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술 (5)
손부터 시작해서 한순간 이질적인 감각이 차올랐다.
신비를 흡수할 때 느끼는 고양감과는 또 다른 묘한 감각.
흡수된 혈정의 기운이 혈관을 타고 몸 전체를 한 차례 훑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
이내 혈정은 더 이상 미미한 빛조차 뿜어내지 않았다.
나는 그런 혈정을 바라보다가 몸을 체크했다.
가스칼리드의 혈술이 어떤 능력인지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역시 신비를 흡수할 때처럼 직관적으로 어떤 능력인지가 머릿속에 새겨졌다.
"혀, 혈정의 빛이······!"
바위 아래에서 뱀파이어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이 자리에서 혈술을 사용해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안 되고.
나는 몸을 일으켜 바위 아래로 터벅터벅 내려왔다.
빛을 잃은 혈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족장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끝났다."
"······."
그녀는 그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부족이 오랜 세월간 고통받아온 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됐으니 이해되는 반응이었다. 정말 손만 잠깐 대고 끝났으니까.
"혈정에 있는 저희 선조의 혼을······ 소멸시키신 겁니까?"
"그래. 저 돌덩이가 이제 더 날뛰는 일은 없을 거다."
영혼은 없애버리고 혈술까지 내가 낼름 먹어버렸으니 혈정에 남아있는 기운은 더 이상 없다. 그냥 평범한 돌이 된 것이었다.
장로 뱀파이어들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안도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특히나 전사장이 감격한 기색을 억누르지 못했다.
"누, 누님. 이제 더 이상 의식을 치룰 필요가 없습니다. 누님의 생명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게임에서의 엘로드 숲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혈정을 봉인했을 당시의 족장이 죽고, 이들 부족은 대대로 가스칼리드의 직계 후손을 족장으로 삼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족장들은 자신의 생명력을 바쳐 의식을 통해 혈정의 기운을 억눌러왔다.
현재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며 그것은 족장이 지니는 당연한 책임이자 부족의 풍습이 되었다.
전사장 또한 가스칼리드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그는 부족에게 있어 너무나 뛰어난 전사였기 때문에 누구도 의식에 그의 생명이 낭비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족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실상 자신을 대신하다시피 해서 족장이 된 누이에게 전사장은 항상 큰 죄책감과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뒷배경을 알기에 지금 그가 이토록 기뻐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뭐, 아무튼 이걸로 다 끝났다.
빨리 밖으로 나가 혈술을 펼쳐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
기운을 잃은 혈정을 한참이나 더 둘러보고 나서야 뱀파이어들은 정말로 혈정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받아들였다.
동굴 밖으로 나와서 나는 그들에게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받았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조님과의 약속을 의심했던 것 또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은공 덕분에 저희 부족은 오늘로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족장과 전사장, 그리고 장로들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바로 아까 전까지 적대하고 미심쩍어했던 것과는 태도가 순식간에 정반대가 되었지만, 딱히 그들을 탓하는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건 나였으니 그게 당연한 대응이었으니까. 나도 순수한 선의로 혈정을 처리한 것도 아니고.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은공."
전사장도 면목이 없다는 듯 내게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그래, 그래도 넌 미안한 줄 알아야지.
고개를 숙여 훤히 드러난 놈의 정수리를 한 번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솟았지만 참았다.
대신 새롭게 얻은 능력을 확인해보기 위해 말했다.
"한번 혈술을 사용해봐라."
"······예?"
내 뜬금없는 요구에 전사장이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다시 말했다.
"네 혈술을 펼쳐보라고 했다. 아까 전에 내게 했던 공격처럼 말이야."
"어, 어째서 그러시는······?"
"어서."
다짜고짜 하라고 말만 하니 결국 전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곤 서서히 안색이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물들더니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무언가 잘 되지 않는지 전사장은 혈술을 전혀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주위의 뱀파이어들이 그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이런 거군.'
성능을 대충 확인한 나는 펼치고 있던 능력을 도로 거두었다.
그러자 전사장은 다시 정상적으로 혈술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손에 피가 뭉쳐졌다.
"뭐, 뭐지?"
"왜 그러는 건가, 전사장?"
"장로님, 방금 한순간 혈술이······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어리둥절하게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가스칼리드 혈술의 고유 능력.
그것은 다른 뱀파이어의 혈술을 그대로 앗아가서 자신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건 즉살처럼 접촉이라는 조건도 없기에 상대가 일정 범위 내에만 있다면 펼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가스칼리드의 혈술에 노출된 뱀파이어는 방금처럼 혈술을 펼치지 못하게 된다.
한마디로 상대가 뱀파이어 한정으로는 사기와 다름없는 능력이었다. 물론 상대가 자신보다 더 강하거나 동등하면 혈술이 아예 안 통하거나, 능력을 완전히 가져오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만.
'이제 뱀파이어를 만날 일은 거의 없을 테니 별로 쓸모가 있을 능력은 아니지만.'
이런 고유 능력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필요했던 건 혈술의 공통 패시브인 혈액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능력뿐이었으니까.
더 이상 볼일은 없었기에 바로 아셸과 함께 숲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 나를 뱀파이어들이 붙잡았다.
"은인을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습니다. 혹여 원하시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가능한 선에선 최대한······."
"됐다. 내가 데려온 뱀파이어들이나 잘 부탁하지."
이미 원하는 건 손에 넣었고, 그 외에 딱히 이들 부족에게서 얻어갈 건 없었다.
내 대답에 뱀파이어들이 더욱 경외하는 눈으로 날 부담스럽게 바라봤다.
이들은 내가 혈정에서 선조의 능력을 흡수했다는 걸 몰랐으니 말이다.
뱀파이어들의 배웅 아래 마지막으로 숲을 떠나기 전.
장로들 중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가장 연장자로 보였던 그 뱀파이어였다.
"염치없지만 은공께 바깥세상의 일을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
"폭왕은 여전히 칼데릭의 6군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
······폭왕?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장로들은 하나같이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왜냐면 이 대륙에서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인식을 시궁창으로 처박은 데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존재를 하나만 꼽자면, 그게 바로 폭왕이었으니까.
아직도 바깥에서 그 지랄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모양이었다.
"그럼 부디 살펴가십시오. 은공께서 저희 부족에 베풀어주신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뱀파이어들의 터전을 떠났다.
적당히 거리가 멀어지고 난 후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예."
아셸은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우거진 수풀 안쪽으로 이동했다.
이내 그녀의 기척이 완전히 느껴지지 않을 즈음에 멈춰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이쯤이면 됐겠지.
나는 허공에 손을 뻗고 제대로 혈술을 펼쳐봤다.
스으으.
손바닥에서 피부를 통과하고 스며들듯 나온 피가 두둥실 떠오른다.
나는 그것을 신기한듯 쳐다보다가 이리저리 움직여보기도 하고, 동글게 공 형태로 뭉쳐보기도 했다.
혈액은 내 의지에 따라서 잘도 허공을 유영했다.
'이런 감각이군.'
그냥 혈액을 한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염동력이나 다름이 없다.
마치 없던 날개가 생겨서 처음으로 파닥여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조종하고 있던 혈액에 전력을 담아서 앞쪽에 보이는 나무로 쏘아봤다. 가시처럼 날카롭게 만들어서.
퍼억!
기세 좋게 쏘아진 혈액이 나무에 부딪혀 껍질을 조금 부수었다.
딱 그 정도의 파괴력뿐이었기에 나는 조금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뭐, 제법 빠르기는 한데.'
화살 같은 것보다야 속도는 훨씬 빠르지만 위력이 전혀 안 나왔다.
아까 전, 뱀파이어들이 날 공격하며 혈술을 사용했을 때는 숲 한편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가공할 위력을 보였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불가능했다.
왜냐면 뱀파이어가 아니라 인간이니까.
게임 종족 설정에 기억하기로 뱀파이어는 피의 밀도나 재생력 자체가 다른 종족들과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그러니까 인간과 별다를 것도 없는 덩치의 몸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양의 혈액을 뽑아내고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혈술을 얻었다고 해도 타고난 종족이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그런 비정상적인 위력은 낼 수 없었다.
한마디로 무기는 기관총인데 안에 든 총알이 비비탄인 셈.
가스칼리드의 고유 능력인 혈술 강탈이야 아까 전사장의 혈술도 완전히 봉인시켰던 걸로 봐서 본래의 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듯했지만, 혈액 조종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이질감도 좀 많고 말이야.'
애초에 뱀파이어의 종족 특질이니 인간인 내 몸에는 맞지 않는 건지, 피를 조종할 때 느껴지는 이질감도 적지 않았다.
이 이질감이 줄면 속도는 지금보다 더 올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계속 사용하다 보면 늘려나?'
사실 내게 있어서 위력이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긴 했다.
어차피 피에 닿기만 하면 죽일 수 있는데 그깟 게 뭐가 중요하겠나. 그냥 좀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초재생도 있으니 혈술을 사용하는 데에 부담도 없겠고.'
나는 이번엔 허공에 띄운 핏물을 세 갈래로 나눠서 쏘아봤다.
나눠서 쏘려니 제어가 훨씬 힘들었다. 이것도 하다 보면 늘겠지.
어쨌든 즉살의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을 얻은 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방어는 부동 장막, 그리고 공격은 혈술을 이용한 즉살, 그리고 초감각까지.
이 능력 조합이라면 이제 웬만한 것들은 내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약점이 없지는 않지.'
너무 빨라서 피를 맞히기도 힘들거나, 아니면 아예 전신을 두르고 방어막을 펼쳐버리는 상대라면 즉살을 사용하기가 여전히 힘들었다.
하지만 내 즉살의 강점은 누구도 이 능력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점에도 있다.
그런 적을 만나더라도 방심을 잘만 이끌어낸다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겠지.
나는 팔짱을 낀 채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거대한 기척이 걸렸다.
뀌이익!
집채만 한 크기의 초대형 멧돼지였다.
이 숲을 떠돌아다니며 제일 많이 마주친 몬스터이기도 했다.
나를 발견한 놈이 콧김을 취익 뿜고는 곧바로 돌진해왔다.
나는 손가락에 피 한 방울을 띄워서 놈에게 쏘아냈다.
핏물에 닿자마자 놈의 몸에 힘이 풀리더니 달려오던 그대로 미끄러지며 요란스레 바닥을 굴렀다.
나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는 놈을 빤히 보고 있다가, 피어오른 흙먼지를 휘휘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만 갈까."
혈술도 충분히 시험해봤고, 이제 아셸한테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