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술 (4)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바람에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리며 정적이 감돈다.
족장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렸다. 이쪽을 노려보는 그녀와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전력에서 밀리는 건 우리였다. 나라고 기껏 진정된 상황에 다시 불씨를 붙이고 싶겠나?
하지만 이대로 쉽게 혈술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겠다.
설득이 안 먹힌다면 협박, 블러핑으로라도 밀고 나가는 수밖에.
'······먹힌다.'
초감각을 얻은 뒤로는 상대방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에도 특히 더 예민해졌다.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하나가 선명히 보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동요를 내보이지 않겠다는 듯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였으나,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 말씀은, 지금 저희 부족 전체와 전쟁을 벌이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당신 혼자서?"
내가 미쳤냐?
하지만 입에서는 속마음과 정반대의 말이 뻔뻔하게 잘도 튀어나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라는 건 서로의 전력이 어느 정도 맞을 때에나 적합한 말이지. 너희로는 날 막기에 역부족이다."
적어도 수천은 될 부족을 홀로 상대하겠다는 인간 하나.
그러나 지금 뱀파이어들 중 내 말을 비웃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명의 초인 앞에 머릿수만큼 무의미한 게 없는 세계다.
나는 이미 내가 군주임을 밝혔다. 그리고 좀 전의 합공을 완벽히 막아내며 압도적인 위세 또한 보여주었다.
이들은 결코 내 말을 허세 따위로 치부할 수 없다.
나는 적개심을 뿜어내며, 한편으로는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노려보는 뱀파이어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경우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다. 이곳에서 내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군주들까지 개입될 것이다. 그러면 부족이 어떻게 될지는 굳이 설명할 것도 없겠지."
"······."
"그러니 현명한 선택을 해라, 족장."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사실 지금 나는 이들에게 힘든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조의 벗이라며 덜컥 찾아온 외부자에게 선선히 내어주기에 혈정은 너무나 중대한 사안이고, 그렇다고 안내하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올 판이었으니.
아셸도 내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지 옆에서 당황한 기색이었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나마의 합리화라면 먼저 공격했던 건 저쪽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부동 장막 아니었으면 진작 수십 번은 죽었다고.'
반면 이쪽에서는 이렇게 말로만 공갈을 치고 있으니 얼마나 평화적인가.
"말했다시피 내 목적은 혈정의 파괴뿐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다."
"이런 식의 협박을 하고······ 우리가 당신의 말을 신뢰하길 바라는 겁니까?"
"신뢰야 아무래도 좋다. 어찌 됐든 너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뿐이었으니."
"······."
"너희 부족도 언제까지고 그 저주받은 물건을 품에 안고 있을 거지? 혈정에 의식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다. 언제 부활할지 모르는 선조의 분신을 두려워하며, 네 핏줄들에게도 계속해서 그런 희생을 강요할 건가?"
줄타기가 중요했다. 너무 몰아붙이다가 다시 싸움이 나면 전부 끝이다.
채찍질만 하는 대신 나는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당근을 강요했다.
어쨌든 그들도 나에 대한 신뢰가 없을 뿐이지, 혈정을 처리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한다면 무얼 망설이겠는가?
족장은 고뇌가 깊어진 기색이었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최소한 혈정을 어떻게 파괴하겠다는 건지는 설명해주십시오."
역시 그걸 묻는군.
이 정도는 예상한 물음이었기에 태연하게 답했다.
"혈정에 잠들어있는 네 선조의 혼을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 내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지."
사실 혈정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선 아직 나도 확신은 없었다.
왜냐면 게임에서 나왔던 것처럼 혈정을 처리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게임의 스토리에서는 강력한 유물의 힘을 빌려 플레이어의 마법사 동료가 가스칼리드의 혼을 소멸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렇게 영혼만 처리하면 돌에 남은 주인 없는 혈술은 가까이 있던 자에게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종족에 상관없이, 마치 신비처럼.
지금의 내게는 그런 유물이 없고 구할 여건도 되지 없었으니 게임에서 봤던 정석 공략은 애초에 막힌 방법이었다.
하지만 대신 믿고 있는 건 있었다.
정신을 보호해주는 제왕의 혼.
그리고 어떤 대상이든 죽일 수 있는 즉살.
내가 가진 이 두 능력이라면 가스칼리드의 정신 공격을 막을 수도 있고, 또 혈정에 접촉함으로써 그의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즉살이 영체에도 통하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유일무이의 10성급 스킬인데 영체라고 안 통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냥 감일 뿐이지만 확신에 가까운 감이었다. 저번에 던전에서 가디언을 마주했을 때처럼.
"······."
다시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족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체 선조께서 하셨던 약속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우리에게 있어 오랫동안 이어온 부족의 평화를 가장 위협하고 있는 건 바로 당신인데."
······뭐, 그야 애초에 했던 적이 없는 약속이니까.
내가 생각해도 약간 억지인 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녀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안내해드릴 테니 따라오십시오."
······됐다.
마지못한 기색이 가득한 쌀쌀맞은 목소리였으나 난 속으로 환희를 외쳤다.
뱀파이어들도 하나둘씩 나무에서 내려와 날 경계하듯 그녀의 주위를 호위했다.
전사장도 복잡한 얼굴로 나를 슬쩍 바라보고는 그녀의 옆에 붙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서 아셸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
숲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서서히 건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막이나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들도 있었고, 제법 큰 석재 건축물들도 눈에 띄었다. 저런 건 도시에서나 볼 법한데.
야생에서 살고 있다지만 부족의 규모도 그렇고 긴 세월 동안 자리를 잡고 있던 만큼, 이들의 터전은 거의 작은 도시나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데려온 뱀파이어들은 어떻게 할 건가?"
루디카 자매의 행방이 궁금해져서 묻자 족장이 대답했다.
"우리 부족은 외부에서 온 동족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어려움 없이 이곳의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한 뱀파이어와 함께 있던 루디카 자매가 보였다. 아까 다짜고짜 그녀들을 데려간 그 뱀파이어였다.
자매가 날 발견하고 안도한 기색으로 소리치며 뛰어왔다.
"론!"
잠깐 못 본 것치고는 격한 반응이었기에 왜 이러나 싶었다.
루비카가 족장 무리를 한 번 흘겨보고는 내게 말했다.
"제,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는 줄 알고······ 그보다 괜찮은 거예요? 아까 분명 싸우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그 말에 전사장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이쪽의 시선을 피했다.
니들이 사라지자마자 졸렬하게 기습부터 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관뒀다. 너무 품위가 없어 보일 것 같다.
"괜찮다."
"······이제 이대로 떠나시는 건가요?"
그녀가 조금 슬픈 눈으로 나와 아셸을 번갈아 봤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름 정은 들었던 모양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그것만 처리하고 떠날 거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이제 너희는 이들과 함께 잘 살아가거라."
"······."
"무사히 새 터전을 찾아서 다행이다."
루디카가 울먹거리고, 루비카도 곧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카까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기에 나는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
"정말 감사해요, 론. 당신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선의를 평생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갈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가지."
옆에서 묘한 눈길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족장을 재촉해서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마을 깊숙한 곳까지 이동하자 족장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장로님들에게도 일단 말을 전해야겠습니다."
뱀파이어 몇몇이 그들을 부르러 가는 듯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늙은 뱀파이어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족장님."
족장이 주위로 뭉친 그들이 이쪽을 흘겨보며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내 결론이 난 듯하더니 장로 뱀파이어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를 향해서 다가왔다.
"선조님의 친우께서는 혈정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거부할 권한 없이 그것을 믿는 수밖에 없고요."
"그래."
그가 가만히 날 응시하더니 말했다.
"혈정을 처리하시는 과정을 저희가 지켜볼 수 있겠습니까?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는 듯하니 그 조건만 받아들여주십시오."
뭐라도 허튼 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최소한 보고는 있겠다는 뜻이었다.
달리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족장과 전사장, 장로들과 함께 혈정이 있는 곳으로 곧바로 이동했다.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동굴이었다. 입구에는 다른 뱀파이어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경사진 동굴길을 내려가자 넓은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었는데, 그 위쪽에 박혀있는 붉은 돌이 요사스럽게 빛나며 핏빛으로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저게 혈정인가.'
나는 한눈에 봐도 불길하기 그지없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돌을 빤히 응시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게임에서 봤던 풍경과 비슷하다.
족장이 내게 말했다.
"저것이 혈정입니다. 좀 전에 의식을 치뤄서 현재는 기운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렇군."
"······지금 바로 시작하실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위에 난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온몸을 찌르는 불길함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아직 돌에는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Lv. 95】
혈정의 바로 위쪽에 표시된 레벨이 그 기운이 얼마나 강대한 것인지를 아주 잘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나왔듯, 기껏해야 망령에 불과한 놈이 끼칠 수 있는 건 물리적인 피해가 아니다.
단지 정신적인 공격뿐이라면 제왕의 혼이 완벽히 막아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내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혈정의 바로 앞에 선 나는 천천히 그것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혈정에 손이 닿자, 곧이어 압도적인 존재감이 내 심상에 침입하는 것이 느껴졌다.
'······크하하하하하핫!'
시끄럽기 그지없는 웃음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가스칼리드의 영혼이다.
나는 잠자코 손을 댄 채 놈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뭐냐, 이번에는 또. 동족이 아니라 인간이냐? 내 피를 이어받기는 커녕 뱀파이어도 아닌 놈이 감히 나의 분신에 손을 대?'
화아아악!
혈정에서 뿜어져나오는 핏빛이 강해졌다.
놈의 존재감이 강해지며 내 정신을 뒤흔들려고 지랄발광하는 게 느껴졌다.
그 정신파가 얼마나 강력한지 동굴이 미약하게 진동하고, 아래에 있던 뱀파이어들까지 머리를 붙잡고서 비틀거렸다.
그러나 나는 마치 홀로 태풍의 눈의 한가운데에 있는 듯했다.
아주 평화로운 마음으로 놈이 난리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래도 좀 긴장했었는데 진짜 별 거 없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황한 듯한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뭐냐······ 넌? 진작에 정신이 붕괴됐어도 모자랄 판에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냐?!'
나도 놈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야, 망령.'
'······허?'
'아, 들리는 건가? 아무튼 고맙다. 네 능력은 내가 잘 가져가마.'
정말 진심으로 전하는 감사였다.
이제 편히 성불하라고 곧바로 즉살을 발동했다.
'죽어.'
쿠구구구.
놈의 존재감이 한순간에 사라지며 진동이 멎었다.
동굴에 가득했던 기운이 증발한 듯 사라지자 뱀파이어들이 얼떨떨하게 이쪽을 올려다봤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빛이 흐려져가는 혈정을 빤히 내려다봤다.
이내 그 미약한 핏빛마저 전부 흩어지며 내 팔을 타고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