지는 저도 잘······ 자주 도시에 들르시기는 한데, 계속 이곳에 머무르고 계시는 거면 소식을 전해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에게 은화 한 닢을 건네주었다.

"테리아 여관의 305호로 소식을 전해주면 고맙겠군. 아예 찾는 의뢰인이 있다고 전하고 데리고 와도 좋고."

"앗, 네! 알겠습니다!"

그녀가 동물 귀를 쫑긋거리며 잽싸게 돈을 받아들었다.

일단은 좀 더 도시에 머물면서 그 모험가가 오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가 흘렀을까.

여관으로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왔다.

"지금 도시에 왔다고?"

방 앞까지 찾아온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예, 공자님. 말씀을 전하고 함께 오려고 했는데, 찾는 사람이 직접 오라고 하셔서······."

나는 피식 웃으며 여관 방을 나섰다.

그래, 뭐. 용건이 있는 사람이 가야지.

곧바로 그녀를 따라 아셸과 함께 모험가가 있다는 주점으로 이동했다.

"저분이에요."

그녀가 주점 구석 테이블에서 홀로 앉아있는 수염이 성성한 남자를 가리켰다.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홀로 맥주를 마시고 있던 그가 나와 뒤쪽에 있는 직원을 바라보더니, 넉살 좋게 웃으며 물었다.

"아, 나으리께서 절 찾는다는 분이셨습니까?"

직접 오라길래 좀 성깔 더러운 인상을 상상했는데 별로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그를 한 번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인챈트 마법과 무호흡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모험가인가?"

그가 콧등을 벅벅 긁고는 킁 소리를 내며 말했다.

"뭐, 그렇습니다. 그보다 저를 어디에 쓰려고 고용하시려는 건지부터 여쭤도 되겠습니까?"

"가이탄 호를 탐험할 거다."

"아, 가이탄 호······."

남자가 씩 웃더니 말했다.

"무슨 보물 지도라도 얻으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 큰 호수를 탐험할 생각을 다 하시고, 행동력도 좋으십니다."

나는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잔말은 됐고, 일단 인챈트와 무호흡 마법에 대해서 좀 자세히 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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